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드라이빙 메모리 (6) - 시트로엥 XM
마지막 프렌치 럭셔리
Prologue – 수입차 다양화의 첫 흐름
199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 수입차 시장의 도약기였다. 1987년 하반기 자동차 시장이 개방되면서 대기업들은 자동차 수입을 신사업으로 받아들였다. 모기업이 대만을 비롯해 아시아지역 메르세데스-벤츠 판권을 갖고 있던 한성자동차를 제외하면 코오롱(BMW), 효성(아우디/폭스바겐), 대우(캐딜락), 한진(볼보), 쌍용(르노), 두산(사브), 동부(푸조) 등 대기업들이 유행처럼 수입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창기 수입차 시장은 성능으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국산차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국산차가 3,000만 원이라는 벽에 갖힌 동안, 수입차는 차종에 따라 1억 원이 넘는 가격표를 단 차들까지 등장했다. 당시 강남의 아파트들이 1억 원에 미치지 않던 시절 1억 원이 넘는 차가 존재하는 수입차 시장은 꿈의 세계였다. 첫해 그러니까 1987년 하반기 만의 수입차 등록실적은 단 10대.
서울올림픽 분위기에 경제적 호황이 이어지면서 수입차 시장은 100대 단위로 커졌고 90년대까지 꾸준히 판매가 늘었다. 당시 판매는 메르세데스-벤츠와 BMW가 주류였다. 그러던 어느날 모 일간지에 ‘수입차 3년간 600% 증가’라는 기사가 나오고 ‘1억이 넘는 차(메르세데스-벤츠 560 SEL과 BMW 750iL) = 수입차)’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수입차 오너들은 ‘과소비의 원흉’ 혹은 ‘매국노’라고까지 내몰리는 분위기였다. 또 당시엔 ‘수입차를 타면 세무조사가 나온다’는 루머까지 퍼져 시장이 급격하게 위축되기도 했다. 이 시기 많은 초기 수입사가 사업을 접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들어 수입차에 대한 여러 오해가 풀리고 선택의 다양성이 시장에 인식되면서 IMF 전해인 96년에는 등록대수 1만 대를 넘게 되었다. 시장이 성장하면서 메르세데스-벤츠, BMW 중심의 시장에 다양한 모델이 더해졌다. 사실 90년대 초반의 시장은 유럽차가 주류였다. 미국산 차는 지프와 기아에서 OEM방식으로 수입한 머큐리 세이블, 한국인에게 친숙했던 혼다 어코드 등이 있을 뿐 대부분 수입차는 독일 브랜드가 차지했고 수입차 처음으로 3,000만 원의 벽을 아래로 깨뜨린 볼보 740이 팔리는 정도였다.
90년대 들어 원화강세가 이어지고 수입차 시장의 상대적 가격이 떨어지면서 다양한 수입차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런 흐름 속에 독특한 브랜드가 얼굴을 내밀었다. 바로 시트로엥이었다.
마이너리티 시트로엥의 등장
빛나는 모델들을 선보이며 자동차 역사를 장식했던 시트로엥이 우리나라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은 1996년이었다. 트락숑 아방으로 불리는 9CV, 11CV 등 최초의 앞바퀴굴림차를 비롯해 본격적인 하이드로 뉴매틱 서스펜션을 네바퀴에 모두 단 DS시리즈 등 시트로엥의 차들은 경제형 미니카 2CV로부터 고급차인 DS에 이르도록 첨단기술과 독자적인 자동차 제작으로 이름 높았다. 물론 옛날 얘기다.
독특하고 시대를 앞선 시트로엥의 차들은 앞선 만큼 신뢰성이 떨어졌고 결국 경영권을 라이벌이었던 푸조에 넘긴 게 1975년이었다. 그럼에도 시트로엥은 여전히 선구적 기술과 스타일링을 이어왔다. 워낙 보수적인 푸조에 합병된 탓일까. PSA그룹은 푸조와 시트로엥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경영해왔다. 1990년대는 시트로엥에겐 큰 발전의 시기였다. 데뷔한지 10년 혹은 20년을 훌쩍 넘겨버린 모델들을 버리고 새로운 세대의 모델들을 내놓고 있었다.
주로 실용적인 차들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푸조나 르노에 비해 시트로엥은 고급차도 계속 내놓았다. DS시절 드골 대통령의 의전차를 시작으로 특유의 넓은 휠베이스를 가진 시트로엥은 프랑스 럭셔리카의 명맥을 이어왔다.
사실 고급차 시장으로 올라가면 프랑스 차의 위상은 초라해진다. 그럼에도 시트로엥은 XM이란 모델로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 BMW 5시리즈로 대표되는 이그제큐티브 세단 시장을 겨누었다. 같은 베이스의 푸조 605가 함께 들어왔지만 XM은 한급 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같은 PSA그룹이지만 각 브랜드가 독립적인 마케팅을 하는 관계로, 시트로엥은 당시 푸조를 수입하는 동부그룹이 아닌 삼환까뮤라는 건설사에서 들여왔다.
