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는 남자들이 모이는 피티 우오모에서 일어난 일
Pitti Uomo 97
1972년 시작된 피티 우오모는 박람회, 패션쇼, 프레젠테이션, 토론회 등을 한데 모아놓은 독창적 이벤트로, 1년에 1월과 6월 두 번 열린다. 매년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해 지난 1월의 97번째 행사에는 1203개 브랜드가 참여했다. 세계에서 3만6000명에 달하는 방문객이 모여들었는데, 이 중 바이어만 2만 명이 넘는다. 이처럼 많은 패션업계 종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는 매우 드물기에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패션 위크와는 결이 다르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다음 시즌 트렌드를 가늠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주최 측인 피티 이마지네는 전문가가 참여하는 다양한 토론의 장을 마련해 동시대 패션업계가 처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 역시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 다채로운 패션쇼와 프레젠테이션을 더해 남성 패션의 글로벌 네트워킹을 구축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만난 라포 치안키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사장은 앞으로 피티 우오모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문화와 라이프스타일까지 아우르는 이벤트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Show Your Flag
제97회 피티 우오모를 상징하는 것은 깃발이다. 포토그래퍼 프란코 파제티가 촬영한 캠페인 사진에서도 한 남성이 결의에 찬 표정과 몸짓으로 피티 우오모 깃발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전진한다. 컬러 블로킹 깃발에서 패션을 향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피티 우오모의 취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오프닝 기념식에서 연단에 선 피티 이마지네 총책임자 아고스티노 폴레토는 “깃발은 그저 침묵의 천 조각이 아니다.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끝없이 영감을 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옷과 마찬가지로 신분, 소속, 사상을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깃발은 행사가 열린 포르테자 다 바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참가자들에게 ‘Show Your Flag’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졌다.
2 매거진 <더스트>가 기획한 패션쇼 ‘아더와이즈 포멀(Otherwise Formal)’ 런웨이에 선 모델.
New Ideas for Men’s Fashion
피티 우오모 97이 다룬 많은 주제 중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찰이었다. 실제로 많은 브랜드에서 테일러링과 스트리트 무드를 적절히 섞어 현대 남성을 위한 스타일을 다양하게 제안했다. 이 주제는 런던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하는 매거진 <더스트>가 주최한 패션쇼 ‘아더와이즈 포멀(Otherwise Formal)’을 통해 보다 폭넓게 해석됐다. 이들은 현대 남성복 시장이 가진 트렌드의 불확실성 속에서 품질이 뒷받침된 전통과 혁신만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결과 펑크와 우아함을 결합해 클래식하지만 조금 더 자유롭고 개인적 방식으로 착용된 룩을 런웨이에 펼쳐 보였다.
현대사회의 뜨거운 이슈인 지속 가능성 또한 주요 논제였다. 이번 행사에서 피티 우오모는 ‘Land Flag: From Waste to New Materials’라는 이름으로 친환경 프로젝트의 새로운 생각과 지속 가능한 유통 플랫폼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600m2 규모의 공간에서 6명이 일주일간 소비한 플라스틱 폐기물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렸고, 디자인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앙겔라 루이가 기획한 토론회가 진행됐다. 이러한 일련의 이벤트를 통해 피티 우오모는 사람들이 지구와 유대감을 느끼고 지속 가능한 패션이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길 바랐다.
피티 우오모 97에서 마주한 스페셜 프로젝트
피티 우오모 97 행사에는 절제된 테일러링, 시대상이 반영된 젠더리스, 스트리트 무드를 아우르기 위한 각양각색의 디자이너가 초청됐다. 이들에게서 완벽한 관련성을 찾기란 어려워 보이지만, 공통분모가 있었다. 바로 ‘스토리텔링’과 ‘유니섹스’다.
