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타트업 주인공에게 모티브가 된 6가지 현실 이야기
수지가 사업하고, 남주혁이 개발한다. 그 사이에서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건지 싶은 사슴 같은 눈망울의 김선호가 온갖 독설을 날리면서도 '츤데레' 짓을 한다. 요즘 메타버스가 대세라는데... 이 정도면 한국, 서울의 스타트업 씬과 괴리감이 있다 못해 현실을 저 멀리 날려버린 세계관 아닌가 싶다.
단, CJ E&M의 드라마 명가 스튜디오 드래곤은 여느 때처럼 이야기가 말이 되게끔 하는 그럴듯한 설정과 고증을 나름 팍팍 뿌려놨다. 그러니 예쁘고 잘생긴 선남선녀 배우들의 비주얼에 마냥 좌절하지 말고 한국 스타트업 씬에 관심이 많다면 여기 이 흥미로운 내용을 살펴보자.
드라마 <스타트업>의 캐릭터들에게 모티브가 됐을 듯한 현실 속 6가지 이야기다.
1. 열공하던 달미의 책상에 놓인 책
일하는 장면보다 곱창 밴드로 머리 묶는 장면이 더 많은 듯하지만, 아무튼 삼산텍과 창업에 늘 진심인 달미(수지 분). 샌드박스에 붙은 이후 CEO로서 사업이라는 분야를 '열공'할 때, 카메라가 스쳐 지나가듯 책상에 놓인 책 한 권을 비춘다. 제목은 '스타트업은 어떻게 유니콘이 되는가'. 전 옐로트래블 대표 최정우가 쓴 <스타트업은 어떻게 유니콘이 되는가: 극사실주의 스타트업 흥망성쇠의 기록>이다.
이 책과 비즈니스 지식 콘텐츠 플랫폼 폴인에서 발행된 동명의 스토리북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저 책을 왜 읽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제에 '흥망성쇠'라는 워딩이 들어 있지만, 저자가 옐로모바일의 '흥'과 '성'보다는 '망'과 '쇠'를 더 강렬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극 초기 스타트업인 삼산텍을 이끄는 달미로서는 재미있어(?) 보여서 읽었다면 모를까, 당장 배워서 사업에 적용할 만한 내용이 아닌 셈이다.
옐로모바일은 모바일 시대를 맞아 201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거침없는 M&A로 세를 늘린 한국의 2호 유니콘 기업이다(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서비스로는 피키캐스트가 있다). 그러나 방만한 경영 관리로 인해 반짝였던 시절보다 몰락하는 시기가 더 길었다. 그 지난한 과정으로 인해 옐로모바일은 2000년대의 닷컴 버블만큼은 아니더라도 2010년대의 모바일 버블 위기론을 상징하는 회사로 기록되고 있다.
저자 최정우는 이 책에서 옐로모바일에서 겪었던 반쯤 미친 이야기를 수기의 형태로 풀어낸다. 일종의 내부고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수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2020년 상반기 한국 스타트업 씬에서는 가장 파격적인 콘텐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장장 열두 챕터에 걸친 이 대서사를 통해 단순한 폭로만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반면교사의 차원에서 내실 없이 성장하는 스타트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최대한 디테일하게 알리려는 노력이 역력해 보인다.
아마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라면 꼭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치 잘 쓴 수필 혹은 소설을 읽듯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 도산이가 말한 삼산텍의 첫 번째 사업 아이템
기적적으로 샌드박스에 합류한 삼산텍의 첫 번째 아이템 '눈길'은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물체 등을 인식해 시각장애인을 돕는 앱이다. 달미의 할머니 원덕(김해숙 분)의 눈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된 도산(남주혁 분)의 아이디어인데, 현실 속 눈길인 '설리번'이라는 앱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2018년 7월 첫 출시되어 2019년 4월 엘지유플러스와의 협력을 통해 '설리번+'로 거듭난 이 앱은 시력을 잃어간다는 개발사 투아트 직원의 친구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투아트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씨잉 AI라는 시각장애인용 서비스를 내놓았다는 소식도 들은 상태였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동일하나, 한국에 최적화된 앱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고.
이를 위해 투아트의 대표 조수원 씨는 사용자들이 원하는 기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직접 시각장애인들을 만나며 개발에 임했다고 한다. 그 결과, 2018년 제19회 여성창업경진대회에서 장려상,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가 주관하는 C-Star Pitching 연말 결선에서 대상, 2019 APEC 베스트 어워드에서 4차산업혁명 프로젝트상을 수상했다.
