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다각화에 실패하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를 짐의 군사 고문으로 임명하노라. 공국 내 모든 요새와 성채는 앞으로 그의 감독을 받을 것이다. 그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막힘이 없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라. 만일 이 명을 어길 시에는 누구든지 참형에 처할 것이다.”

1502년 7월 로마냐. 당시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던 불세출의 영웅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는 세기의 천재를 자신의 참모로 기용했다. 이는 문왕이 강태공을, 유방이 장량을,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세기의 만남은 8개월 만에 끝이 난다. 체사레 보르자가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를 두려워했던 정적들은 그가 약해진 틈을 타 교황을 등에 업고 실권을 장악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체사레 보르자는 세력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 1475년 9월 13일~1507년 3월 12일)

그러나 1507년 3월 12일 나바라 왕국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고 적진 깊숙이 돌격했다가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나름의 방식대로 그를 기념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그리워하며 그를 모델로 [군주론]을 저술한다. 니체는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철인’의 개념을 생각해냈다.

체사레 보르자 사후, 다빈치는 다시는 군사 고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예술가로 돌아갔다. 후원자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던 다빈치는 체사레 보르자가 죽은 지 12년 만에 타향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살아생전 그가 남긴 그림은 30여 점이 전부였다. 그중 완성작은 20여 점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다빈치를 게으른 천재라 부른다. 정말 다빈치는 게을렀을까? 혹시 그림을 그리기 싫었던 것은 아닐까?

다빈치의 스승 안드레아 델 베르키오(Andrea del Verrocchio)는 다빈치와 공동작업을 한 번 한 이후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다빈치의 그림이 너무 뛰어나 그림 그릴 의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후로 베르키오는 조각에만 전념한다. 이렇게 뛰어난 실력의 다빈치였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자화상 1510~1515년경)

베르키오 공방 출신의 다빈치,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시뇨렐리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위대하고 멋진 예술 프로젝트를 의뢰받고 많은 돈을 벌었다. 로마로 파견되어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회화와 장식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멋진 후원에서 다빈치는 항상 제외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다빈치를 싫어했다. 다빈치에게는 다른 이들이 바빠서 맡을 수 없는 찌꺼기가 돌아갔다. 보수는 형편없었고 재료비마저 다빈치가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빈치의 자기소개서 

1482년, 다빈치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공작을 찾아가 리라를 연주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메디치는 쓸모없는 다빈치를 음악에 관심이 많은 스포르차 가문에 선물로 넘길 심산이었던 것이다.

루도비코 스포르차

다빈치는 이를 다른 분야로 진출할 기회로 여겼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 분야는 레드 오션이었다. 천재 예술가는 넘쳐났고, 이들과 겨루어 생존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스승을 벗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다빈치 자신이 이를 입증했다. 마침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빈치는 스포르차 밑에서 군사 고문이 되어 전쟁의 세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자기소개서를 준비한다.

자기소개서를 보면 다빈치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스포르차는 다빈치의 바람과 달리 17년간 단 한 번도 군사와 관련된 일을 맡기지 않았다. 다빈치는 공연 연출, 음악, 회화, 조각 등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예술가의 생활을 이어갔다.

자기소개서 말미에 소개된 청동 기마상 제작마저도 시작은 했지만 완성할 수 없었다. 대포를 만든다며 작품을 위한 청동 재료를 모두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하면서 다빈치는 밀라노를 떠났다.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예술 활동을 하던 중 자신을 알아주는 체사레 보르자를 만났고, 다빈치는 그제야 꿈에 그리던 일국의 군사 고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식의 싸움

다빈치는 왜 군사 고문이 되기 어려웠을까?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다. 다빈치의 자기소개서를 보면 마치 현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군사 전문가처럼 느껴진다. 특히 장갑차에 대한 표현은 소름이 돋는다. 장갑차에 대한 발상 자체도 놀랍거니와 장갑차의 뒤를 보병이 따르는 것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쓰이는 육군 전술이기 때문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조금만 운이 좋았더라도 다빈치와 함께 유럽판 칭기즈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돌격하는 다빈치의 장갑차 군단을 르네상스 시대의 어느 군대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다빈치가 군사 고문이 되지 못한 이유는 능력이 아니라 인식의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다빈치가 베르키오의 수제자가 되었을 때 생겨난 인식. 피렌체 화가 길드에 가입한 순간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다빈치는 예술가’라는 인식이 다빈치의 이름을 예술 영역의 브랜드로 만든 것이다.

