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세무공무원이 있었을까? [영화 속 세금이야기]

미국 (로컬) 영화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이 벌써 3주 전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관왕을 한데 이어 올해 윤여정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꿰차는 쾌거를 이뤘죠. 그들만의 리그에서 순수 토종 한국인이 수상했기 때문에 영화팬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마치 올림픽 금메달을 딴 듯한 기쁨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관심이 쏠려 있는 사이 우리나라에서도 57년 역사에 빛나는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올해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은 ‘자산어보’를 만든 이준익 감독에게 돌아갔죠.

출처: ⓒ 네이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이 어류도감인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함께 유배된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는 동안 정약전은 토종 수산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죠.

영화의 배경은 정조 시기, 즉 조선 후기입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어땠냐하면, 양반층이 몰락하면서 분화가 일어났고, 농업·상공업의 발전으로 부농층이 등장하면서 상민의 경우에는 신분이 상승하는 등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군소 양반 계층이 몰락하면서 고을의 하위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수령과 향리 등의 수탈이 증가하게 됐고요.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유배생활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특히! 국세청 블로그 지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아전’이 백성들에게 부리는 행패와 수탈이었죠. 아전이란 무엇인가. 바로 조선시대 세무공무원 아니겠어요?아니, 우리 선배님들, 그때 무슨 짓들을 하신 건가요. 흑흑.


아전은 누구인가

아전은 중앙이나 지방 관청에 있으면서 파견 나온 수령님(=사또)을 보좌하면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를 말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지방직 공무원 정도 될까요? 아전은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고려시대에도 있었는데, ‘지방 호족’들이 향리를 거쳐 조선시대의 아전이 된 것이죠.

지방에서만 평생을 살면서 매번 바뀌는 수령을 보필하자면, 얼마나 그 지역의 ‘통’이었겠어요. 게다가 대대로 세습까지 했다고 하니 텃세가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이들은 신분이 낮아 과거시험(문과)을 볼 수 없었고, 아전으로 관아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녹봉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부정부패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아전’에서 나오는데, 고을의 모든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도 녹봉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아무리 생계형 부정부패라도 나쁜 건 나쁜 거죠! (말단 공무원이라고 월급을 안 주다니, 그게 제일 나쁘다!)


군포·공납 비리가 성행하던 조선 후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전들은 백성들이 납부하는 군포(군역이나 요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납부하는 베), 공납(지역특산물이나 수확물 등으로 내는 세금) 등을 가로채거나, 무리하게 부과하거나, 뇌물을 받는 등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갔습니다.

군포의 경우 제도 설명으로만 보면 타당하나, 조선 후기에는 ‘족징·인징·동징’이라 하여 군포를 못 내고 도망칠 경우 그 가족이나 이웃, 같은 마을 사람이 대납해야 했고요, ‘백골징포’라 하여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요, ‘황구첨정’이라 하여 아직 역을 담당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태아에게까지 물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네요.

영화 ‘자산어보’에서 당시 힘들었던 사회상을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먹고살기 너무나 어려운 시기에 갓난아이나 돌아가신 아버님, 곧 태어날 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매기고 수탈하는 것이죠. 영화 후반부에 과도한 세금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백성이 관아로 뛰어 들어와 자신의 양물을 잘라 ‘내 물건이 죄를 지었소!!’라며 울부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짓말 같은 이 장면은 역사 속 사실이었어요. 정약용은 이 사건에 매우 슬퍼하며 ‘애절양(哀絶陽)’이라는 한시를 지었습니다. 시의 한 구절을 소개해 드릴게요.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

부자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너무 슬프죠.


조선시대에는 체계적인 조세제도가 없었을까?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마땅한 조세제도도 없이 백성들을 수탈만 하면서 조선왕조 500년을 꾸려왔을까요? 사실 조선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든 조세제도인 ‘공법’​​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백성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정책이 바로 조세제도를 바로잡는 개혁이라고 확신했고, 그 방책이 바로 ‘공법’이라고 판단해 근대적인 조세원칙을 구축하고 실현했습니다.

연분9등법과 전분6등법 등을 정비해 징수 절차를 간소화하고 관리들이 중간에서 세금을 수탈할 수 없도록 과세를 명확히 했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어요. 세종대왕이 공법을 만드는 과정이 아주 ‘버라이어티’합니다.

세종대왕은 ‘조세제도는 세금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이 평안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군주통치제도 하에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여론조사를 조선시대에도 했다?

바로 백성들에게 ‘조세제도’의 찬반을 물은 것이죠. 공법의 뼈대를 세워두고, 그 내용을 정부·육조,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각 품관, 각 도의 감사·수령, 여염의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가부를 물어 결과를 보고하게 했습니다. 세금부담의 주체인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기 위함이었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이미 500년도 더 전에 세종대왕에 의해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종대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과거시험문제로 ‘공법의 좋지 못한 점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 것인가’ 등을 출제하며 인재들의 의견을 들으려 했고, 무려 17년에 걸친 논의 후에 비로소 최종 공법을 입법했습니다.

이렇게 고심 끝에 공법을 시행한 후에도 공평과세를 위해 조세부정에 대한 처벌을 친분과 신분에 관계없이 공정하게 처리했습니다. 한 번은 재위 10년 사헌부에서 효령대군(세종대왕의 둘째 형)의 집사 신유정과 장예생 및 노비 등이 조세를 불법적으로 거둔 죄를 상소하자 “유정의 직첩을 회수하고, 예생은 장 60대를 치고, 그 종은 태40대를 치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실로 ‘백성의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조선을 이끌어간 성군 중의 성군 세종대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세청은 아전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바로 그 초심, 세종대왕이 조세제도를 개혁하면서 품었던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국민이 편안한, 보다 나은 국세행정을 위해 소통하고 고민하고 매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