55세 김환기의 청셔츠는 왜 반세기 지나도 '모던'한가

한태민 패션 칼럼니스트 2021. 3.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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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리스트] [9] 한태민 패션칼럼니스트 - 중년 남성 패셔니스타 5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로 시작한 당신의 리스트 제9회에선 한태민 패션칼럼니스트가 중년에도 멋진 남성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계가 반한 중년 남성 패셔니스타 5ㅡ편집자

패션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또 서울에 와서는 세계 패션 트렌드를 소개하는 편집매장 대표로 일하면서 20년 넘게 해외 멋쟁이들을 만나왔다. 세계적인 패션 모델부터 기업인, 노년의 배우들까지 숱한 이들을 봐오면서 발견한 공통점이 있다.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발하는 것. 중년이 되고서도 더욱 멋진 이유다. 그들 중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중년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이들을 뽑아봤다. 수십 년 전 모습이지만, 지금 패션쇼의 한복판에 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패션에 대한 선구적 감각과 시대와 무관한 클래식 감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고수하는 것. 마네킹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 몰개성·무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김환기의 청셔츠나 스티브 매퀸의 니트처럼 기본적인 아이템이지만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계속 입다 보면 그 사람만의 ‘멋’으로 자리 잡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패션이 ‘요즘의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게 바로 이런 이유다. 꾸미는 게 어색하고 힘들다면, 이들 중 한 명을 모델 삼아보자. 중년 이후 흐트러진 몸매를 보완해줄 패션 팁(tip)도 함께 적는다.

◇김환기(1913~1974)

2021년 런웨이인듯…'환기 블루' 청셔츠와 트렌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 화백. 한국적인 서정성을 절제된 조형언어로 세계화한 주인공이다. 백자항아리, 달, 나목(裸木) 등 소재로 한국의 풍류와 정서를 재창조했고, 우리의 쪽빛 바다와 드높은 가을 하늘의 생명력을 닮은 ‘환기 블루’ 등으로 서구 세계도 매료시켰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냈던 그의 스타일은 화폭을 벗어나 패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적당히 뒤로 넘긴 머리, 뿔테 안경, 넥타이 등으로 간결한 멋을 낸 그는 ‘인텔리 모던 보이’ 그 자체였다.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하던 중년 시절, 트렌치 코트와 청셔츠로 ‘파리지앵’과 ‘뉴요커’를 넘나들었다. 작업할 때 주로 입었다는 청셔츠는 무척이나 서양적이면서도, 한편으론 고향 바다와 내내 함께하는 듯하다. 백자를 닮은 모시 적삼 한복을 입곤 하며 한국적 DNA를 지켜왔다. 소박하면서도 촉감과 질감을 중시했던 그의 작품 세계가 느껴지는 듯하다.

①1968년 그의 뉴욕 스튜디오. 작업할때는 주로 청색 셔츠를 입었다. 샴브레이 셔츠(씨실과 날실을 각각 다른 색으로 염색한 것)에 치노 팬츠(두꺼운 능직 면바지)를 입은 그는 아메리칸 클래식을 입은 동양인 모델 같다. ②1957년 파리. 래글런(어깨와 소매를 구분하는 박음질 선이 없는 낙낙한 재단) 소매의 트렌치 코트에 모직 머플러를 안에 두르고 프렌치 빈티지 스타일의 안경을 쓰고 있다. 올해 찍은 사진이라 해도 믿을 만큼의 패션 감각이다. ③1955년 서울 성북동 자택 앞에서 한복을 입은 김환기 화백. 넉넉한 품의 개량 한복을 공항 패션으로 소화한 BTS 정국이 떠오른다.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1957년 파리. 김향안 여사와 파리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할 때 모습이다. 훤칠한 키의 김환기는 래글런(어깨와 소매를 구분하는 박음질 선이 없는 낙낙한 재단) 소매의 트렌치 코트에 모직 머플러를 안에 둘렀다. 그 시대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헤어 스타일과 프렌치 빈티지 스타일의 안경을 쓰고 있다. 올해 찍은 사진이라 해도 믿을 만큼의 패션 감각이다.

