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상반기, 여느 때보다 다양한 신차가 나오고 있다. 전기차와 픽업트럭, SUV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어린 자녀를 둔 아빠라면 특히 미니밴 시장에 관심을 모을 듯하다. 기아 카니발뿐 아니라 혼다 오딧세이, 토요타 시에나, 현대 스타리아 등 대중 브랜드 대표 MPV가 나란히 신 모델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SUV 인기에 가려 ‘죽어가는 세그먼트’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부활을 넘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글 강준기 기자
사진 각 제조사
한-미-일 MPV 히스토리

미니밴은 MPV(Multi-Purpose Vehicle, 다목적 자동차)라고도 부른다. 세계 최대 시장은 미국. 1984년 등장한 닷지 캐러밴이 아메리칸 미니밴의 시초다. 승용차 뼈대인 크라이슬러 K-플랫폼을 바탕으로, 넉넉하고 실용적인 거주공간을 갖춰 새 시장을 열었다. 특히 트럭 뼈대에 뿌리를 둔 당대 SUV와 달리, 승차감이 뛰어나고 운전도 편했다.

이후 다양한 경쟁 차종이 등장했다. 포드와 GM뿐 아니라 일본 업체도 도전장을 던졌다. 토요타는 1997년, 북미 시장을 겨냥한 시에나를 출시했다. 중형 세단 캠리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편안하고 실용적인 미니밴을 개발했다. 이듬해 ‘라이벌’ 혼다가 오딧세이를 선보이며 미니밴 황금기를 이끌었다.

일본은 1960년대 이른바 ‘원박스카’를 선보이며 거주공간이 넉넉한 차종을 일찍이 선보였다. 1966년 마쓰다 봉고 등이 좋은 예다. 훗날 기아가 만든 봉고 코치의 뿌리가 바로 이 차다. 그러나 북미 미니밴과 비교하면 시작점이 꽤 달랐다. 트럭 섀시 위에 보디를 얹은 형태로, 편안한 승차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 MPV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역사도 꽤 길다. 1977년, 현대차가 선보인 HD-1000은 ‘국산 최초의 승합차’란 타이틀을 지녔다. 보닛이 없는 ‘원박스카’로, 1세대 포드 트랜짓의 섀시를 바탕으로 미쓰비시 델리카의 디자인을 참고해 현대가 독자 개발했다.
기아는 1979년 비슷한 성격의 AC081을 내놨다. 1.4톤 트럭 기아 타이탄의 섀시에 보디를 얹은 승합차로, 12인승과 15인승으로 나눴다. 이듬해 기아가 마이너체인지 모델 AC076을 선보이며 ‘미니밴’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현대 HD-1000과 기아 AC076은 한계가 명확했다. 트럭에 뿌리를 둔 까닭에 실내가 좁고 승차감이 불편했다.
봉고 신화로 싹튼 K-미니밴
1982년, 우리 정부는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실시했다.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자동차, 1~5톤 버스는 기아산업, 소방차와 탱크로리 등은 동아자동차가 만들고, 이륜차는 기아기연과 대림공업이 합병해 효성기계와 이원화한다는 내용이었다. 현대는 포터와 HD-1000을 단종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아는 승용 세단 브리사를 더 이상 만들 수 없었다.

기아는 MPV를 통해 살 길을 모색했다. 1981년, 마쓰다의 지원을 받아 12인승 밴 봉고 코치를 선보였다. 상용 수요를 넘어 일반 소비자의 레저 수요를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가령, 광고에서 봉고의 지붕에 자전거를 싣고 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눈길을 끌었다. 정장 입은 사람이 봉고를 운전하는 광고도 좋은 예다. 즉, 봉고는 평일엔 아빠의 출퇴근용 이동수단, 주말엔 가족의 나들이 파트너로 틈새를 노렸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982년 1만3,091대나 팔려 ‘대박’을 터트렸다. 당시 봉고의 가격은 648만 원으로, 포니 2보다 약 300만 원 더 비쌌다. 남다른 가격에도 불구하고 소비자가 지갑을 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상치 못한 수요를 확인한 현대는 1986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해제 이후 HD-1000의 후속이자 자가용 수요를 노린 미니밴 그레이스를 선보였다. 미쓰비시 델리카를 바탕으로, ‘달리는 응접실’이란 콘셉트를 앞세워 실내를 고급스럽게 꾸몄다. ‘직계 후손’ 스타리아의 회전 시트는 그레이스도 있었다.
K-MPV의 진화를 알린 1990년대 후반

