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도암 3기 극복한 왕년의 프로레슬링 스타 이왕표

한국 프로레슬링 슈퍼드래곤 이왕표
아시아 넘어 세계 챔피언까지
담도암으로 은퇴‥후배양성에 힘 쓰고파

키 190cm, 몸무게 120kg. 삼각 팬티 한 장만 입은 거구의 사내가 링 위로 날아오른다. 공중에서 두 다리를 모아 상대의 가슴을 차 쓰러뜨린다. 그 위로 올라가 상대방의 두 어깨를 누른다. '1! 2 !3!' 링 바닥을 때리면서 숫자를 세는 심판. 승자를 알리는 심판의 손엔 거구의 손이 들려있다.


팬들이 기억하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중심이었던 이왕표(63)의 모습이다. 1975년 김일 도장 1기생으로 프로레슬링을 시작해 40년 동안 1600번의 경기를 치렀다. 7번 아시아 및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출처: jobsN
챔피언 벨트를 찬 젊은 시절 이왕표 입간판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왕표 총재

김일에 반한 초등학생 김일 도장 1기생으로


1960년대 링 위에서 박치기로 악당을 쓰러뜨리는 김일을 보고 반한 초등학생 이왕표. 그때부터 프로레슬러를 꿈꿨다.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셌다. 꼭 프로레슬러가 되리라 다짐했다. 태권도, 유도 등 격투기 종목 위주로 몸을 단련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 대신 체육관을 선택했다. 1975년 김일 도장 1기생 모집을 보자마자 지원했다. 100여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체력검사를 통해 문하생을 뽑았다. "앉았다 일어났다 200개, 팔굽혀펴기 50개, 스파링 등 시키는 대로 다했어요. 스파링은 레슬링 선배들과 했죠. 덩치도 크고 나름 운동을 했었지만 링위에서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기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레슬링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100명이 넘는 지원자 중 4명이 김일 도장 1기생으로 뽑혔다. 이왕표도 그중 한명이었다. 합격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때부터 지옥이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훈련의 연속이었다. 스쿼트 1000개, 낙법 200회, 팔굽혀펴기 2000개 등의 준비운동 1시간 30분, 스파링 2시간하면 오전이 다 갔다. 오후에는 개인운동 시간이었다.


2년 동안 훈련을 받고 데뷔 전을 치렀다. "링위에 올라갔는데 긴장해서 몸이 안 움직이더군요. 5분 지나니까 심판은 상대 선수의 손을 들고 있고 저는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데뷔 전에서 진 것이다. 그때부터 20번의 경기를 했지만 전패였다. 이왕표 선수가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프로레슬링은 승패가 정해져있다. 순수 스포츠가 아니라 쇼적 요소가 강한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술을 선보이는 선수들의 체력은 물론 연기력도 중요하다. 당시 신인이고 인지도가 없던 그가 패자의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레슬링 스타 이왕표


서서히 운동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시내에 나가 건달들과 어울리고 통행금지가 풀리면 들어왔다. 김일 관장도 이 사실을 알았다. 어느날 명동에서 놀다가 김 관장에게 붙잡혀 체육관으로 끌려왔다.


"정말 원없이 맞았습니다. '네가 운동하러 왔지 깡패하려고 왔어’라고 하시면서 혼을 냈습니다. 그때 망치로 한대 맞은 것 같았어요. '레슬링 하고 싶어서 왔으니 다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잡혀와서 맞은 게 다행입니다. 탈선한 저를 내치지 않고 다시 받아주셨으니까요."


이후 김일 관장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 가서 경기를 치렀다. 중견급 선수와의 경기였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상대선수는 링위에 쓰러져 있고 심판은 이왕표의 손을 들어올렸다. 생에 첫 승이었다. 그날 처음 김일 관장의 칭찬을 듣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1982년 한국에 들어왔다.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한일전에 출전해 승리를 거뒀다. KBS에서 그날 경기를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다음 날 시합이 있어 인천에 갔다.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했는데 버스에서 내린 그를 반기는 것은 수 백명의 어린 팬들이었다. 바로 전날의 경기에서 레슬링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김일 선생님도 그렇고 대부분 그라운드 스타일로 경기를 했어요. 저는 돌려차기부터 시작해 로프 위에서 뛰거나 하는 공중 동작이 많았죠. 아마 새로운 스타일의 경기를 보여서 더 관심을 가져주신 것 같습니다."


세계 챔피언 등극


한국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아시아에서도 선전했다. 1985년 NWA(national wrestling association) 오리엔탈 태그팀 챔피언 등극. 1987년에는 NWA 오리엔탈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도 욕심이 생겼다. 드래곤 스페셜 킥, 파워킥 등 주특기를 강화했다.

출처: jobsN·본인제공
선수 시절의 이왕표 모습

1993년 9월, 미국 프로레슬링 선수 빅 존 호크와GWF(Global wrestling Federation)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겨뤄 이겼다.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것. 이후 부커T, 마이크 어썸 등과 경기를 가지면서 25번의 타이틀 방어전에 성공했다. GMF 챔피언 벨트를 영구 보관하고 있다. 2000년에는 자이언트 콜린과 겨뤄 루테스, 역도산, 김일 등이 챔피언을 지녔던 WWA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왕표는 그동안 치른 경기 중 2008년 밥샙과 했던 경기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워낙 K-1에서 잘하던 친구라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매트에 누우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도망만 다녔어요. 그러다 1분 쯤 기회가 생겨 태클로 넘어뜨려 암바를 걸었죠. 결국 이겼지만 나 다운 시합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왕표다운 화려한 기술과 힘을 보여주는 경기를 하지 못했어요. 팬들에게 죄송했죠."


담도암으로 은퇴


60세가 가까워 질 즈음 은퇴를 생각하고 마지막 경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2013년 담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계획한 경기를 모두 취소하고 투병을 시작했다. "링 위에서 마지막 경기를 하고 은퇴를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으로 다 물거품이 됐어요. 암담했습니다."


수술을 통해 암이 전이가 된 담낭과 쓸개, 췌장 1/3을 제거했다. 2차 수술을 마치고 나니 120kg였던 체중이 80kg로 줄었다. 더이상 링위에 오를 수 없었다. 2015년 5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 40년 동안의 프로레슬러 생활을 접는 순간이었다.

출처: 조선DB
2015년 5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이왕표 은퇴식

이후 완치판정을 받았지만 꾸준히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지금은 WWA 협회 총재로 레슬링 시합 주선 및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암 때문에 운영을 중단했던 이왕표 레슬링 체육관을 다시 준비중이다. "프로레슬링 전성기 때는 지방에서 경기를 해도 2만명의 관중이 몰렸습니다. 그 인기를 쭉 이어오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다시 부흥할 거라고 믿습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은 인기가 많습니다. 현 격투기 선수들을 레슬링과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두 나라처럼 다시 예전의 인기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레슬링은 본인이 좋아해야지 할 수 있는 운동입니다. 선수들도 책임감과 사명을 가지고하면 한국 레슬링도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선수들이 폭넓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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