인식의 힘이 와 닿지 않는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했을 때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보라. 대부분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연상할 것이다. 예술에 관심이 없다면 [다빈치 코드]를 떠올릴 것이다. 당신이 연상한 그것은 내일도 그다음 날도 10년 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처음 받아들인 인식을 웬만한 자극이 아니고서는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다빈치가 이 인식을 깨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다빈치를 잘 모르는 곳으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체사레 보르자 같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방면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다. 다빈치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는 없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다빈치를 천재 예술가, 천재 화가로 기억한다. 다빈치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일부 사람들만 장갑차의 스케치를 기억할 뿐이다.

다빈치, ‘장갑차’ 드로잉

인간은 하나의 이름을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이것이 다빈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마케팅에서 포지셔닝의 개념도 이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다빈치의 이름은 이미 예술가 이미지로 포지셔닝된 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이미지인 군사 영역으로의 다각화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다빈치가 예술과 군사 두 가지 영역에 꾸준히 업적을 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빈치 브랜드는 두 이미지가 섞여서 점점 또렷함을 잃어갔을 것이다. 당대에는 어느 분야에서도 최고로 인정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후대에 그의 업적이 재평가된다면 먼저 발견된 업적으로 이미지가 굳어졌을 것이다.

만일 군사 영역으로만 꾸준히 업적을 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빈치 브랜드는 군사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면서 예술은 사라졌을 것이다. 후대에 다빈치는 군사 전략가로 기억되었을 것이며, 미술은 그의 취미로 소개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당연한 소리를 기업들은 자주 놓친다.

브랜드 희석 효과

구글의 잘 나가는 브랜드는 무엇인가? 지메일, 크롬, 유튜브, 안드로이드다. 구글 맵을 제외하고 구글 드라이브, 구글 플러스, 구글 월렛, 구글 앱스, 구글 북스, 구글 파이버, 구글 로보틱스, 구글 글라스, 구글 메신저, 구글 챗, 구글 보이스 등 구글 이름이 붙은 브랜드는 시장을 선도하지 못한다.

펩시콜라는 1898년 창업했다. 1965년 프리토-레이(Frito-Lay)와 합병하면서 이름을 펩시코(PepsiCo)로 바꾸었고, 펩시콜라는 펩시코 산하의 콜라 브랜드가 되었다. 펩시의 알려진 산하 브랜드로는 KFC, 타코벨, 피자헛(이들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브랜드는 1997년까지 소유하고, 트라이콘 글로벌 레스토랑으로 분사)과 게토레이, 퀘이커 오츠, 트리토-레이, 트로피카나, 돌(바나나)이 있다. 펩시는 왜 이들의 이름을 펩시 치킨, 펩시 타코, 펩시 피자, 펩시 주스, 펩시 바나나로 하지 않은 걸까?

펩시 콜라, 퀘이커 오츠, 게토레이, 프리토-레이, 트로피카나 등의 브랜드를 가진 펩시코.

인간은 하나의 이름을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하나의 이름을 여러 곳에 사용하면 그 이름은 여러 가지 이미지로 희석되어 옅어진다. 하나의 이름을 한 곳에 사용하면 그 이름은 진한 농도를 유지한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브랜드 희석 효과(Brand Dilution Effect)라고 한다.

시장에서 기능, 성능, 서비스로 차별화가 힘들 때, 기업은 자사의 브랜드를 소비자의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광고비를 쏟아붓는다. 이를 광고 전쟁이라 불러도 좋겠고, 포지셔닝 전쟁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 전쟁에서 하나의 이름을 여러 곳에 사용하는 것은 차(車), 포(包) 떼고 장기 두는 것과 같다. 여러 분야의 이미지가 뒤섞여 희석된 이름을 소비자의 기억에 각인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진한 농도의 이름을 훨씬 쉽게 기억한다.

다각화의 욕망 

그럼에도 많은 기업이 다각화를 하면서 같은 이름으로 브랜드 확장을 하는 이유는 앞서 쌓은 브랜드 가치가 아깝기 때문이다. 이미 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강력한 브랜드 가치를 확보했기 때문에 그 후광을 다각화할 분야에도 그대로 이용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미련이 있다면 버려라. 그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잘못하면 오히려 기존 브랜드의 이미지마저 추락할 수 있다.

귀뚜라미는 2006년 범양냉방을 인수하고 귀뚜라미 에어컨을 출시하며 사업 다각화에 나섰지만, 오히려 보일러 시장까지 위태로워지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보일러와 에어컨, 상반된 이미지에 같은 이름을 사용함으로 오히려 기존에 쌓은 브랜드 가치를 훼손시켰던 것이다. 반면 비슷하게 시원한 이미지인 에어컨과 김치 냉장고에 위니아와 딤채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한 만도기계는 다각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나의 이름을 여러 곳에 사용하는 다각화도 성공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매우 어렵고,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정체성이 제품이 아닌 감성에 있어야 한다. 광고 역시 그 감성을 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캘빈 클라인이 있다. 캘빈 클라인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섹시함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캘빈 클라인은 적어도 당신에게만큼은 마케팅에 실패한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브랜드 정체성은 섹시다. 캘빈 클라인은 고객들이 섹시함을 떠올리고 청바지, 속옷, 향수를 구매해주길 원한다. 이 전략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청바지는 리바이스에 밀리기 쉽고, 속옷은 빅토리아 시크릿에 밀리기 쉽고, 향수는 샤넬에 밀리기 쉽다.

