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지식카페>하늘과 땅 잇는 신의 전령사.. 佛 '國章'으로 쓰이며 왕정에 神性 부여




■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④ 붓꽃
왕 즉위식 때 깃발·휘장에 그려져… 세 꽃잎은 종교의 삼위일체 상징하며 통치권 강화
전세계에 수천종, 국내에도 15종 자생… 현재는 보이스카우트 엠블럼으로 사용
해마다 봄이면 정원에 여러 종류의 붓꽃들이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봄 가장 일찍 청초한 보랏빛 꽃을 선보이는 각시붓꽃부터 연한 하늘색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타래붓꽃, 뒤를 이어 청자색 제비붓꽃과 꽃창포도 이어달리기를 하듯 꽃을 피운다. 꽃잎에 수염이 난 독일붓꽃의 풍성하고 화려한 꽃들도 튤립과 수선화가 소임을 다한 봄꽃 화단에 패션쇼를 하듯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어떤 꽃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적 아름다움을 지닌 붓꽃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왔다. 붓꽃을 묘사한 최초의 기록은 4000년 전 그리스 크레타 섬에 위치했던 크노소스의 미노아 궁전 프레스코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무지개 여신으로 등장하는 아이리스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신의 전령사였는데 헤라 여신이 불어넣은 축복의 숨결로 붓꽃이 됐다.
붓꽃은 중세 이후 프랑스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5세기 말 클로비스 1세가 프랑크족을 통일시키며 붓꽃을 양식화한 상징을 왕가의 문장(紋章: 귀족이나 왕의 집안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채택하면서부터였다. 이 문양은 19세기까지 프랑스 국장(國章)에 사용됐고, 영국 링컨, 이탈리아 피렌체, 독일 비스바덴 등 다른 유럽 도시들의 상징으로 널리 퍼졌다. 정확히, 그 붓꽃은 강가의 얕은 물에서 자라는 노랑꽃창포(Iris pseudacorus)였다.
노랑꽃창포는 어떻게 야만과 혼돈의 중세 시대 프랑스 왕정을 사로잡았을까. 전설에 따르면,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 클로비스와 그의 군대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퇴각하다 강을 만나 더 이상 후퇴할 수 없게 됐을 때 이 꽃들을 발견했고, 그 덕분에 수심이 얕은 지점을 찾아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꽃들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군대가 몰살될 수도 있었기에, 클로비스는 이 꽃을 귀하게 여겼고, 그 문양을 국가적 상징으로 사용했다. 그 후 이 문양은 왕의 즉위식이 거행될 때 깃발과 휘장에 그려졌고, 성유가 담긴 성배에도 새겨졌다. 붓꽃을 형상화한 이 문양을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Fleur-de-lys)라고 하는데, 프랑스어로 플뢰르는 꽃을, 리스는 레이(Leie) 혹은 리스(Lys) 강을 의미한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리스는 백합을 뜻하기도 해, 많은 사람이 플뢰르 드 리스가 백합꽃을 상징한다고 믿기도 했다.
하지만 플뢰르 드 리스는 색깔과 모양, 배경이 전혀 백합과 연관되지 않았으며 오랜 역사에 걸쳐 전해져 온 대로 노랑꽃창포를 상징으로 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를 논리적으로 밝힌 학자가 있었다. 18세기 자연주의자이자 사전편찬자였던 피에르오귀스탱 브와시에 드 소바주(1710∼1795)는 오래전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플란더스 지방의 리스 강가에 노랑꽃창포 자생지가 있었다는 점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이 꽃은 노란색인 데다가 생긴 모양도 정확히 플뢰르 드 리스와 일치하는데, 여섯 장의 꽃덮이조각(화피편) 중 안쪽에 있는 화피편 세 장이 곧추서서 윗부분이 합쳐지고, 나머지 바깥쪽 화피편 세 장은 뒤로 젖혀지며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중 하나의 꽃잎은 줄기와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고 나머지 두 장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을 향해 있다. 이에 반해 백합은 색깔과 모양이 플뢰르 드 리스의 디자인과 동떨어져 있다.
