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켄터키 할아버지보다 푸근한 남자, 용인 삼성생명 임근배 감독

점프볼 2021. 1. 1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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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 용인 삼성생명 임근배 감독은 사람 좋은 인상, 푸근한 리더십, 더불어 여자농구 전체를 위하는 마인드를 가진 남자로 설명이 가능하다. 20년 넘게 지내온 남자농구판을 떠나 토양 자체가 다른 여자농구에서 인정받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임근배 감독은 확실한 목표의식 아래 자신이 바란 농구를 삼성생명에서 실현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강요되지 않는 농구, 자신이 원해서 발전하는 농구가 바로 핵심이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작은 변화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는 의지로 삼성생명을 지휘하고 있다.


※ 본 인터뷰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된 글이며, 인터뷰는 12월 8일에 진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두 스승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된 농구 인생에서 임근배 감독은 두 남자의 이름을 추억했다. 바로 故한준택 선생, 그리고 장덕영 선생이다. 학창시절 두 스승의 가르침은 임근배 감독의 농구 철학을 만드는 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그렇게 성장했고 농구 명문팀을 고루 거쳐 성숙해졌다.

민준구 감독님의 선수 시절은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떻게 농구를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처음 농구를 시작하게 된 건 대단히 우연스러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농구부 테스트가 있다고 해서 밥을 먹고 운동장을 갔는데 벌써 끝나 있더라. 그때는 지금처럼 체육관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농구 골대가 운동장에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이다. 그렇게 농구와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 교실 문이 열리더니 어떤 사람이 나를 지목해서 나오라고 하더라. 그때 나는 키도 작았고 몸도 빼빼 말랐다. 체중이 한 40kg정도 됐나? 나보다 더 크고 건장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내 이름을 부르더라. 그때부터 농구를 시작하게 됐다.

민준구 첫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크리스천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서 어느 정도 연관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느님이 인도해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농구할 운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농구부에 들어가고 나서 1년 동안 배웠고 5학년 때 처음 대회에 나갔다. 그때는 5학년과 6학년이 따로 나눠서 대회를 치렀는데 전자랜드 유도훈 감독이 뛰던 대방초등학교를 결승에서 꺾고 우승을 했다. 엄청 잘하는 학교였는데 우리가 이기니 다들 놀랐다. 그 이후부터는 계속 지긴 했지만.

강현지 학생선수 시절 기억에 남는 스승이 있었나.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준택 선생님과 그분의 제자이자 고등학교 때부터 나를 지도해주신 장덕영 선생님을 만난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대한민국 농구에서 최고 선생님들을 만났다고 자부한다. 한준택 선생님께서는 신체조건도 뛰어나지 않았던 내게 항상 잘될 거라고 응원해주셨다. 굉장히 무서운 분이었는데 매번 “근배야 넌 정말 잘 될 거야”라고 해주셨던 게 기억난다. 운동도 중요하지만 그 외적인 부분도 잘 챙기라고 해주신 분이기도 하다. 기본 수업부터 특별활동까지 다 한 다음에 농구를 했다. 3점슛도 제대로 던지지 못한 내게 따뜻하게 다가와 성장시켜주신 분이다. 장덕영 선생님은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대도 때리지 않으셨다. 장난삼아 욕을 하신 적은 있지만 진지하게 욕설을 내뱉으신 분은 아니었다. 지금도 경기가 끝나면 매번 문자를 보내주신다. 그런 분들의 지도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민준구 경희대 시절은 어땠나. 최부영 감독은 굉장히 엄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조금 맞은 기억 말고는 없다. 다른 애들은 4년 내내 많이 혼났을 거다(웃음).그래도 참 잘해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최부영 선생님께는 내가 죄송하다. 4년 동안 일곱 번 합숙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 때마다 부상을 당해서 한 번 밖에 참여를 못했다. 사실 경희대 합숙훈련이 정말 힘들다. 근데 발목부터 아킬레스 건까지 안 다친 곳이 없었다.

