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500만원으로 100억을..5수생 청년의 '기적'

평창올림픽 개·폐막식 참여한 스타트업
'닷밀(dot.mill)' 정해운 대표
늦깎이 대학생·초보창업자에서 미디어아트 강자로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평창 스타디움 경기장은 캔버스로 변했다. 수천개 불빛으로 이뤄진 기둥이 바닥에서 하늘 끝까지 차올랐다. 때론 불빛으로 만든 거대한 비둘기가 경기장 바닥을 노닐기도 했다.

출처: 네이버TV SBS영상 캡처
개막식 모두를 위한 미래-'세계로의 연결'

현실과 가상을 넘나든 무대를 전 세계인이 맨눈으로 볼 수 있었다. 혼합현실(MR) 기술 덕분이다. 가상현실을 뜻하는 VR은 전용 안경이 필요하고, 증강현실을 말하는 AR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가 있어야만 한다.


개·폐막식 무대를 만든 주인공은 미디어 아트 스타트업 ‘닷밀(dot.mill)’이다. 꿈과 소통을 그린 ‘모두를 위한 미래 ’, LDP무용단과 함께한 ‘시간의 축’을 비롯해 총 6개 공연을 제작했다. 닷밀은 이번 평양 ‘봄이 온다’ 공연에서 오프닝을 맡기도 했다.


2012년 정해운(34)·이재우(33) 대표가 함께 닷밀을 설립했다. 홍대 무보증 단칸방에서 500만원으로 창업했다. 2017년 매출은 50억원. 올해는 100억원을 예상한다. 정 대표는 남다른 감각 덕분에 ‘유학파 출신이냐’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그는 국내파다. 꿈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5수 끝에 서울예대 디지털아트과에 입학한 늦깍이 대학생이었다. 정 대표가 꿈을 찾기까지 걸어온 길, 그리고 창업시장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법을 들었다. 

출처: 닷밀 제공
정해운 대표.

방황했던 학창시절, 뒤늦게 찾은 꿈


정 대표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때부터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만화책방·카페·PC방·애견 미용실에서 일했고, 고등학교 때는 독학으로 배운 웹디자인으로 외주 제작을 하기도 했다.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화와 컴퓨터를 좋아해 영화감독이나 프로그래머를 꿈꿨다. 2003년 부산에 있는 한 대학의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1년 만에 자퇴했다.


기숙학원 다니면서 영화과를 목표로 수능 공부를 했다. 나름 자신 있었고 수능 성적도 잘 나왔다. 하지만 대학에 떨어지고 말았다. 군대에 가서도 수능 시험을 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제대 후 2007년 서울예대 디지털아트과에 입학한 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영상 제작은 기본이고 프로그래밍·포토샵·일러스트를 배우고, 회로도 공부하고 납땜도 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얕게 배우는 거지만, 다양하게 경험하며 적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서울예대는 매년 여러과에서 3~5분짜리 공연을 무대에 올려 경합하는 축제를 연다. 하지만 이 축제에서 디지털아트과는 외면당하곤 했다. 무용이나 영화는 비교적 결과물을 내기 쉬웠으나, 당시 디지털 아트는 무대에서 올리기 적합하지 않은 장르였다. 정 대표는 디지털아트도 무대에서 즐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축제 주제가 ‘도깨비’였어요. 우리나라 전통적인 도깨비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친구와 후배들까지 10명이 뭉쳤습니다. 손가락에는 레이저를, 손바닥에 LED를 달아서 퍼포먼스를 했어요. 영상도 쏘고, 블랙라이트라는 조명을 써서 불이 껐다 켜지게 해서 도깨비 불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5분짜리 공연이 끝나고 2~3초간 정적 끝에 함성이 터져나왔는데,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디지털아트과는 사상 처음으로 경합에서 우승을 했다. 정 대표는 그때부터 기술과 예술을 결합하는 크리에이터를 꿈꿨다. 졸업전시도 남다르게 준비했다. 강남에 있는 삼성 딜라이트 건물에 무작정 찾아가 ‘졸업전시를 하겠다’고 했다. 나흘 동안 미디어 파사드를 이용한 전시를 했다. 미디어 파사드란 건물 외벽에 LED 조명을 쏴 다른 모양으로 보이게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삼성 갤럭시탭을 누르면 딜라이트 건물 조명이 바뀌도록 해 호평을 받았다. 

출처: 네이버TV SBS영상 캡처
행동하는 평화-'평화의 노래'

취업 1년 만에 잘리고, 창업 2년 만에 쫓겨나기도···


졸업 전시를 포트폴리오 삼아 그는 2011년 콘텐츠 제작사에 들어갔다. 당시 유일하게 혼합현실 기술을 이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정 대표는 1년 만에 회사에서 잘렸다. “제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죠. 상사에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자주 물었는데, 그게 갈등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


2012년 초 컴퓨터 2대를 갖고 창업했다. 초기에는 매순간이 고비였다. 사회초년생을 무시하는 회사가 많았다. 2013년에는 사무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주인 허락없이 거주 공간으로 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게 망한 거였더라구요. 그런데 망했다고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당시엔 선택지가 없으니까 계속 저희가 할 수 있는 걸 했습니다.”


