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문 연재소설·삽화, 넘기며 보는 재미의 재발견
이상·구본웅, 백석·정현웅 등
문인과 화가들 관계 이색 조명
그림 115점 중 개인 소장품 76점
85일간 관람객 5만7000명 밀물
미술과 문학의 연대
![일제 강점기,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만든 주요 책과 잡지의 표지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15/joongangsunday/20210515002102530ppxi.jpg)
이번 전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40년대를 중심으로 미술과 문학의 연대, 즉 시인 및 소설가와 화가들의 ‘관계’에 집중했다. 이상과 구본웅, 김기림과 이여성, 백석과 정현웅, 이태준과 김용준, 김광균과 최재덕, 구상과 이중섭이 대표적인 ‘커플’이다. 누가 글을 쓰면 누구는 그림을 그려 같이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고, 책을 만들었으며, 잡지를 냈다. 불황에 역병이 겹쳐 경제적으로 힘들고 정치적 갈라치기로 마음까지 힘든 요즘, 서로 힘을 합쳐 뭔가를 이뤄낸 결과물들이 주는 기운이 전시장엔 가득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연구실 근대미술팀장은 “흔히 일제 강점기를 암울하고 힘들었던 시기로만 생각하는데,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믿고 추구하던 이들의 ‘연대감’은 오히려 어두웠던 시절이었던 만큼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라며 “다들 고단하고 고립된 요즘,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 시대를 뚫고 나간 예술인들의 모습에 위안을 받는다는 분들이 많고 n차 관람까지 해주시는 덕분에 성황을 이루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잡지 ‘여성’의 편집자로 매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백석이 정현웅과 함께 쓰고 그린 화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15/joongangsunday/20210515002103660ukxo.jpg)
김 팀장은 “‘(회화) 작품이 없는 방’을 꾸미는 모험이 관람객들에게 통할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며 “MZ세대들이 종이 신문을 일종의 오브제로 보고 넘겨 보는 것을 퍼포먼스처럼 여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용주 전시운영디자인기획관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곳 전시물 대부분이 문서와 책이었기에, 보는 전시가 아닌 ‘읽는’ 전시로 가고자 했다. 최근 이미지 소비를 위한 인스타용 전시가 많은데, 예약 입장한 소수의 인원이 전시물을 들여다보고 천천히 읽는 모습 자체가 전시의 신(scene)을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이상이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8일자에 실은 ‘오감도’의 ‘시 제4호’. 특히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15/joongangsunday/20210515002104703dnif.jpg)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1925)등 희귀한 책들을 유리장 안에 넣어 가치 있는 작품으로 디스플레이한 공간에서는 상허 이태준이 『무서록』에서 언급한 한 대목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영웅이기 때문이다.”
![탁자마다 스탠드를 설치해 유럽의 고풍스러운 도서관처럼 꾸며 놓은 덕수궁관 제2전시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5/15/joongangsunday/20210515002105801tsrr.jpg)
일제 말기 한글 잡지 ‘문장’에서 실무자로 일하던 조풍연이 41년 결혼할 때 받은 축하 화첩이 대표적이다. 정지용이 붓으로 글을 쓰고 길진섭·김규택·김용준·김환기·윤희순·이승만·정현웅 등 쟁쟁한 화가들이 축하 그림을 그린 30㎝ 내외의 화첩이다. 80년대 중반 한 미술 잡지에 일부만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혹시 몰라 물었더니 아직 소장하고 있다고 해서 이번에 대중 앞에 처음 공개된 사례다.
화가 최재덕의 그림도 마찬가지. 시인 김광균과의 인맥으로 최재덕의 유족을 수소문해 ‘한강의 포플라 나무’ 등 4점의 유화를 처음 선보일 수 있었다.
김인혜 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영역이 문인과 그 가족들이 소장한 미술 작품들에까지 미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고 이번 전시의 의미를 부여했다.
■ 추사 후예가 제호 쓰고 단원 후손이 장정화 그린, ‘아름다운 책’들



『현대문학』과 노산 이은상이 번역한 『난중일기』의 제호를 쓴 소전 손재형, ‘중앙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사의 제호와 『한국의 목칠가구』(사진5) 등을 쓴 일중 김충현, 한국미술전집 『국보』의 여초 김응현, 국내 최대 판형(450 x 580㎜)에 가장 무거운(20㎏) 책으로 꼽히는 『백제』(사진6)의 제호를 쓴 하석 박원규 등이 참여한 책 표지와 글씨, 그림이 한가득 펼쳐진다. "대표적인 문예지 ‘문장’의 제호는 이태준이 추사의 글자를 채집해 썼다”(사진1)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추사의 후예들이 제호를 쓰고 단원의 후손들이 장정화를 그린, 온 세상에 유례가 드문 한국 책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시라”는 게 노학자의 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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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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