-1956년 김환기 화백이 파리 활동 시 뤽상부르 공원 근처 뤼 닷사스 구역에 위치한 첫 번째 아틀리에에서 찍은 사진. 트위드 재킷에 코듀로이 팬츠를 입었다. 넥타이의 매듭은 작고 단단하게 잘 매여 있다. 60년대 매력적인 유럽 신사 같다. 단지 유럽만의 느낌보다 미국, 일본 등을 여행한 경험이 많은 멋쟁이 같다.

-1968년 그의 뉴욕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 작업할 때는 주로 청색 셔츠를 입었다. 샴브레이 셔츠(씨실과 날실을 각각 다른 색으로 염색해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리 보이는 것)에 치노 팬츠(두꺼운 능직 면바지)를 입은 그는 아메리칸 클래식을 입은 동양인 모델 같다. 캐주얼을 입더라도 제대로 입는 그의 센스가 경이롭다.

-1955년 서울 성북동 자택 앞에서 한복을 입은 김환기 화백. 2021년 한복의 유행을 그는 이미 알았던 것일까. 넉넉한 품의 개량 한복을 공항 패션으로 소화한 BTS 정국이 떠오른다.

-1963년 10월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 리버사이드 공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트렌치 코트 하나로 ‘뉴욕의 가을’을 표현했다.

-청셔츠는 ‘젊음의 상징’이라지만 은발과 어울렸을 때 매력은 증폭된다. 이탈리아 중년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 중 하나. 셔츠가 부담스럽다면 ‘환기 블루’ 색상의 재킷을 걸쳐보자.

◇ Steve Mcqueen(1930~1980)

시대를 초월하는 니트 패션의 황제

한때 카레이서를 꿈꿨던 열혈 남아 스티브 매퀸. 영화 르망(1971)의 불꽃 튀는 자동차 경주 장면에서 폭발적인 아드레날린으로 스크린을 뒤덮은 그다. 1963년 잡지 ‘라이프’는 그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임스) 캐그니의 건방짐(cockiness), (험프리)보가트의 도끼눈(glower), (존) 가필드가 지닌 거친 다이아몬드 원석 느낌, 그 모든 것을 섞은 괴짜(oddbal)”라고. 당대의 지극히도 미국적인 ‘마초맨’들의 개성을 한 몸에 지닌 그였지만, 그에게 ‘과장됨’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편안한 니트, 몸에 잘 맞는 셔츠, 적당히 걸친 점퍼…. 과하게 꾸밀수록, 옷과 액세서리에 파묻힐수록 촌스러워진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20대에 요절한 제임스 딘의 청춘에 머물러 있지도, 할리우드의 명암을 모두 겪으며 103세에 눈을 감은 커크 더글러스처럼 세기를 넘나들지 않았어도 레전드가 됐다. 진짜 남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그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스타일리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지금 MGM)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에서 북유럽 선원들이 자주 입던 아란(Aran·영국 애런 섬에서 따온 말/튼튼하고 굵은 양모 원사로 짠 니트) 스웨터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 올해 찍은 룩북(look-book·디자이너 의상 화보)이라 해도 어색함이 없다.

배 나온 중년에겐 넉넉한 아란 스웨터로 착시 효과를. 독특한 짜임에 힘 있는 원단을 고른다. 흐물흐물하면 몸에 붙는다.