김용호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었나.
연습경기를 하다가 만약 지게 되면 학교까지 뛰어와야 했다. 한 번은 삼성이랑 경기를 하다가 졌는데 진짜로 뛰어오라 하더라. 중간에 택시를 잡아서 탔다. 학교까지 2km 정도 남긴 상황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이 나쁘게도 걸려버렸다. 아마 그날 반 죽었을 거다. (이)창수는 휘문고 전 끝나고 학교까지 뛰어가야 하는데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길로 바로 집에 갔다고 하더라. 하하. 최부영 선생님이 다시 데려오시기는 했는데 유니폼도 입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갔는지 참 신기하다.

김용호 경희대 졸업 이후 명문 현대전자에 입단했다.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했던 시절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때는 자유계약 시절이었다. 경희대 4학년 때 동아제약에서 농구단을 창단한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려고 했다. 중앙대를 중심으로 몇몇 대학 선수들이 모여 팀을 만들게 됐는데 8, 9월 정도에 갑자기 무산됐다고 하더라. 사실 3학년 때 이미 삼성에 가는 걸로 말이 되어 있었는데 한 번 거절한 상황이었다. 막막했던 그때 (강)동희가 기아로 가고 나는 현대로 스카우트되어 가게 됐다. 다행히 (이)원우 형님이 경희대 선배다보니 정말 잘 챙겨주셨다. 사실 경희대에서 현대로 가게 되는 케이스가 굉장히 적었다. 기대도 많이 해줬는데 생각보다 잘하지 못해 죄송했다.

민준구 프로 출범 이후 두 시즌 만에 은퇴를 하게 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 출범 직전에 열린 농구대잔치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아마 상무와 경기였는데 파울 작전 과정에서 무릎이 꺾여 버렸다. 볼을 잡고 내려오는 과정이었는데 무릎이 시옷 모양으로 꺾인 것이다. 뼈가 튀어나온 느낌이 들어 만져 보니 피는 없더라. 근데 너무 아파 일어날 수가 없었다. 현대 선수들은 보통 아산병원으로 가게 되어 있어서 정밀 검진을 받아보니 인대가 조금 늘어난 정도라고 진단을 받았다. 그 정도 부상이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근데 통증 정도가 인대만 늘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 다시 검진을 받아 보니 십자인대가 다 끊어졌다고 하더라. 그렇게 수술받고 재활하는 시기에 프로가 출범하게 됐다. 처음에 팀에서는 스태프로 합류하라고 했다. 하지만 선수로서 제대로 된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고 그렇게 두 시즌 정도 맛만 보다가 은퇴하게 됐다.

인생의 동반자 유재학 감독을 만난 코치 시절
임근배 감독은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후 곧바로 코치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지도자 코스를 밟지 않았기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됐고 그렇게 지도자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다. 남들은 한 번도 이루기 힘든 KBL 정상이란 타이틀을 수차례 품기도 했다.

강현지 1999년 인천 신세기 빅스의 코치로서 유재학 감독과 첫 만남을 갖게 됐다. 지도자로서 첫 발은 어떻게 디디게 됐나.
원래는 (유)재학이 형으로 불렀다가 갑자기 코치가 되어 옆을 지키게 됐다. 처음에는 여자 팀에서 제의가 오기도 했고 은퇴 후 현대산업개발로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가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유 감독님이 같이 해보자고 해서 행복한 고민을 했다. 사실 막막하기도 했다. 코치가 뭘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도 유 감독님을 위해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10년 넘게 같이 있게 됐다. 서로 성격은 다른데 코드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유 감독님도 정말 많은 부분을 이해해주셨다. 사실 아무리 마음이 맞다고 해도 10년 넘게 한솥밥을 먹기는 쉽지 않다. 대단한 인연이었다.