설리번은 지금도 iOS/안드로이드 양쪽에서 모두 서비스되고 있으며, 2019년 12월에는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까지 총 5개 국어에 걸친 해외 버전으로도 출시됐다. 한편, 과거 개발 중이라고 언급한 설리번+와의 연계 디바이스 '설리번 팝'과 AI 스피커 '설리번 에코'는 현재까지도 출시되지 않은 상태다.
3. 인재가 개발한 인공지능 폰트 생성기
아빠 청명(김주헌 분)을 따라간 달미와 다르게 엄마 아현(송선미 분)을 따라간 큰딸 인재(강한나 분)는 샌드박스 입성 전부터 동생과 신경전을 벌였다. 절정에 달했던 순간은 샌드박스에서 3분 피칭으로 정면 대결했을 때였다. 이때 인재는 달미가 발표한 필적 위조 감지 시스템보다 인재컴퍼니의 인공지능 폰트 개발 시스템이 창의적이라며 삼산텍을 자극한다. 이어서 인공지능이 개발한 폰트도 위조 감지가 되는지를 두고서 벌인 즉석 대결에서도 승리한다.
인재컴퍼니가 개발한 이 아이템은 드라마에 모티브가 됐을 듯한 현실 속 이야기 중 가장 최신 이야기일 것이다. 올해 4월, 딥러닝 기반의 인공지능 스타트업 보이저엑스가 내놓은 서비스 '온글잎'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온글잎은 인재컴퍼니가 은행 필적 데이터를 활용해 오직 256자의 글자만으로 한글 폰트를 개발했듯 의뢰인이 200자 내외의 글자만 제공해 준다면 세상에 없는 나만의 폰트를 만들 수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다.
이를 통해 단축, 절감되는 기간과 비용이 상당하다. 한글 폰트는 수많은 조합이 나올 수 있는 구조의 문자(총 11,172자)이기 때문에 그간 최소 6개월에서 최대 3년 혹은 그 이상 개발해야만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온글잎은 인재가 말한 40시간보다도 훨씬 짧은 30분 만에 폰트를 뚝딱 만든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들던 실질적 비용도 70 ~ 990만 원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제 마냥 네이버, 배달의민족, 스포카 등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온글잎을 개발한 보이저엑스의 남세동 대표는 이렇듯 가급적 사용자가 회사가 아닌 최종 소비자인 서비스로 빠른 성장을 도모한다고 한다. 실제로 과거 전적이 있다. 네오위즈에서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과 검색 엔진 '첫눈'을 개발했던 그는 네이버에서 셀피 좀 찍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카메라 앱 'B612'를 대히트시키며 천재 개발자라는 명성을 이어온 바 있다. 그러니 삼산텍의 라이벌이자 인재컴퍼니의 개발을 맡은 두 개발자도 엄청난 실력자들인 셈이겠다.
4. 선학이 샌드박스를 만든 이유
드라마의 주요 무대인 샌드박스는 SH벤처캐피탈의 대표 선학(서이숙 분)이 청명에게 들은 딸 아이와의 일화에서 착안해 만든 공간이다. 이전까지 사업가 혹은 투자자로서 어떤 커리어를 밟아왔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그 이야기를 기점으로 건전한 창업 생태계를 만들려는 의지가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샌드박스를 사회 환원의 차원으로 여기는 셈인데, 이를 샌드박스의 로고 속 그네를 타는 소녀를 인재로 착각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때 그는 이 아이라면 돈 외에 다른 이유로 사업을 할 것 같았다고 말하는데, 반대로 수익모델은 다소 요원하더라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템을 내세우는 삼산텍의 달미에게는 호감을 보인다.
이 점에서 임팩트 투자사를 지향하는 성수동 베이스의 벤처캐피탈 옐로우독의 제현주 대표가 오버랩된다. 단적으로 비교하자면 선학은 창업이라는 상대적으로 좁은 영역에서 샌드박스라는 물리적인 방식으로 사회적인 미션을 달성하려 하고, 제현주 대표는 옐로우독의 임팩트 투자를 재무적 수익률과 함께 사회·환경적 임팩트를 내는 투자로 정의하며 투자자로서 사회적 문제를 푸는 데 이바지한다.
제현주 대표는 10여 년간 경영 컨설팅 업체 맥킨지, 투자은행 크레딧스위스, 사모펀드운용사 칼라일를 거쳐 2016년 옐로우독을 설립했다. 이후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는 회사를 찾는 것이 오히려 한 발 더 빨리 좋은 투자 기회를 찾는 것이라 여기며 2019년까지 500억 원이 넘는 투자 금액을 22곳의 회사에 집행하고, 1,000억 원 가량의 자산을 운용해왔다.