문장학자였던 프랑수아 벨데의 주장도 흥미롭다. 그는 노랑꽃창포의 독일어 이름이 리시블룸(Lieschblume)이라는 것에 착안했다. 이 이름이 중세에는 리스(Lies) 혹은 레이스(Leys)라고 쓰였는데, 따라서 독일과 인접한 북프랑스 지역에서 이 꽃이 플뢰르 드 리스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붓꽃을 형상화한 플뢰르 드 리스가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국장으로 쓰인 것은 12세기였다. 루이 6세는 클로비스의 전설을 문헌으로 기록하고, 그 상징적 의미 등을 체계적으로 스토리텔링해 국장 디자인에 활용했다. 강물을 배경으로 피어난 노랑꽃창포를 표현하기 위해 파란색 바탕에 플뢰르 드 리스가 흩어져 있는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플뢰르 드 리스는 정치·예술적 상징 외에 종교적 의미를 지녔다. 세 꽃잎은 믿음, 지혜, 기사도를 뜻하기도 했지만, 삼위일체를 상징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군주들은 이러한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통치에 신성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중세 시대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000년간의 암흑시대를 거치며 종교의 권위가 정치권력을 압도했던 중세 시대에 노랑꽃창포 외에도 많은 식물이 교회를 위한 상징성을 나타냈다. 특히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므로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을 뜻하는 새하얀 백합꽃도 아주 비중 있게 다뤘다. 가령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대천사 가브리엘이 들고 있던 세 송이 백합은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을 의미했다. 또한 제비꽃은 마리아의 겸손을 상징했으며, 붉은 장미는 순교자의 피를 뜻했다. 칼 모양의 잎 때문에 독일붓꽃 종류는 성모통고의 칼로 불렸다. 중세 시대 성화 속에서 성모 마리아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원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평화롭게 그려져 있다. 그 정원엔 마돈나백합, 은방울꽃, 작약 그리고 붓꽃 종류도 포함돼 있다.
한편 그리스와 로마 고전 시대의 수준 높은 식물 지식들은 중세 수도원을 중심으로 유지 보전됐다. 채마밭과 약초원이 주가 됐던 수도원의 정원에서는 식물의 실용적 가치가 귀하게 여겨졌다. 수도원장은 의학과 식물에 관한 최고의 지식을 갖췄고, 수도사들은 약초 의학서 등 로마의 매뉴얼에 정통했다. 야생과 분리돼 담장으로 둘러싸인 수도원의 정원은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낙원이었다. 제단에 올릴 꽃들과 함께 각종 채소와 허브류를 재배하는 직사각형 화단들은 십자 형태로 구획됐고, 그 중심에는 분수 연못이 있었다. 호르투스 콘클루수스(hortus conclusus)라고 불렸던 중세시대 수도원 정원은 이슬람 정원과 마찬가지로, 천국에 대한 암시로서 지상에 구현된 천국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는 이들 수도원을 통해 과실수 접목, 트렐리스 재배 등 다양한 원예 기술이 발달했고, 정원에서 실용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 채소 작물들의 목록들도 크게 확대됐다. 이것이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오늘날 서양 정원 가드닝의 근간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중세 시대 수도원 정원은 개인의 소유욕 내지는 향락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의 수양과 기도를 위한 장소였다. 6세기 성 베네딕토 수도원 수도사들은 정원에서 일하며 헌신했고, 11세기 카르투시오 수도회 수도사들은 외부와 단절된 거주 공간에서 과일과 약초를 재배했다.
붓꽃은 꽃봉오리가 먹물을 머금은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붓꽃은 아이리스, 꽃창포라고도 불리는데 워낙 종류가 많다. 붓꽃속은 300종류 가까이 되는 원종이 북반구 온대 지방 전역에 걸쳐 살아가는데, 서식지 환경도 고산 암반 지대부터 건조한 반사막 지역, 초원, 강둑, 저지대 습지까지 매우 다양하다. 게다가 이들 원종 붓꽃 종류들로부터 수천 가지 품종이 만들어져 전 세계 정원에서 사랑받고 있다.