◇ Alain Delon(1935~)

밝은 셔츠·재킷으로 반사판 켠 듯

지중해를 닮은 눈동자로 보기만 해도 빠져들 것만 같았던 프랑스의 명배우 알랭 들롱. 모성애를 자극하는 예민한 눈빛, 자극적이지만 느끼하지 않은 퇴폐미는 ‘옴파탈(homme fatale)’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가 발명된 이후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알랭 들롱이지만 그의 수려한 외모 때문에 패션 감각이 과소 평가된 경향이 있다. 그의 1960년대 시절은 60년 전 이미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 손을 베일 듯한 날카로운 깃의 슈트, 살짝 걸친 코트, 새끼손가락을 장식한 까르띠에 트리니티 반지. 노년의 알랭 들롱에게선 젊은 시절의 수려함을 찾아볼 수 없지만 짙은 색 슈트, 검은 구두, 노타이 화이트 셔츠는 아직도 그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프랑스 멋쟁이 거리로 유명한 생제르맹 데 프레 근처의 고급 카페를 가보면 그와 비슷한 풍모의 멋진 신사들을 볼 수 있다.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에 친절한 인사라니, 참으로 파리(Paris)답다.

/Melba label

영화 ‘체이사'(Mort d’un pourri·1977) 속 마흔 둘의 알랭 들롱. 아이보리색 울 재킷에 연녹색 셔츠는 생각하기 어려운 조합이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이런 밝은 색의 코디네이션은 동양인에게도 환하고 멋지게 어울린다.

-셔츠 단추를 푼 모습은 알랭 들롱의 시그니처. 남성의 멋은 V존(옷깃이 만드는 V자)에서 나온다.

◇ Gianni Agnelli(1921~2003)

셔츠 소매 위 시계로 이태리식 위트를

1921년생인 지아니 아넬리는 이탈리아의 ‘국민차’인 피아트(FIAT) 창업자의 장손이다. 1960년대 피아트를 고급차로 부흥시켰고, 1990년대 유럽 명문 축구 구단으로 꼽힌 유벤투스 회장을 지냈다. 이탈리아 근대사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 중 하나다. 법을 전공했지만 변호사 시험을 보지 않아 실제 변호사가 된 적은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선 L’Avvocato(변호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의 카리스마 때문일 것이다. 명성 못지않게 그가 남자 복식사에 남겨놓은 족적은 누구와도 견주기 힘들다. 셔츠 소매 깃 위에 시계를 찬다든가, 슈트에 부츠를 신어 젊은 층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인보다 더 멋지게 데님을 소화한 걸로도 유명하다.

/파텍 매거진

1960년대쯤의 사진. 시그니처인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재킷에 두 줄로 평행하게 단추를 달아 여미는 정장)와 하늘색 드레스 셔츠, 셔츠 위로 손목시계를 착용한 모습이다. 그는 평생 이런 스타일을 고집했는데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셔츠 위 손목 시계로 멋쟁이에 시선 분산 효과까지!

◇ Sean Connery(1930~2020)

‘영원한 제임스 본드’의 목폴라

시대의 아이콘이자 스타일 아이콘이기도 한 숀 코너리. 1962년부터 10년간 제임스 본드를 맡으며 선보인 패션은 후대 제임스 본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골드 핑거(1963)에서 선보인 연회색 글렌체크(작은 격자무늬) 스리피스(재킷·바지·조끼) 슈트는 격식을 차리면서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영국 맞춤복 장인인 앤서니 싱클레어 작품. 숀 코너리는 당시 유행하던 현란한 스타일 대신 우아하고 절제된 패션을 강조했다. 흔히 목폴라(터틀넥·롤넥)라 불리는 의상도 숀 코너리의 상징이다. 젊은 시절 탄탄한 체격의 그는 몸에 딱 맞는 목폴라로 남성미를 강조했고, 이는 곧 대니얼 크레이그가 ’007 스펙터'(2015)를 찍을 때 영감을 줬다. 중년 이후 반백에 머리숱도 적어졌지만, 목폴라에 재킷 차림으로 단정한 멋을 낸 그는 한결 우아해 보인다.

/게티이미지

1983년 아이보리 색상의 터틀넥 니트와 짙은색 울 재킷을 입었다. 강한 대비의 착장이 흰머리의 숀 코너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전통적이지만 모던한 느낌이다.

-터틀넥 니트는 중년 남성의 ‘젠틀미’를 위한 필수품. 목주름도 감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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