그러나 봉고 코치와 그레이스는 보닛이 없어 충돌사고에 취약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엔 현대가 칼을 먼저 빼들었다. 1997년 세미 보닛 타입의 스타렉스를 출시했다. 안전성을 키우되, 엔진은 보닛 아래에 얹어 거주공간도 넉넉하게 확보했다. 트림 구성도 다양했다. 7인승과 12인승, 사륜구동 모델 등으로 나눠 소비자를 유혹했다.

1998년, 기아는 미국 미니밴 느낌 물씬한 카니발을 선보였다. 봉고가 1박스, 스타렉스가 1.5박스였다면 카니발은 2박스 MPV였다. 시작점도 달랐다. 토요타 시에나가 캠리 플랫폼을 활용했듯, 기아도 크레도스 골격으로 카니발을 만들었다. 하나의 차로 승합과 승용, 두 가지 수요를 공략한 현대와 달리 오롯이 승용 시장을 노크했다. 국내 소비자는 ‘RV’라는 용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현대는 카니발에 대응하기 위해 그랜저 XG 플랫폼으로 트라제 XG를 만들어 내놨다. ‘XG’ 돌림자를 쓴 이유는 명확했다. 그랜저에 버금가는 풍성한 장비를 담았다. 쌍용은 2004년 4열 시트 갖춘 ‘신들의 산책’ 로디우스를 선보였다. 밑바탕 삼은 뼈대는 체어맨. 안락한 승차감과 고급 편의장비를 앞세웠다. 부담을 던 봉고의 후손 프레지오는 15인승 학원차 시장에 ‘올인’했다.
미래엔 MPV 시장이 더욱 성장할 수도 있다
한 때 미니밴은 미국에서 연간 100만 대 이상씩 팔릴 정도로 수요가 대단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SUV에게 주도권을 뺏기며 판매가 반 토막 났다. 특히 3열 시트까지 갖춘 대형 SUV가 미니밴 시장을 야금야금 갈아먹었다. 국내에선 카니발과 스타렉스만 생존했다. 로디우스의 바통을 넘겨받은 코란도 투리스모는 가늘게 생명을 이어가다가 단종을 맞았다.
그런데 최근 MPV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있다. 단순히 신 모델 등장 때문만은 아니다. 전기차 시대에 맞물려 미니밴의 잠재력이 SUV 이상으로 올라갔다.


미래 모빌리티는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하나의 이동 ‘공간’으로 진화할 예정이다. 승객은 차에서 회의도 하고, 잠도 자고, 온라인 쇼핑도 한다. 완전 자율주행 시스템이 보급되면 더 이상 운전석에 사람 앉을 필요도 없다. ‘운전석’이란 용어도 사라질 수 있다. 폭스바겐 ID. 버즈가 좋은 예다. 이 차는 과거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의 향수를 자극하는 미래 모빌리티다. 폭스바겐 전기차 전용 MEB 플랫폼을 바탕으로 레벨 4 자율주행 시스템까지 갖췄다.

또한, 미니밴 ‘대세론’은 전기차의 기술적 특징을 근거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전기차는 보닛 길이가 짧고 휠베이스가 넉넉하다. 실내 공간이 쾌적한 이유다. 다만, 차체 밑바닥에 커다란 배터리 팩을 깔았다. 따라서 시트가 높게 자리할 수밖에 없다. 지붕을 높게 설계해야 한다. 쉐보레 볼트 EV, 현대 아이오닉 5, 메르세데스-벤츠 EQS 등이 독특한 비율로 등장한 이유다. 반면, MPV는 지금 당장 전기차로 전환하기에 ‘안성맞춤’인 체격을 지녔다. 짧은 보닛, 넉넉한 축간거리, 광활한 거주공간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차가 스타리아에 수소연료전지 파워트레인을 얹겠다고 발표한 이유 역시 MPV의 잠재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 차의 광고를 보면, 운전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뒷좌석에서 편안하게 휴식하는 승객, 마주보고 회의하는 승객, 레저 활동을 즐기는 승객이 주인공이다. 미래 모빌리티 시대에 미니밴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미니밴, 앞으로의 행보에 관심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