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15] 사이공 블루스

19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을 만날 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절박했다. 24억달러가 들어갈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지원과 주한 미군 감축 계획 중단을 부탁해야 했다.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케네디를 향해서 결례에 가까울 정도로 확답을 ‘구걸’했다.
상황은 뒤집혔다. 1964년 7월 미 국무부 차관보가 한국으로 뛰어오고, 12월 존슨 대통령이 친서를 보냈으며, 1966년 1월에는 험프리 부통령이 방한했다. 월남전 파병을 늘려달라는 ‘읍소’였다. 우선 1964년 8월 의료진 100여 명과 태권도 교관 파견으로 성의를 보였다. 이어 비둘기부대(건설공병단),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를 보냈다. 총 5만명이었다.
파병 이유는 안보와 경제였다. 미국은 군사 원조 삭감 계획을 없던 일로 하고 앞으로 주한 미군을 감축할 때 반드시 한국과 협의한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미군과 똑같은 수준의 작전비, 운영 유지비, 해외 수당도 보장했다. 다른 당근도 있었다. 기술자와 노무자 등 민간인들이 현지 미군 부대를 상대로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했다. 훗날 한진그룹으로 성장한 한진상사의 조중훈 사장이 거기 끼었다.
그들이 번 달러를 집으로 보내려면 은행이 필요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한국은행만 외환을 다뤘다. 그래서 험프리 부통령의 방한 즈음에 한국은행 사이공 지점 설립이 결정되었다. 도쿄, 홍콩, 뉴욕, 서독에 이어 다섯 번째 해외 지점이었고, 런던보다 2년 빨랐다.
사이공 지점은 다들 선망하는 근무지였다. 제법 많은 험지 수당을 달러로 받는 데다 현지 미제 물건들을 국내 암시장으로 돌리면 짭짤한 부수입도 생겼기 때문이다. 1년 뒤 한국외환은행이 설립되어 한국은행의 외환 업무가 새 은행으로 이관되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이공에 더 눌러앉으려고 새 은행으로 집단 이직했다.
1966년 4월 11일 한국은행 사이공 지점이 문을 열었다. 군인이나 은행원이나 목숨을 걸고 달러를 벌던 시절의, 사라진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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