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방을 기웃거리다 〈색이름〉이라는 책을 샀다. 책에는 지금까지 대강 눙치고 넘어갔던 색깔들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검은색과 회색으로만 인식했던 색깔들에는 저마다 옻칠색, 기와색, 목탄색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따오기색, 도라지꽃색, 분홍난꽃색…. 이런 색을 하나하나 짚을 땐, 우리 옆에 있었지만 내가 잊고 지냈던 존재들을 다시금 깨달았다. 색을 짚으며 이름을 배우고 나아가 존재를 깨닫는 이 과정에서 문득 한 만화가 떠올랐다. 얼마 전 연재가 끝난 웹툰 〈유색의 멜랑꼴리〉(비나리 작가, 다음웹툰)이다.
어머니 때문에 결혼식이 중단된 후 주인공 도완이 파혼의 뜻을 전하는 장면. <유색의 멜랑꼴리>(비나리 작가, 다음웹툰)는 매화 다른 컬러를 테마로 삼아 조금씩 변화하는 도완의 일상을 담았다. / 다음웹툰 캡처
웹툰 〈유색의 멜랑꼴리〉는 에피소드마다 제각기 다른 컬러칩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여져 있다. 작품이 전개되는 동안에는 이 색깔들의 의미가 명쾌하게 설명된 적은 없다. 〈유색의 멜랑꼴리〉의 주인공은 30대 여성 유도완으로, 작품은 도완의 결혼식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결혼식은 어딘가 계획이 틀어진 듯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래도 순조로이 진행되나 싶더니 중간에 불청객이 난입한다. 결혼식장 문을 벌컥 열고 그 유명한 대사 “이 결혼 용납 못 해!”를 목놓아 외치는 이 불청객은 신부 유도완의 엄마 신실화다. 주단 위에 드레스를 입고 선 도완도 신실화의 무례함에 참지 않고 부케를 집어 던진다. 난투극으로 끝난 결혼식 이후 도완은 “가장 피해없이 끝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2화)라며 신랑 김진하와 파혼한다.
십수년을 사귀어온 김진하와 유도완의 관계는 연인이라기보다 동료에 가깝다. 이 관계의 주인공은 기실 둘이 아니라 세명인데, 진하와 도완에 이어 영준이 있다. 사실 진하도, 도완도 영준을 짝사랑한다. 그렇지만 둘 다 영준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는데, 우연한 계기에 진하가 도완에게 ‘가짜 애인’ 행세를 부탁했다가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이후 도완과 진하는 꾸준히 연인을 연기해왔고, 그 연기 때문에 영준을 향한 각자의 연심은 계속 유보돼왔다. 물론 이 세명의 관계에서 연심은 유보됐을지언정 진심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세명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소외되거나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도완은 끊임없이 날을 세우며 달려온 사람이다. 그는 바라지 않았던 딸, 모든 걸 양보했으면 하는 둘째로 오랫동안 정서적으로 학대받아왔다. 그뿐이랴, 회사에서도 그는 너무 성실해서, 잘한다는 이유로 미움과 시샘을 받았다. 그 숱한 폭력의 시간을 조용히 견뎌냈던 도완의 곁에는, 사람이 생겼다. 도완이 특별히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다. 도완을 닮은 선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위로하고 함께 술을 나눈다. 진하도, 영준도, 도완의 삶에 조용히 스며든 신뢰의 관계다. ‘연인’이라거나 ‘친구’, 어느 한쪽의 이름으로 구겨넣기에 이 관계는 너무나 깊고 충만하다.
매화 컬러칩을 얹어낸 웹툰 〈유색의 멜랑꼴리〉는 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도완의 일상을 통해 60개의 색을 쌓았다. 어중간하게 슬프고, 미묘하게 우울한 날들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색깔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날마다 뽑아든 색은 하나일지라도, 그 모든 날의 연속은 나름의 모습으로 다채롭다. 하루를 그저 견뎌낼 뿐인 줄로만 알았던 도완의 하루들을 아름답게 쌓아낸 이 〈유색의 멜랑꼴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