Random Identity
스페셜 게스트 디자이너로 초대된 스테파노 필라티는 그의 독립 레이블 ‘랜덤 아이덴티티’의 새 컬렉션을 공개했다. 그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와 결별하고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과거 아르마니, 생 로랑 시절부터 벗어날 수 없던 젠더와 시즌에 대한 패션계의 굴레를 완전히 탈피했다. 쇼는 극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펼쳐졌다. 19세기부터 기차역으로 사용되던 스타치오네 레오폴다는 짙은 안개로 자욱했고, 붉은 조명 뒤로 첼리스트의 연주가 흘렀다. 필라티 특유의 절제된 테일러링이 볼드한 액세서리와 어우러지며 중간중간 스트리트 무드가 그만의 방식으로 표출됐다. 작가이자 대중 연설가인 파티마 야말(Fatima Jamal), 뮤지션 리라 프라묵(Lyra Pramuk), 댄서 겸 안무가인 MJ 하퍼(MJ Harper) 등 밀레니얼 세대가 런웨이에 섰고, 피날레는 역시 스테파노 필라티가 장식했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버켄스탁, 중국의 스포츠웨어 브랜드 리닝과 협업한 제품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Telfar
피렌체의 역사적 장소인 코르시니 궁에 밴드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지금 뉴욕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니섹스 브랜드 텔파를 이끄는 텔파 클레멘스가 그의 디자인 철학 ‘Simplex(simple+complex)’를 주제로 한 2020년 F/W 시즌 런웨이 쇼를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편집숍 슬램잼과 협업한 이번 컬렉션은 패션과 예술 그리고 공연을 합친 복합적 형태로 선보였는데, 이는 피티 우오모가 기존의 정형화된 남성복 박람회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트렌드를 빠르게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결과물이었다. 런웨이에서는 바로크 풍의 옷들이 남루한 느낌의 소재와 형태로 표현됐고, 해적 스타일과 타이트한 팬츠는 센슈얼한 무드를 풍겼다.
Jil Sander
질 샌더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루시와 루크 마이어는 고풍스러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한쪽에 거대한 금잔화 더미를 쌓고 새로운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초대장에서 풍기던 꽃 향기가 쇼장을 가득 채운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이 바로 피렌체의 패션 스쿨 ‘폴리모다’인 만큼 이 쇼는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2020년 F/W 컬렉션을 위해 듀오 디자이너는 질 샌더라는 브랜드의 근간인 미니멀리즘 코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과거의 아카이브에서 수공예 디테일을 가져왔다. 풍성한 니트와 더욱 길어진 테일러드 팬츠, 부드럽게 어깨에서 떨어지는 코트 등이 미드나이트 블루, 베이지, 흑백 톤 등 컬러 팔레트로 물들었다. 반듯한 테일러링, 하이킹 부츠의 남성성은 섬세한 자수, 실크 스카프의 프린지, 커다란 토트백에서 오는 여성성과 뜻밖의 조화를 이루며 남녀 듀오의 장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볼거리가 풍성한 프레젠테이션 현장
피티 우오모의 메인은 브랜드가 마련한 프레젠테이션이다. 다가올 시즌의 새 상품을 공개하고, 나아가려는 방향을 알리는 기회이기에 빅 브랜드들은 행사 장소부터 인테리어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다. 많은 프레젠테이션 가운데 도드라진 브랜드 둘을 꼽았다.
Brioni’s 75th Anniversary!
브랜드 창립 75주년을 맞아 브리오니가 피티 우오모 오프닝에 맞춰 게리니 궁전에서 화려했던 과거의 라이프스타일을 오마주했다. 이벤트는 패션 전시계의 스타 큐레이터 올리비에 사이야르(Olivier Saillard)의 지휘 아래 완벽하게 준비됐다. 오직 촛불만이 유일한 광원인 어두운 복도를 지나 마주한 각 방에서는 클래식 연주가들이 브리오니의 2020년 F/W 시즌 옷을 입고 연주를 이어갔다. 부자지간인 첼리스트 잉게마르와 안드레아스 브란텔리드(게리니 궁보다 비싼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했다!)부터 스타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로스 카펠리스, 바로크 앙상블까지 각 연주가에게 스폿 조명이 떨어지면서 눈으로는 그들의 움직임과 브리오니의 의상이, 귀로는 아름다운 음악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행사 전에 나눠준 종이 한 장에 담긴 프로그램 설명서는 이탈리아 하이엔드 슈트메이커가 준비한 이 행사를 묘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Sustainable Fashion by Herno
푸른 식물을 행사장 정면 중앙 벽에 가득 채운 에르노의 프레젠테이션 현장은 그들이 이번 행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줬다. 그건 바로 환경을 생각하고, 나아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자신들이 이끄는 모든 친환경 프로젝트를 의미하는 에르노 글로브(Herno Globe)의 새 프로젝트가 대표적으로, 2020년 F/W 시즌에는 폐기 후 5년 이내에 완전 분해되는 원단을 사용한 보머 재킷과 재생 나일론인 에코닐을 활용한 아이템을 추가했다. 파카, 코트, 블레이저 등에 사용된 충전재 역시 재활용한 깃털이며, 버려진 코트에서 추출한 재생 울을 활용한 멜란지 효과는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제품과 환경을 위한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에르노의 진면목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에디터 노현진(marcroh@noblesse.com)
사진 제공 피티 이마지네 우오모(Pitti Immagine Uo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