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나가라'는 사장에게 직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조회 02020. 9. 23. 수정
국내 컴포트 슈즈 업계 1위
중졸 학력으로 연매출 500억 기업 CEO
회사서 절대 ‘불경기’ 운운하지 않아

㈜바이네르는 국내 컴포트 슈즈(기능성 구두) 업계 1위 기업이다. 바이네르의 김원길(56) 대표는 중졸 학력으로 연매출 500억원대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기업가. 김 대표 방에는 ‘힘들어도 괜찮아’라는 노래의 가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힘들어도 괜찮아 힘든 건 나의 추억이니까 시련아 덤벼라 힘들수록 내 미래는 빛이 날 거야’ 김 대표가 직접 작사했다. “18살 나이에 홀로 충남 당진에서 서울로 상경해 지금까지 살아온 역경의 삶을 고스란히 담았다.” 누구보다 밝고 호탕한 미소를 가진 김 대표를 직접 만나 40년 구두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출처: jobsN
바이네르 김원길 대표 방에는 '힘들어도 괜찮아'라는 노래의 가사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다. 김 대표가 직접 작사한 것이다.

‘미점(美點)’ 찾는 일, 평생 풀어야 할 숙제


1977년 봄, 김 대표는 16살 나이로 홀로 경기도 지축면(현 지축동)에 도착했다. 가난한 집안 형평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꾼 채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한 것이다. 고향 동네 누님의 소개로 분재 농장에 취직했다. 한 달 1만원 월급은 혼자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돈이었다. “사는 게 그리 만만하더냐. 기술 하나면 먹고사는 데 문제 없다.” 평소 조카가 손재주가 좋다는 사실을 눈여겨봤던 작은 아버지가 추석을 쇠러 고향에 내려온 김 대표에게 건넨 말이었다. 결국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서산 구둣방으로 들어갔다. 남들은 1년을 해도 떼지 못한다는 남성용 구두 제작 전 공정을 5개월 만에 마스터하자 ‘서산에 있기는 아까운 재주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됐단다. 이듬해 봄, 김 대표는 다시 기차를 탔다. 이번 목적지는 서울 영등포.


-홀로 상경해서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겁이 났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그래도 용기를 내서 구둣방을 계속 돌아다니며 고용해 달라고 청을 하고 다녔다. 해는 졌는데 받아주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퇴짜를 놓은 집이 20곳은 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문래동의 한 구둣방에서 나를 받아 줬다. 하숙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주는 대신 월급은 없는 조건이었다. 그곳에서 석 달 정도 일했다. 제법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장마철이라 물건이 안 팔린다’는 주인에게 내쫓김 당했다.


그래서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설악산은 신혼여행지로 인기였다. 산장에서 방 청소하고 손님들 짐을 들어주는 일을 시작했다. 신혼부부들은 팁을 넉넉히 줬다. 한 번에 2000~3000원은 기본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모아둔 팁만 50만원을 넘겼다. 월급의 10배였다. 그 돈을 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구둣방에서 인생 멘토를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 제화 업계 판도는 금강제화, 에스콰이어, 엘칸토 순이었다. 그 뒤를 잇는 게 ‘케리부룩’이었다. 케리부룩에 납품을 하던 ‘참스제화’라는 곳에 취직을 했다. 거기서 인생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전만길 사장님을 만난 거다.


20년 이상 구두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전 사장님에게 ‘최고의 기술이 뭡니까’ 질문한 적이 있다. ‘미점(美點)을 볼 줄 알고 만들어낼 줄 아는 게 최고다.’ 그 대답을 듣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기술들은 누구나 연습하고 훈련하면 따라올 수 있는 것이란 말이었다. 대신 ‘미의 포인트’를 볼 줄 아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구두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미점’이 항상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오늘 잘 팔리는 구두가 내일도 잘 팔리라는 보장이 없다. 전 사장은 그때 평생 풀기 어려운,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줬다.” 

출처: jobsN
로열티 주는 회사에서 로열티 받는 회사로 성장한 바이네르.

로열티 주는 회사에서 로열티 받는 회사가 되기까지


참스제화에서 5년을 보내고 나자 케리부룩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제화부문 동상까지 거머쥘 정도로 김 대표의 실력은 빼어났다. 하지만 그는 생산라인에 머물고 싶진 않았다. 생산라인에 있으면 20켤레 남짓한 물량을 담당하게 되지만 관리직을 맡으면 2000켤레, 2만켤레의 신발을 총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졸에게 생산관리를 맡기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린 결과 ‘포장반’을 거쳐 ‘검수반’까지 옮겨갈 수 있었다.