김용호 유재학 감독과 10년이 넘게 호흡을 맞췄다.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서로 성향이 비슷했던 것 같다. 뭔가 불합리한 부분이 있으면 어떤 액션이든 취해야 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부분이 잘 맞았다. 또 종교적인 부분도 맞았고(웃음). 전체적으로 보면 유 감독님이 배려를 정말 많이 해주셨다.

강현지 국내 최고의 감독과 함께한 그 시간, 가장 크게 얻은 부분은 무엇인가.
감독이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선수 운영부터 여러 가지를 곁에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민준구 오랜 시간 코치를 했다. 감독이 되고자 하는 야망도 분명 컸을텐데. 만약 그랬다면 어떤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는가.
감독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사실 중간에 제의도 받았다. 전자랜드에서 모비스로 옮기는 시점에서 전자랜드 측이 팀을 맡아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근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 감독님과 함께 KBL 정상을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그때는 유 감독님이 가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가려고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감독이 됐을 때 어떤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매일 고민했다. 많은 분들을 옆에서 지켜봤던 만큼 그들의 장점만 모아놓은 감독이 되고 싶었다. 한준택, 장덕영 선생님이 바탕이 되었다면 그 안을 채우는 건 유 감독님의 부분이었다.

민준구 평생 함께할 것만 같았던 시절에도 끝은 있었다. 가족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일이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인 일이기도 하다. 전지훈련 일정이 바뀌면서 잠깐 가족들이 있는 캐나다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근데 아내의 몸이 너무 안 좋더라. 여러 검사를 받았고 수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코치 생활만 10년 넘게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농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결국 코치직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2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가족과 함께하면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1년에 30일 정도밖에 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크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는데 그걸 지켜볼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내 역시 일찍 만나 결혼했음에도 같이 지낸 시간은 굉장히 적었다. 그래서인지 2년 반이라는 시간이 내게는 굉장히 소중했고 특별했다. 또 농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강현지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면서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는데, 외롭진 않은가. 가족들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은데.
딸을 본지가 2년 정도 됐다. 아내는 1년, 아들도 1년 6개월 정도 된 것 같다. 선수들과 함께 시즌을 치르고 또 비시즌 훈련을 하게 되면 시간은 알아서 흘러가더라. 외롭기는 하다. 선수들이 주말에 외박을 나가게 되면 가족들 생각이 많이 난다. 매일 화상 통화를 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 컴백, 여자농구로 돌아온 임근배 감독
2년 반 동안 캐나다에서 지냈던 임근배 감독은 201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코치가 아닌 감독으로 말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10년 넘게 남자농구에 있었던 그가 여자농구 감독으로 돌아오게 됐다. 바로 삼성생명의 수장을 맡았다.

민준구 삼성생명의 제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인가.
사실 여자농구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삼성생명 쪽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감독으로 올 수 있느냐고 말이다. 잠깐 고민을 했다. 남자농구에 비해 여자농구는 전혀 몰랐으니까. 유명한 몇몇 선수들 정도만 알지 전체적인 걸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농구를 한다는 생각에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됐다. 사실 남자농구판에 있으면서 여자농구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듣기도 했다. 대부분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많았지만(웃음). 그런 부분들을 한 번 바꿔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돌아오게 됐다.