샤넬, 프라다, 에르메스 같은 명품이 브랜드 농도를 짙게 유지하는 것은 다빈치를 닮았다. 다빈치가 예술가의 이름이기 때문에 예술가의 손에서 탄생한 회화, 조각, 공연예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명품 브랜드는 저명한 장인의 이름이기 때문에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옷, 가방, 향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콜라보다. 다른 분야와의 콜라보는 참여한 브랜드에 신선함과 활기를 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콜라보일 때의 이야기지 다른 분야로 확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다. 예를 들어 프라다폰은 LG의 기술과 프라다의 디자인이 만난 콜라보일 때 시장에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프라다가 스마트폰으로 다각화하면서 프라다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스마트폰 사업이 망할 뿐만 아니라 명품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큰 손실을 입을 것이다.

에르메스, 자원 기반 다각화 

명품 중에서도 에르메스의 사례는 다각화에 적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법을 알려준다. 에르메스는 본래 말안장 같은 승마용품을 만들던 회사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포드(Ford)의 첫 번째 자동차 ‘모델 T’가 출시되었을 때 마차나 승마용품을 만들던 회사들은 비웃었다. 초기의 자동차는 고장도 잦았고 성능도 말(馬)과 비교하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동차는 우아함이 떨어졌다. 그들이 보기에 자동차라는 신기술은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 가능성이 높았다.

모델 T(model T, 1920)를 통해 시장을 지배한 포드

하지만 당시 에르메스의 대표였던 에밀 에르메스(Emile Hermes)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보기에 말 산업은 자동차로 인해 사양화될 가능성이 컸다. 아무 대비도 못 한다면 에르메스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다고 당장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뛰어드는 위험을 감수할 수도 없었다. 에밀은 현재 에르메스가 가진 자원과 노하우를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았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여행용 가죽 가방이었다. 여행은 에르메스의 현 주력 분야인 말 산업과 연계될 수 있었다. 게다가 승마용품 제작을 전문으로 해온 장인들의 회사였기에 가죽에 대한 노하우는 차고 넘치도록 축적되어 있었다.

1922년, 에르메스는 다각화를 단행한다. 그리고 그동안 말안장 제작을 통해 축적해온 가죽 노하우를 가방 제작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말안장 박음질에 사용하던 에르메스의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는 가방 제작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에르메스의 독특한 박음질은 가방 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다. 에르메스는 그렇게 명품이 되었다.

에르메스에서 배울 수 있는 다각화 노하우는 자원 기반(Resource-based) 다각화다. 만일 기업이 기존 주력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다각화를 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또한, 이미 해당 분야의 노하우를 축적한 경쟁자들과 피 튀기는 전쟁을 벌여야 한다. 에르메스는 그런 낭비를 피했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원으로 가장 영리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한경희생활과학 워크아웃 

한경희생활과학(이하 ‘HAAN’)이 2015년 연말 워크아웃 절차에 돌입했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평소 사회 공헌 활동을 활발히 해온 기업으로 알고 있기에 안타까움이 컸다. HAAN은 어째서 어려움에 빠진 걸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그동안 만들어온 제품을 보면 HAAN이 겪은 어려움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뭐 하나는 걸리겠지 싶어서 마구 던진 느낌이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 냄비세트
  • 믹서기
  • 보온 히팅 쿠커
  • 죽 마스터
  • 무선주전자
  • 와이드 그릴팬
  • 자세교정용 책상
  • 프라이팬
  • 샤워필터 등등

경영은 선택의 연속이다. HAAN에게 가장 영리한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R&D에 투자하고, 주력 제품이었던 스팀청소기를 산업용 · 매장용 등으로 확장하고, 신제품을 주기적으로 출시하여 재구매를 유도하는 제품 개발전략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팀 청소기 신제품은 2014년에 멈춰있다. 왜일까? 2014년은 HAAN이 탄산수 제조기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 업체와 계약을 했다가 사기로 1,200만 달러의 손해를 입은 해이다. 그해 HAAN은 대규모 적자를 냈다.

