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던 배우 반민정의 싸움에 대한 기록[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1. 27. 14:5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독립군의 무장 항일투쟁을 그린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안옥윤(전지현)은 이렇게 말한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지난 15일 강제추행 피해자 배우 반민정에 대한 배우 조덕제(본명 조득제)의 2차 가해에 대한 1심 유죄 판결과 그에 대한 반민정의 입장문을 보며 저 대사가 떠올랐다. 그는 영화 촬영 중 조덕제에게 겪은 강제추행에 대한 재판과 그 와중에 겪은 언론 및 댓글의 2차 가해의 고통에 대해 “모든 삶이 흔들렸습니다”라며 “그럼에도 제가 끝까지 버틴 것은 법으로라도 허위사실임을 인정받기 위한 것에서 나아가, 다른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희망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 밝혔다. 그는 본인을 위해 싸웠지만 또한 여기 부당함에 맞서 계속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싸웠다. 마치 인용한 영화의 대사처럼.

배우 반민정에 대한 배우 조덕제의 강제추행 사건이 어떻게 왜곡 보도되었는지를 다룬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방송분. 조덕제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자 2018년 11월 방송된 내용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암살>이 그러하듯, 우리 역시 그토록 외로웠던 싸움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반민정이라는 이의 용기와 인내를 기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누군가 외롭게 싸웠다는 것은 그저 그의 곁에 연대가 부족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를 침묵시키는 데 동참한 꽤 커다란 사회적 카르텔이 있다는 것 역시 방증한다. 누군가의 실존을 건 싸움조차 자극적 이슈로 소비하고 증발시키는 미디어 환경에서 제대로 된 공통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다음에 싸워나갈 또 다른 이들은 다시 영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한국에서 성범죄에 대한 논의의 진전을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시켜온 수법이기도 하다.

시계를 2017년 10월 중순으로 돌려보자. 남배우 A의 영화 촬영 중 성추행에 대한 2심 집행유예 선고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자, 배우 조덕제가 스스로 남배우 A임을 밝히며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고 그 순간부터 해당 사건에 대한 기사가 약 2주 만에 500건 이상 쏟아져 나왔다. 반민정이 1심 무죄 판결 후 2심 판결에 이르기까지 싸워온 긴 시간 동안 해당 사건을 다룬 기사가 고작 20여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자체로 공론장의 기울어진 관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특히 10월25일 디스패치에서 보도한 ‘[단독] ’디렉션:미친놈처럼’ 조덕제 사건 메이킹 필름 입수’라는 기사 이후 디스패치를 인용한 기사들이 포털 연예면을 점령했다. 디스패치는 메이킹 영상에 대한 전문가 분석 코멘트를 곁들인 뒤 해당 영상만으로는 성추행 여부를 인식하기 어려움을 강조하며 “메이킹 필름은 스모킹 건이 아니다. 유추할 수 있지만 단정 짓진 못한다”고 교묘하게 발을 뺐다. 이미 해당 영상을 포함한 더 많은 분량의 영상을 역시 전문가들의 분석을 받아 2심 판결에 적용했다는 사실은 묻히고, 마치 디스패치가 판결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 증거라도 가지고 나온 것처럼 모두들 호들갑을 떨었다.

배우 반민정에 대한 배우 조덕제의 강제추행 사건이 어떻게 왜곡 보도되었는지를 다룬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방송분. 조덕제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자 2018년 11월 방송된 내용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인용 기사 중 아시아경제는 ‘조덕제도 피해자’라는 누리꾼 의견을 기사 타이틀로 덧붙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해당 보도 이후 조덕제의 무고함이 증명됐다거나 피해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이 포털 댓글란을 지배했다.

약 1년 뒤인 2018년 9월, 대법원에서 조덕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및 40시간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을 선고받았다. 그래서 과연 반민정이 싸워온 시간과 그에 대한 수많은 가해와 공모에 대한 올바른 공통의 기억이 만들어졌을까.