김용호 보통 남자농구와 여자농구의 차이는 크다고 한다. 가장 컸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처음에는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애들이 움직이는데 ‘뭐지?’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근데 또 지금 와서 남자농구를 보면 너무 빠르더라. 하하. 처음 삼성생명에 갔을 때는 농구를 떠나 남자와 여자선수들의 성향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남자 팀에 있을 때는 문제가 있어도 술 한 잔 먹으면 끝나는데 여자 팀에서는 그게 안 된다. 이성과 감성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성별을 떠나서 농구선수라면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지금도 선수들에게 이야기하는 건 여자선수가 아닌 그냥 농구선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통념상 여자는 약자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약해지는 것 같다. 여자선수가 아닌 그냥 농구선수라는 인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준구 감독 부임 이후 삼성생명을 리빌딩하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분명한 목표의식이 없었다면 실행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싶은데.
주전급 선수들 중 이미선 코치만 남아 있고 모두 은퇴했던 시기였다. (배)혜윤이나 (고)아라, (김)한별이도 없었던 상황에서 내가 가게 된 것이다. 그 때 한별이한테 연락이 와서 다시 농구를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남자농구에 있었을 때도 한별이의 농구는 알았기 때문에 신뢰하고싶었다. 몸은 좋지 않았지만 의지가 있었다. 근데 가장 큰 문제는 가드였다. 이 코치를 제외하면 경기에 출전시킬 선수가 없었다. (박)소영이,그리고 (강)계리는 아예 기록 자체가 없는 선수들이었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실행했던 게 바로 리빌딩이었다. 이 코치가 5~10년 정도 더 뛸수 있다면 모를까 이 상태로는 대단한 변화가 필요했다. 이 코치한테도내 마음을 전했다. 출전 기회 자체를 반으로 줄여야 했고 또 이 부분에대해서 이 코치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욕도 많이 먹었다. 계리와 소영이에게 10분에서 15분 정도의 시간을 무조건 부여했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혜윤이나 아라, 그리고 (박)하나도 있긴 했는데 지금처럼 안정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는 단계였다.

김용호 우여곡절 끝에 챔피언결정전에 두 번 진출해서 모두 준우승이었다. 이를 통한 지도자로서 배움이 있었다면.
정말 많이 배웠다. 이기면서도 배웠고 지면서도 배웠다. 솔직히 구단에 정말 많이 미안하다.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우승일 텐데 그 부분을 이루지못했다는 것에 미안함이 크다. 그럼에도 계속 기회를 주고 있어 감사하다.

강현지 가장 아쉬웠던 챔피언결정전은 언제였나.
2016-2017시즌, 내가 처음으로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라갔을 때가 기억난다. 우리은행이 무조건 우승한다고 했지만 우리도 경기를 잘했다. 1승도 하지 못한 채 내려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3차전 마지막 순간에 하나의 파울이 아쉬웠다. 다 지난 일이니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만약 그때 파울을 부르지 않았다면 분위기는 달랐을 수도 있다. 뭐 이미 과거일 뿐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강현지 통산 100승까지 18승이 남았는데, 올 시즌 남은 정규리그 경기는 19경기다. 물론 기록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여자농구로 넘어온 이후 감독으로서 쌓아온 커리어에서 100승이 다가오는 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다.
짧은 기간에 이뤘다면 모르겠으나 긴 시간 동안 축적된 승리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그저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기록이 아닌가. 남들보다 조금 더 길게 감독직을 맡고 있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싶다.
여자농구의 변화를 바라는 혁명가
임근배 감독은 기존 여자농구의 문화를 바꾸고자 하는 혁명가다. 여자농구판에 물든 강압적인 지도방식과 훈련이 곧 성공이라는 공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쉽지는 않다. 그걸 현실로 이어지게 하려면 정상 등극이라는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임근배 감독은 자신의 의지를 놓지 않고 있다.

강현지 삼성생명은 다른 팀에 비해 굉장히 젊고 세련된 팀이다. 그들 중에서도 리더는 있을 텐데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혜윤이, 하나, 한별이 모두 베테랑으로서 팀의 중심을 지켜주는 선수들이다. 혜윤이가 실질적인 리더로서 활약해주고 있지만 어느 한 명 소중하지 않은 선수가 없다. 나는 운동선수가 운동을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선수가 한 팀에 한 명씩 있는 건 아니다. 남자 팀에서도 1~2명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양)동근이 정도가 가장 뛰어났다. 아직 여자 팀에는 그런 리더가 없다. 단합은 잘 될 수 있지만 후배를 품고 끌어주는 선수는 어떤 팀에서도 못 봤다. 혜윤이가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많이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기적인 부분보다 선수들의 정신적인 부분을 챙길 수 있는 건 바로 선수들의 리더다. 혜윤이가 그 역할을 잘해줄 거라고 믿는다.