-너무 깐깐하게 검수해서 동료들에게 밉보이기까지 했다던데


“공장 기술자 100여명이 ‘우리를 괴롭히는 김원길을 자르라’고 사장님에게 요구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사장님은 나를 자르지 않았다. 깐깐한 검수 덕에 제품 완성도가 높아졌단 걸 인정해 준 거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백화점 영업을 뛰며 회사 매출을 확 올린 적도 있다. 1989년 일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인천백화점에서 매장을 빼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담당자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어렵게 입점이 성사됐던 백화점인지라 오기가 나더라. 바로 사장님실로 들어가서 백화점이 원하는 수준으로 매출을 올려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당시 케리부룩의 인천백화점 월매출은 600만원 수준이었다. 다른 업체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백화점을 찾아가 월매출을 1억까지 올려놓겠다고 선언했다. 돌아서서 후회도 조금 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나 다름없지 않나.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반값 특가 세일은 기본이고 ‘케리부룩 CM송을 부르면 구두를 그냥 드리겠다’는 홍보도 했다. 백화점 허가를 받고 마이크까지 활용해서 홍보를 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1억1000만원까지 매출이 올랐다. 이후 ‘영업의 달인’이란 별칭까지 얻게 됐지만 나에 대한 시기와 모함도 커졌다. 동료들에게 실망했고 더 이상 회사를 다닐 마음이 안 생기더라. 사표를 던졌다.”

-로열티 주던 회사에서 받는 회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1994년부터 ‘안토니제화’라는 상호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컴포트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구두 박람회 ‘미캄’에 직접 가서 ‘바이네르’ 한국 독점판매 계약을 성사시켰다. 중년 이상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만든 컴포트화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몇천 족으로 시작한 수입 물량이 몇만 족으로 늘었다.


그러다 악재가 터졌다. 2002년 바이네르 회장이 타계하면서 이탈리아 본사와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 경영을 물려받은 바이네르 회장의 아들이 구두 제조 본연의 사명에 집중하기 보다 회사 몸집을 불려 유럽과 홍콩 시장 상장에만 신경을 썼다. 게다가 국내 다른 수입사들까지 바이네르 라이선스 경쟁에 뛰어 들었다. 콧대가 높아진 본사는 라이선스 비용을 터무니없이 올렸다. 서서히 바이네르 관련 사업을 접을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고 유럽 경기가 악화되자 이탈리아 바이네르의 상황이 나빠졌다. 투자자들이 너도 나도 손을 떼니 자금난을 겪게 된 거다. 50억을 투자해서 국내 바이네르 브랜드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2주 후에 홍콩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더라. 그렇게 2011년 바이네르 브랜드를 인수하고 2015년에 아예 사명도 ‘바이네르’로 바꿨다.”

출처: 바이네르 제공
김 대표는 여름이면 직원들과 함께 청평 등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이탈리아 출장 길에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기도 한다.

“‘언제 그만둘 거야’라는 말 들을 때 직원들이 가장 좋아한다”

김 대표는 현재 계열사 직원들까지 모두 합쳐 300여명의 직원들과 일하고 있다. 명확한 사훈도 내걸었다. ‘세상을 아름답게/사람들(인류)을 행복하게/그 속에서 나(우리)도 행복하게’라는 문구가 담긴 액자가 김 대표 방뿐만 아니라 공장 곳곳에 걸려 있다. 김 대표는 직원들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직원 복지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게 있나


“우리 회사는 ‘불경기’라는 단어를 금기어로 삼고 있다. 구두가 잘 안 팔린다면 그건 순전히 우리가 구두를 잘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런 마인드가 직원들 각각에게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개개인의 복지, 개개인의 행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을 위해서 직원들을 잘 놀게 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다. 직원들과 여름이면 수상스키,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다닌다. 이탈리아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인데 함께 가는 직원들을 동반해서 알프스에서 스키 타고 돌아오기도 한다. 본사 안마당에는 직원들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수상스키용 보트 여러 대를 비치해 놓기도 했다.”


-15년 근속자들에게만 대리점 운영권을 주는 이유가 뭔가


“내 목표는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사장’으로 만드는 거다. 현재 전국에 18개 대리점이 있는데 모두 15년 이상 장기 근속자들에게만 운영권을 줬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에게 ‘언제 일 그만둘 거냐’고 물으면 다들 얼굴이 밝아진다. 대리점 운영을 제안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15년 이상 장기 근속자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장을 배출하기 위해 근속 연수는 10년 수준으로 내릴 계획도 가지고 있다. 직원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만드는 신발을 신는 분들까지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한다.”


글 jobsN 박가영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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