여전히 언론은 조덕제가 토로하는 억울함을 기사로 실어줬고 포털에선 “이제 때리는 연기 하다가 사람 때리면 폭행죄로 넣을 수 있겠네” 따위의 댓글이 2000개의 추천으로 베스트 댓글로 올라갔다. 선고 후 10일 뒤 자칭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에 할 말 하는 국내 유일 진보언론’ 리얼뉴스에서는 작가 오세라비가 작성한 조덕제의 호소에 귀 기울여준 ‘조덕제, 통한의 심경을 밝히다’라는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오세라비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한 여성단체들의 정치적 압력이 1심 판결을 뒤집었다거나 반민정이 반기문과 혈연임을 주장해 압박했다는 조덕제의 음모론을 충실히 실어주는 한편, “반민정이 무슨 파워를 가진 배우인가 영화 촬영하면서 이래라저래라 했다는데 이해가 안 된다” 따위의 피해자를 공격하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던지기도 했다.

오세라비와 조덕제의 연대는 너무나 빤한 방식으로 확장됐다. 한 달 뒤, 혜화역에선 곰탕집에서 여성을 성추행한 남성의 유죄 판결을 비판하는 자칭 ‘당당위’(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의 시위가 열렸고, 비록 신고인원 1만5000명에 많이 못 미치는 60여명만 참여했지만 여기엔 조덕제, 오세라비, 작가 박원익(박가분), 유튜버 액시스마이콜(마재) 등이 함께하며 힘을 보탰다. 여성 대상 성범죄에 있어 무죄추정 원칙이 훼손되고 있고 페미니즘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종교적 믿음을 되뇌는 남성들 사이에서 조덕제는 부당한 박해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이토록 성범죄 가해자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온 우주가 힘써주는 동안에도 반민정의 싸움은 계속됐다. 유의미한 승리의 기록도 쌓여갔다. 2018년 10월에는 디스패치에서 메이킹 영상 공개 기사를 작성하며 받은 전문가 감정이 급조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다른 기사들에서 피해자 정보를 공개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기사 삭제 및 정정 보도를 했다. 사건이 어떻게 왜곡 보도되고 피해자를 괴롭혔는지에 대해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에서 다루기도 했다. 물론 그의 전진만큼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적지 않은 언론이 원하는 것은 논의의 비가역적인 진전이 아닌, 논란의 재점화와 반복이었으므로.

배우 반민정에 대한 배우 조덕제의 강제추행 사건이 어떻게 왜곡 보도되었는지를 다룬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방송분. 조덕제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자 2018년 11월 방송된 내용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조덕제 본인 유튜브에 그의 아내가 출연해 남편의 무죄를 호소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필터링 없이 기사화됐고, 포털에선 “남자들은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처럼 정확히 ‘당당위’와 공유하는 통념이 베스트 댓글을 선점했다. 반민정은 조덕제 개인과 싸운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가상적이지만 거대한 세계관과 싸운 셈이다.

조덕제의 지속적인 2차 가해에 대한 이번 판결과 구속의 의미는 이러한 길고 긴 싸움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반민정이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점진적인 승리의 기록 중 하나인 동시에 남성들이 억압받는다는 가상적 믿음에 대한 유효한 타격이다. 그들이 믿음을 바꾸진 않겠지만 적어도 입을 잘못 놀리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반성 없는 이들도 있다.

앞서의 조덕제 인터뷰를 심지어 책으로까지 출간하며 2차 가해의 선봉에 섰던 오세라비는 최근 <페미니즘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라는 책에 참여하며 변함없는 행보를 잇는 중이다. 그를 포함 ‘당당위’ 집회에서 조덕제와 함께했던 인사들도 아무도 관심 없는 본인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반복해서 말하는 중이다.

세상이 그대로라는 증거는 여전히 넘친다. 하지만 비관해선 안 된다. 처음부터 이야기했듯 이것은 철저히 기울어진 전장 위에서 시작된 싸움이었다. 그리고 한 피해 여성이 다른 여성들의 연대와 응원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전진했다. 이것은 승리의 기록이다. 모두가 반복해서 되뇌고 기억해야 할.


칼럼니스트 위근우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