붓꽃은 서식 환경에 따라 연꽃처럼 뿌리줄기가 옆으로 기면서 자라는 종류가 있고, 양파나 마늘처럼 비늘줄기로 자라는 종류가 있다. 무지개를 뜻하는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만큼 꽃의 색깔과 모양은 매우 다양한데, 특히 바깥쪽으로 젖혀 있는 외화피에 있는 무늬는 붓꽃의 종류마다 독특한 식별 포인트가 된다. 가령 붓꽃은 이 무늬가 짙은 호피 무늬로 돼 있고, 꽃창포는 노란색 역삼각형으로 돼 있다. 심지어 이 무늬에 금빛 수염(bearded) 같은 잔털이 나 있는 독일 붓꽃 종류도 있다. 이러한 무늬를 꿀 안내선(honey guide)이라 하는데 벌이나 나비 등 꽃가루받이 매개 곤충을 꽃꿀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솔붓꽃, 금붓꽃, 노랑붓꽃, 부채붓꽃 등 열다섯 종류의 붓꽃 종류가 자생하고 있다. 그중 습지에 자라는 붓꽃 종류는 꽃창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난초로 알고 있는 화투의 5월에 그려진 꽃도 꽃창포다. 창포와 비슷한 모습으로 물가에 자라면서 예쁜 꽃을 피운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꽃창포의 종소명 프세우다코루스(pseudacorus)도 가짜 창포(Acorus calamus)를 뜻하는 말이다. 잎을 삶아 단옷날 머리를 감는 풍습의 주인공인 창포는 천남성과에 속하며 꽃은 소시지 모양으로 핀다.
프랑스의 상징 노랑꽃창포도 우리나라에 자생한다. 오래전 관상용으로 수입된 개체들이 야생으로 퍼져 귀화한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 땅의 습지에 자라는 애기부들이나 꽃창포 같은 자생 식물들의 고유한 터전을 파고들게 되면 걱정이지만, 수질 정화가 필요한 인공 수변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제 몫을 하고 있다.
오늘날 플뢰르 드 리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왕실의 문장과 종교의 상징으로 고귀하게 쓰였던 예의 그 붓꽃 문양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 거리 곳곳에서, 패션이나 디자인 장식으로, 펜스나 철문의 기둥 상단 마감에 쓰이거나 액자 테두리 혹은 패브릭을 꾸미는 단순한 패턴으로도 쓰이고 있다. 플뢰르 드 리스는 보이 스카우트를 상징하는 엠블럼이기도 하다. 여기서 세 장의 꽃잎은 이제 삼위일체가 아니라 스카우트의 세 가지 약속, 즉 신에 대한 의무, 자신에 대한 책임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 정신을 담고 있다.
국립세종수목원엔 2.4㎞의 청류지원이 흐르고 있다. 금강의 물줄기가 수목원의 정원들을 휘감아 돌며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 주변으로 수많은 붓꽃이 뿌리를 내렸다. 자생 붓꽃 종류뿐 아니라 다양한 희귀 붓꽃 종류들이 어우러져 이른봄부터 초여름까지 꽃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그중 물가에 핀 노랑꽃창포는 예의 그 역사 속 존재감을 과시하며 진한 노란색으로 눈길을 끈다. 이러한 다양한 붓꽃은 과거의 상징성과 정원의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앞으로 다양한 생물의 보금자리가 되고 지구 환경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선물’ 혹은 ‘기쁜 소식’이라는 붓꽃의 꽃말처럼 말이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 노랑꽃창포(Iris pseudacorus)
붓꽃과에 속하는 노랑꽃창포는 유럽, 북아시아, 북아프리카 원산으로, 북아메리카, 특히 동부 지역에 귀화해 널리 자라고 있다. ‘노랑 깃발(yellow flag)’이라는 뜻의 영명을 가지고 있는데, 중세 시대부터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프랑스의 국장에 사용됐다. 내화피와 외화피가 모두 노란색이며 외화피에 잔털은 없다. 습지나 연못가에서 군락을 이루며, 키는 1m 가까이 자란다. 창 모양의 잎과 뿌리줄기가 천남성과의 식물 창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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