민준구 리더로서 그릇은 따로 있는 것일까.
분명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 팀이 명문이 되려면 그 뼈대가 될 수 있는선수들이 있어야 한다. 명문으로 불리기 위해선 우승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승만 해서는 명문이 될 순 없다. 사람이 살아있는 팀이 바로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생명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명문이 되려면 선수들끼리 희생하고 나눌 줄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김용호 농구 인생에서 진정한 리더를 꼽자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조동현과 양동근이 가장 이상적인 선수들이었다. 동현이는 지금껏 많은선수들을 봤지만 그만큼 노력한 선수가 없을 정도다. 무릎 연골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프로 생활을 길게 가져갔다. 본인도 알고 있었다. 자기 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짧고 굵은 프로 생활을 바랐다. 하지만 선수들 중 유일하게 “너는 쉬어야 된다”라고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한 번은 일본 나고야 병원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다. 보통 그 병원에서 재활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흉내만 냈다. 근데 동현이는 더 일찍 나가서 더 늦게 끝냈다. 일본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동현이는 참 대단했다. 동근이는 지금은 전설이 됐지만 사실 처음부터 대단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그 주변을 만들고 최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로서 자리를 떠났다.

민준구 큰 변화를 가져가는 과정에 스트레스도 많을 것 같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편인데 어떻게 스트레스 해소하는지 궁금하다.
2008년에 술을 아예 끊은 적이 있다. 특별한 사연도 있다(웃음). 유 감독님과 모비스로 팀을 옮긴 후 두 번째 시즌에 앞서 故크리스 윌리엄스를 영입했던 시절이었다. 한 번 우승을 해보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더라. 그때 교회에 가면서 꼭 우승하고 싶다고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우승을 하려면 하느님께 뭘 해야 하는지 떠오르더라. 바로 술을 끊는 것이었다. 술을 엄청 먹던 시절이었는데 유 감독님께 갑자기 그만 먹겠다고 하니 놀라셨다. 하하. 그런 뒤 정규리그 1위에 올랐고 다음 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도 해봤다. 근데 또 성적이 안 좋자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기 시작했다. 하느님께는 함부로 맹세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다시 한 번 끊겠다고 맹세한 게 브라이언 던스톤을 지명했던 2008년이었다. 유 감독님께 다시 말씀을 드렸고 지금까지 술은 마시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라. 스트레스는 대체 어떻게 해소하냐고 말이다. 사실 나는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성경책을 보고 또 농구 영상을 통해 분석을 하고 영화까지 보다 보면 시간이 훅훅 지나간다. 경기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음악을 들으며 다시 풀기도 한다. 큰 문제가 없다.

강현지 199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12년 정도 지도자 인생을 살아왔다. 현재의 자신은 지도자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선수들이 좋아하는 감독이 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의 이야기는 인생을 사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라는 말을 듣고 싶기는 하다. 처음 삼성생명에 왔을 때의 그 마음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내 스타일 자체가 누군가를 구속하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누가 옆에서 거들게 되면 오히려 안 좋아진다. 하지만 내 방향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고민은 많다. 처음 여자농구에 왔을 때 모든 사람들이 속된말로 여자농구는 선수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 근데 그렇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나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 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여자농구는 계속 같은 자리만 빙빙돌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솔직히 몇 년 전에 잠시 내 생각을 의심한 적도 있지만 다시 바로 잡았다.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 많은 부분이 부족하지만 달라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을 많이 이해주려고 한다. 비록 우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인 마인드는 달라졌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필요로 해서 하는 분위기가 됐다. 작은 변화가 모여 큰 변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사진_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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