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바이든은 당선 뒤 왜 고딕체 글꼴을 명조체로 바꿨나?

한겨레 2021. 1. 2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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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서울 경복궁 수정전에서 개막한 ‘한글 글꼴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2010년 10월 열린 행사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로버트 파우저ㅣ언어학자

올겨울 20세기 록과 팝송을 자주 들었다. 유튜브 채널로 무심코 음악만 듣다가 반복되어 등장하는 음반 재킷을 보니 오랜만에 옛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더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드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 Nico)의 노란 바나나(앤디 워홀의 디자인), 조이 디비전 <언논 플레저스>(Unknown Pleasures)의 과학적 펄사(pulsars) 전파, 그레이스 존스 <아일랜드 라이프>(Island Life)의 로봇 자세 등을 보니 새삼 반갑기까지 했다.

앨범 재킷에 사용한 글꼴의 모양과 색깔은 매우 세심한 선택의 결과다. 동시에 시대성을 반영한다. 레드 제플린이 앨범에 쓴 구부러진 글꼴에서는 1960년대 말 유행한 사이키델릭 록의 분위기가, 더 클래스의 미완성 같은 글꼴에서는 1970년대 말의 펑크 록이 추구한 반사회적 태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1970년에 등장한 전자음악 그룹인 크라프트베르크의 앨범은 깔끔하고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글꼴을 사용했다.

어디 앨범만일까. 세상에 넘치는 온갖 문자에는 글꼴이 있고, 글꼴에도 유행이 있으며 현상의 이면에는 메시지도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 글꼴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을까?

수많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 알파벳을 사용하는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세리프(serif)와 산세리프(sans-serif)라는 전통적인 흐름이 있다. 세리프 글꼴은 글자 획의 일부 끝이 부드럽게 돌출되어 있다.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인지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이 강하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면에서도 효과적이다. 은행이나 보험회사를 비롯한 금융 회사에서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세리프 글꼴은 고전주의 또는 전통과의 단절을 지향하는 감수성을 반영해 20세기 전후에 등장했다. 이름 앞에 붙은 ‘산’(sans)은 프랑스어로 ‘없는’이라는 뜻을 갖는다. 아무런 돌출 없이 획이 바로 끝난다. 어쩐지 신선하고 창의적인 느낌이다. 구글이나 삼성을 비롯해 많은 기업이 로고의 글꼴로 채택한 이유도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필기체 분위기를 내는 글꼴도 다양하다. 세리프 글꼴보다 고전적인 느낌이 더 강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글꼴은 만찬이나 결혼식 같은 주요 행사 초대장에 주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고, 캐딜락이나 카르티에 같은 명품 로고에 등장한다. 물론 훨씬 가볍고 노는 느낌이 있는 경쾌한 필기체도 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로고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꼴에 느낌을 주는 요소는 또 있다. 두꺼운 볼드체는 강조하는 느낌이 강한 반면, 이탤릭체는 강조의 느낌을 주지만 훨씬 부드럽다. 이탤릭체는 또 영어에서 여러 제목과 표제, 학명, 외래어를 표시하는 기능도 있기 때문에 권위의 느낌이다.

그렇다면 세리프, 산세리프, 필기체를 볼드체, 이탤릭체와 섞어 사용하면 어떨까? 글의 의미에 맞는 시각적 자극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글쓴이가 전달하고 싶은 생각까지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매일 수많은 글꼴에 노출되어 있고 별생각 없이 수많은 글꼴을 이미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글꼴을 이용해 글의 내용보다 더 강한 의도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얼마 전 치러진 미국 대선과 취임식에서 사용한 글꼴에서 나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바이든과 트럼프 모두 선거운동 중에는 산세리프 볼드체를 주로 선택했다. 특히 변화를 요구하는 바이든 캠프의 글꼴이 훨씬 더 두껍고 자극적이었다. 당선 이후 바이든 쪽에서는 취임식을 준비하며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기념품을 팔기 시작했다. 사용한 거의 모든 글꼴은 세리프였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변화를 강조했지만 당선 이후에는 코로나19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돌출 행동으로 불안한 미국 사회에 안정감, 신뢰를 전달하고 싶은 의도가 반영된 것이리라.

내 관심의 다음 행선지는 한국어 글꼴이다. 독자들은 오늘 어떤 글꼴을 사용할까. 세리프에 해당하는 신명조나 바탕체일까. 산세리프에 해당하는 고딕체와 돋움체일까. 신명조 글꼴을 쓰는 사용자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을까. 고딕체를 쓰는 이들은 글꼴을 통해 수신자에게 새로움과 창의력을 전달하고 있을까. 또는 오늘 선택한 그 글꼴에 담은 뜻은 제대로 전해질까. 이에 대한 답이 썩 긍정적이지 않다면 언어 그 자체만이 아니라 문자의 글꼴을 통해 다양한 의도를 전달할 방법을 이제라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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