우리나라에선 생소하기까지한 프랑스 메이커 시트로엥의 기함 XM을 마주했다. 잠시 유럽에 머물 때 도로에서 보았던 XM은 독특한 스타일링이 기억에 남았던 차다. 어느 시트로엥 모델도 마찬가지지만 XM은 확실히 구별되는 모습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대형차임에도 5도어 해치백 스타일에 낮은 쐐기형 후드를 가진 XM은 양산차라기보다는 콘셉트카같은 인상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이던 필자가 8년 된 중고 시트로엥 BX를 탔던 시절이니 XM이 더 멋지게 기억되었는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만난 시트로엥의 기함 XM은 그 사이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더더욱 멋져보였다. 게다가 당시 수입차의 공식대로 풀옵션 모델에 170마력짜리 V6 3.0L SOHC 엔진에 ZF 4단 자동변속기를 단 최고급형이었다.
외면받은 아방가르드
시트로엥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아방가르드(avantgarde)다. 우리말로 전위적(前衛的)이라 해석하지만 오히려 첨단(advanced)이란 표현이 더 가깝지 싶다. 시트로엥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던 메이커다. 마치 다른 차들과 달라야만 한다는 강박감으로 만든 차같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기술들의 선진성과 그에 따른 어색함으로 아방가르드라는 표현을 독점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어려운 경제상황에 맞추어 내놓은 2CV는 헤드라이트도 하나 뿐이었다. 창문은 앞문만 그것도 반쪽만 열리게 만들고(윈도 레일이 필요없어 원가절감, 공정단순화 그리고 경량화 효과를 얻었다) 스티어링 휠의 암도 하나만 달았다. 스티어링 암이 계기반을 가리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서스펜션도 금속제 스프링을 쓰지 않고 유체와 질소가 든 구체를 이용한 하이드로뉴매틱 서스펜션을 개발해 독자적 기술을 과시했다. 시트로엥의 하이드로뉴매틱 서스펜션은 롤스로이스와 마세라티 등이 채용하기도 했다. 90년대 초 필자가 탔던 BX에도 이 하이드로뉴매틱 서스펜션이 달려있어 그 부드러운 승차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XM의 하이드로뉴매틱 서스펜션은 ‘하이드락티브(Hydractive)’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하이드로뉴매틱 서스펜션이 유압과 기압의 물리적 특성으로 작동했다면 하이드락티브 서스펜션은 전자제어 기술이 더해져 쾌적성과 조종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전 하이드로뉴매틱 방식이 부드러움이 두드러졌다면 XM의 하이드락티브 방식은 코너링에서의 안정감이 두드러졌다.
때론 스포츠카와 같이 한치의 기울어짐 없이 코너를 달려낼 정도로 단단한 안정감을 갖고 있는 동시에 거친 노면에서는 미국차만큼 부드러운 승차감을 자랑했다. 당시 모든 스포츠 세단의 벤치마크였던 BMW 5시리즈에 견주어도 전혀 꿀릴 것이 없었다. 170마력 고성능(당시 국산 최고성능 모델인 현대 뉴그랜저 V6 3.0의 출력이 161마력이었다) 세단은 고속도로에서는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급의 안락함을, 북악스카이웨이를 달릴 때엔 BMW 525i에 뒤지지 않는 경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길이 4,710mm 너비 1,795mm의 차체 크기는 요즘 DN8 쏘나타(4,900mmX1,850mm)보다 작지만 휠베이스는 XM이 오히려 10mm 더 길었다. 당시 가장 큰 국산차였던 뉴 그랜저(4,980mmX1,810mm)와 눈에 띄게 차이나는 체구였지만 휠베이스는 XM이 105mm나 더 길었다. 그만큼 XM의 실내는 넓었다. 필자 기억으로는 뒷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해치백 모델의 단점으로 지적되어왔던 뒷좌석의 소음문제를 해치 안쪽 뒤 시트백에 2중으로 글래스 해치를 달아 해결함으로써 고급차다운 정숙성까지 갖춘 XM은 프렌치 럭셔리라는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간 신뢰성에서 큰 점수를 얻지 못한 시트로엥이었지만 90년대 시트로엥의 품질은 크게 향상되어 우리나라 수입차 시장에서 주목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XM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정통 3박스 세단이 주류를 이루는 고급차 시장에 2박스 해치백 스타일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여기에 90년대 초 XM을 디자인한 베르토네의 또 다른 작품 대우 에스페로의 등장이 XM의 이미지를 갉아 먹었다. 필자가 XM을 탔던 1주일간 수십 번 들었던 말이 “이 차 에스페로 신형이예요?”였을 정도로 XM의 스타일링은 독특함이 아니라 이상함으로 받아들여졌다.
XM은 분명 90년대의 아방가르드였지만 그 아방가르드함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외면한 사람들이 더 많은 필자 기억 속에는 불운의 명차로 남아 있다.
사족 (변명)
XM의 생산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졌고 5년의 공백을 지난 후인 2005년 C6라는 후계차가 등장했다. 하지만 C6는 시트로엥의 톱모델일 뿐 럭셔리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7년 만에 단종되었다. 필자가 XM을 ‘마지막 프렌치 럭셔리’라고 한 이유는 프랑스차로 고급차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지킨 마지막 차가 XM이기 때문이다.
글 한장현 (자동차 칼럼니스트,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