올해는 피트니스테크 스타트업 짐티, 실시간 박테리아 검출 IoT 센서를 개발하는 더웨이브톡, 농생명과학 기술 기업 이그린글로벌에 투자한 바 있다.
5. 청명이 꿈꾼 사업 아이템
달미에게 사업을 하는 동인이 필요하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빠 청명은 이혼 후 배달 관련 사업을 준비했다. 탁자에 수많은 음식점 전단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DB화해서 만든 홈페이지 '배달 닷컴'이 그가 투자를 받기 위해 준비한 제품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 들 것이다. 한국의 대표 배달 앱 '배달의민족'을 만든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대표의 초반 창업기가 정확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달미 아빠와 달리 김봉진 대표의 첫 번째 사업 아이템은 배달의민족이 아니었다. 그는 디자인 에이전시 이모션, 게임 회사 네오위즈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중 2000년대 후반 들어서 가구 사업을 먼저 했다. 이후, 회사가 부도나면서 2억 원의 빚을 진 채로 2010년 다시 창업한 회사가 우아한형제들이다.
우아한형제들은 초기 자본금 3,000만 원, 직원 5명으로 작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란색 전화번호부를 디지털화하려다가 중간에 노선을 좁혀 배달 중개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청명처럼 직접 모은 전단을 통해 구축한 약 5만여 개의 식당 DB로 사업에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시 선두주자로 배달통, 배달114가 있었다고 하지만, 배달의민족은 국내 시장에 알맞은 B급 정서를 가미한 브랜드 마케팅 등을 내세우며 경쟁자들을 빠르게 눌렀다.
청명에게 투자를 결정한 SH벤처캐피탈처럼 사업 초반 우아한형제들에 투자한 회사는 본엔젤스였다. 본엔젤스는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개발한 크래프톤(전 블루홀 스튜디오)의 장병규 의장이 대표를 맡았던 초기 투자 회사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조건부 승인이라는 방침을 내렸지만, 만약 딜리버리히어로가 예정대로 인수를 완료한다면 우아한형제들에 6.3%의 지분이 있는 본엔젤스는 초기 투자액 3억의 1,000배에 달하는 수익률을 찍을 것이라고 한다.
+. 고등학생 지평이가 2005년 투자한 종목
"나도 펜트하우스에서 한강 뷰 보면서 괴로워하고 싶다", "나도 벤츠 스포츠카 운전대 꽝꽝 치면서 광광 울고 싶다" 요즘 김선호가 연기한 '서브 남주' SH벤처캐피탈의 수석팀장 지평을 보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연봉 2억 원, 인센티브 15억 원이라는 상식 밖의 급여를 받고, 개인 투자는 그 이상이라니 실례가 안 된다면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지평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투자의 귀재로 등장한다. 손발이 없어질까 봐 초반만 보다가 손절매한 사람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모의투자대회에서 1등을 한 그는 고아 신세에 집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몸을 의탁한 원덕의 현금 800만 원을 주식에 투자해 8,000만 원으로 만들었다. 10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김선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11월 한 달 동안 상승률이 200%였는데, 수익률이 무려 900%다!
그렇다면 과연 지평은 어떻게 투자했길래 10대 슈퍼 개미가 된 걸까? 우선, 드라마에서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5년 봄이다. 2005년은 코스피 주가가 1994년 1,100 선을 돌파한 이후 최초로 1,200, 1,300선을 연거푸 돌파할 정도로 호황인 해였다. 이 과정에서 800선 후반으로 시작해 1,000선을 다시 돌파한 건 2월 말 즈음이었는데, 지평은 이전에 주식을 매입해 드라마처럼 벚꽃이 떨어지기 전인 3월 고점에서 매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섹터별로 보면, 증권업(175%), 섬유업 및 의류업(135%), 의약품(117%), 건설업(112%)가 높은 상승률을 보였는데, 이 정도로는 900% 수익률을 가늠하기 어렵다. 종목별로 뜯어보면 미국 바이오 회사에게 인수된 동일패브릭(3,785%), 엔터주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말해준 팬텀(3,736%) 등이 있다. 지평이 기술 전문 심사역임을 감안하면 그는 이중 DMB 사업을 전개했던 3SOFT(3,057%)나 로봇주 다스텍(1,247%)에 투자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글 김정원
melo@eoeoeo.net
EO(Entrepreneurship & Opportuni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