2014년부터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대기업 두산과 함께 했던 미디어 퍼포먼스가 반응이 좋았다. 몽골·미얀마 등 해외 공연 요청도 받았다. 이후 국·내외에서 큰 행사를 도맡았다. 여태까지 작업한 작품 수만 500개를 넘는다.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폐막식, 부산국제영화제, 삼성 갤럭시 언팩 행사, 엠넷 뮤직 아시안 어워즈 등 굵직한 행사에서 디지털 아트를 제작했다.


“영상·음악·안무·IT 기술을 혼합한 미디어 퍼포먼스는 국내에서 저희가 처음 만들었습니다. 미디어 퍼포먼스는 융합 콘텐츠예요. 직원이 50명 정도 있습니다. 디자이너나 영상 제작자, 프로그래머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작곡가·안무가도 있습니다.”    

출처: 비메오 닷밀(vimeo.com/dotmill) 영상 캡처
(왼쪽부터) 부르즈칼리파 갤럭시9 광고와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MAMA)에서 방탄소년단 공연. 삼성과는 갤럭시 노트 7부터, CJ E&M과는 2015 MAMA부터 협업하고 있다.

회사 창립 때 세운 목표 이뤄, 다음 꿈은 MR콘텐츠 파크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공연은 닷밀의 오랜 꿈이었다. “회사 만들 때부터 주변에 ‘평창올림픽 개·폐막식은 우리가 하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비웃는 분도 많았습니다. 간절한 꿈을 이뤄 기쁩니다.”


개·폐막식 디지털아트 제작사를 뽑는 경쟁 입찰에 쟁쟁한 회사들이 몰렸다. 8개 후보 회사가 있었고, 닷밀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였다. 그래도 정 대표는 자신 있었다. “준비된 업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저희 같은 디지털아트 전문 회사는 없었습니다. 광주 유니버시아드 개·폐막식이라든지 큰 행사를 여러번 맡아본 팀은 저희가 유일했어요. 이런 면에서 저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닷밀을 비롯해 2개 회사가 뽑혔다. 닷밀은 개·폐막식 공연 절반을 맡았다. 2017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주어진 기간은 11개월.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해야 했다. “목표는 ‘폐 끼치지 않기’였어요. 여러 팀이 함께 하는 대형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저희가 잘못하면 모든 일정이 어그러지니까요. 부담감이 엄청났습니다.” 

출처: 네이버TV KBS영상 캡처
(왼쪽부터) 폐회식 내일을 달리는 꿈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은 큰 주제 속에 3~4개 소주제 공연으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 폐회식에서 ‘새로운 시간의 축’이라는 대주제 속에 ‘시간의 축’,’ 인류의 전진’, ‘Next wave의 시작’이라는 소주제가 있었다. 동시에 여러 공연은 6~7개월에 걸쳐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목진요 감독께서 기획과 연출을 하면 저희가 여러 디자인 시안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한다음 가장 괜찮은 걸 고르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일산 킨텍스에서는 전체 참가자들이 매일 연습했습니다. 문제는 강추위였어요. 노력에 비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컸죠. 개·폐막식 때는 하늘이 도와 날이 따뜻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닷밀은 폐막식 3일 전까지 정신없이 일했다. 개·폐막식 현장을 찾은 직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실 막을 올리기 전까지 평창올림픽에 대한 사람들이 기대치는 낮았다. 개·폐회식 예산은 600억원. 베이징올림픽의 6분의 1수준이어서 ‘제대로 할 수 있냐’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평창올림픽은 전세계에서 칭찬을 받았다. ‘미디어 아트’ 공이 크다. 

출처: 네이버TV KBS 영상 캡처
새로운 시간의 축-'Next wave'의 시작.

정 대표의 다음 꿈은 ‘MR 콘텐츠 테마파크’다. 상상만 하던 판타지를 바로 눈앞에서 이뤄내는 것이 닷밀의 사명이다. 사람들이 닷밀의 콘텐츠를 보고 ‘재밌다’고 느끼길 바란다. 10년 전만 해도 흐릿했던 꿈이 이제는 명확하다.


“공부는 못했지만 학창 시절부터 꿈을 찾으러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결국 수많은 경험 가운데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의 접점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MR 콘텐츠가 융합이듯, 이제 인생도 세상도 융합의 시대인 거 같아요. 관심 분야와 경험을 ‘짬뽕’하듯 매치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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