HAAN에 다각화가 꼭 필요했다면 그간의 사업을 통해 보유한 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좋았다. 에르메스처럼 말이다. 탄산수 제조기는 기술도, 고객도, 수익을 내는 방법도 스팀청소기와 다르다. HAAN은 주력 사업과 너무 멀리 있는 것을 택했다. 그간 축적한 노하우를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사업이다. 그 외 다른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자세교정용 책상과 보온 히팅 쿠커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런 식의 다각화는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 변수가 너무도 많다. 너무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다.

임파워먼트(권한 위임)

보유 자원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도 다각화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방법은 없을까? 있다! 만일 보유 자원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 방법까지 사용한다면 금상첨화다. 방법은 단순하다. 다각화할 분야에 믿을만한 해당 분야 전문가를 대표로 세우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따위가 무슨 방법이 될 수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순한 이 원칙 하나만으로 세계 각국에 서로 다른 분야의 계열사 425개를 거느린 초우량 기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그 지주 회사의 이름은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대표는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다.

출처: (2005, Mark Hirschey, CC BY SA 2.0, 위키미디어 공유)
캔사스 대학에 방문해 강연하는 워렌 버핏의 모습
“권한 위임은 우리 경영 철학의 주춧돌이다.
우리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인재를 고용하여
업무에 필요한 책임과 권한을 주는 것이다.”

캐피털 시티즈(Capital Cities)의 대표 톰 머피(Tom Murphy, 사진)는 중요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앞에 소개한 회사 강령을 늘 낭독한다. 캐피털 시티즈의 모든 임원들은 자율 권한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사업부를 경영한다. 톰 머피는 단지 믿을만한 전문가를 앉혀놓고 경영 성과를 평가할 뿐이다. 이는 ABC 방송국같이 캐피털 시티즈가 인수한 회사들에도 똑같이 적용된 골든 룰이었다. ABC는 1996년 디즈니에 무려 190억 달러에 팔린다.

톰 머피는 1969년 친구의 소개로 버핏을 만났다. 버핏의 비범함에 반한 머피는 이사직을 제안했지만, 버핏은 거절하는 대신 고문 역할을 맡기로 했다. 이후 머피는 버핏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버핏 역시 머피로부터 거대한 부를 안겨줄 중요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한 위임, 임파워먼트(Empowerment)였다.

섬유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는 버핏이 최초로 인수한 회사이자 제대로 말아먹은 회사이기도 했다. 버핏의 인수 직후 섬유 산업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국 1985년에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럼에도 버크셔 해서웨이는 망하지 않았다. 섬유 사업으로 손실을 본 버핏이 정신을 차리고 머피에게 배운 임파워먼트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1967년에 인수한 오마하의 보험회사들을 필두로, 1971년 인수한 씨즈 캔디, 1973년 인수한 워싱턴포스트는 성격이 전혀 다른 회사들이었지만, 버핏의 지휘 아래 우량 기업으로 성장했다. 비결은 단 하나. 전문가를 대표로 앉히고 손대지 않는 것! 단지 평가를 통해 책임을 지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맡기는 것이었다. 이는 425개 계열사 모두에게 적용되는 절대 법칙이었다.

왜 내 소유의 사업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가? 버핏은 계열사가 많아서 그런 것 아닌가? 아니다! 버핏은 계열사 수가 몇 안 될 때부터 남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상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버핏의 경영 스승인 톰 머피도 그 단순한 상식을 경영에 적용한 것뿐이었다. 모르는 사업을 굳이 도맡아 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비용은 폭등하고 실패 확률도 동반 상승한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다각화의 목적은 분산을 통해 위험을 줄이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험은 다각화 자체에 있다. 이 생각에 동의하는 기업은 드물 것이다. 주로 잘 나가는 장수 기업들이 다각화를 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 분야에서 성공해봐서 만만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 베인 앤 컴퍼니(Bain&Company)는 앤소프 매트릭스(Ansoff Matrix)를 기준으로 2,600여 개 기업의 성장 전략을 분석했다. 그 결과 시장 침투 전략의 50%, 시장 개발전략의 25%, 제품 개발전략의 16%가 성공했고, 다각화 전략은 단 4%만 성공했다. 비용 역시 성공확률이 낮을수록 많이 소모되었다. 시장 개발전략은 시장 침투 전략보다 평균 4배 많은 자원이 소모되었다. 제품 개발전략은 8배, 다각화 전략은 16배였다.

주력사업이 사양화 추세에 있는 기업일수록 생존을 위해서라도 다각화는 꼭 필요하다. 피할 수 없는 다각화라면 96% 실패의 벽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브랜드 희석, 자원 기반, 임파워먼트를 기억하고 당신의 사업에 적용하라. 두터운 다각화의 벽을 허무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슬로우뉴스 좋으셨나요?

이미지를 클릭 하시면 후원페이지가 열립니다.

Copyright © 슬로우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