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평 가게에서 히트 친'만원에 무제한' 아이템
평택 통복시장 '공간의 공감'
전통시장에 자리 잡은 보드게임 아지트
보드게임 덕후→체스 강사→창업
2000년대 초반 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보드게임방’. 3~4명의 사람이 둘러앉아 부루마블·젠가·할리갈리 등의 게임을 하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신림·신촌·홍대에는 수십개씩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보드게임방은 모바일·PC게임에 밀려 사라졌다.
‘공간의 공감(이하 공공·www.facebook.com/tbgonggong)’ 김관제(30) 대표는 전통시장 속에 '보드게임방'을 부활시켰다. 6월 24일 평택 통복시장에 문을 열었다. 보드게임을 즐기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아날로그 붐’에 편승한 가게가 아니다. 김 대표는 자신의 관심사를 직업으로 삼은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보드게임 덕후’였다.
“누나가 2명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누나들과 보드게임을 자주 했어요. 보드게임은 3~4명이 하기 딱 좋거든요. 집에 보드게임이 가득했고, 수업이 끝나면 문구점에 들러 최신 보드게임을 둘러보는 게 취미였어요.”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보드게임 동아리 겸 회사를 차린 적이 있다. 창업 직전까지 체스 게임 선수이자 강사로 활동했다. 보드게임지도사 자격증 1급, 국제 체스 트레이너 자격증을 갖고 있다.
'공공'의 게임비는 1시간에 3000원, 하루 종일 만원에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 이제 막 시작한 가게이지만 반응이 심상치 않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도 않았는데 보드게임 동아리에서 이곳을 단체로 찾는다. 일주일 1~2번씩 찾는 단골손님도 생겼다. 10평(약 33㎡)짜리 공간, 단 3개 테이블에서 한달만에 250만원 매출을 냈다. 처음에는 음료만 사가는 손님이 많았다. 이젠 게임비에서 매출이 더 많이 난다.
보드게임이 지닌 재미를 극대화하는 콘셉트
‘공공’은 평택 통복시장 안쪽 주단골목에 있는 ‘청년숲’에 자리 잡고 있다. 재래시장과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한 정부 사업인 ‘전통시장 청년몰’ 중 하나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인테리어 비용과 임차료 일부를 지원한다. 청년몰에 입점한 청년 상인은 1년 동안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이후 5년 동안 한달에 40만원을 내고 장사를 할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는 차원이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낙후된 지역에 개성있는 소규모 상점이 들어서면서 '핫플레이스'가 되고, 대형 프랜차이즈와 유명 기업이 진출해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동네를 떠나는 현상을 말한다.
청년들이 큰 자본금이 없더라도 아이디어만 있다면 창업할 수 있다. 늙어가는 재래시장은 청년들의 젊은 감각으로 활기를 되찾을 수 있다. 김 대표는 이곳에 둥지를 튼 20명의 청년 상인 중 한명이다.
‘공공’에서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 종류는 50여개. 아직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류가 많지는 않다. 매달 보드게임을 구입해 개수를 늘리고 있다.
"다양한 장르의 보드게임을 들여오고 있습니다. 할리갈리나 젠가, 부루마블은 극히 일부예요. 보드게임 강국인 독일을 보면 카드·타일·경매·1:1 대결·전쟁·주식 거래 등 장르가 무수히 많습니다.”
‘보드게임’은 아날로그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스포츠적인 재미’도 있다. 상대의 수를 읽으며 공격하고 방어한다. 때론 도발하고 역습하며 경기를 반전시킨다.
‘공공’의 콘셉트는 보드게임이 가진 매력을 극대화 한다. “기존 보드게임방은 밝고 왁자지껄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벽을 먹색으로 칠했고, 조명도 어둡습니다. ‘아메리칸 펍(미국식 맥줏집)’이나 ‘아지트’ 느낌이에요. 실제 바둑 기원이나 체스 모임에 가면 다들 집중하느라 조용하거든요.”
보드게임에 재미를 더해주는 장치는 여럿 있다. 이곳에선 맥주와 칵테일을 판다. ‘게임에는 술’이라는 콘셉트다. 칵테일은 그냥 팔지 않는다. 둥근 플라스크에 칵테일을 담아준다.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약'과 비슷한 콘셉트다. 색깔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빨강은 체력, 파랑은 지능, 노랑은 행운을 뜻한다. 자칫 칙칙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또 메뉴판과 영수증은 ‘비행기 1등석 티켓’으로 만들었다. 좌석표는 계산서로 쓴다. 포인트 색은 '민트색'. 메뉴판·물병·유니폼·장신구 등은 모두 민트색이다.
창업 초기에는 고객들이 방문했을 때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후기를 남겨 입소문이 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공공'은 후기를 남기기 좋은 장치들을 갖고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보드게임 만든 보드게임 덕후
‘공공’에는 ‘Since 2004 CTRL’이라 쓰여있다. 김 대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4명과 함께 만든 창업 동아리 이름이다. 보드게임을 즐기기만 하지 않고 기획·개발 했다. “게임에 필요한 4요소를 의미하는 실력(Capability), 속임수(trick), 규칙(rule), 운(lucky)을 뜻합니다.”
김 대표가 다닌 청담정보통신고등학교는 특성화고다. 당시 ‘비즈쿨(BizCool)’ 운영 시범학교였다. 비즈쿨이란 학교 교과과정에서 창업·사업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5~6개 보드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로망스’, ‘사라다’ 같은 일본어 잔재를 바로잡는 카드게임도 있었고, 4명이 할 수 있는 장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학도 보드게임 관련 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보드게임학과는 없었습니다. 보드게임 회사에 찾아가 개발자와 진로 상담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비슷한 학과에 가기로 했습니다.”
2006년 공주영상대 모바일게임학과에 진학했다. 김 대표는 군대를 다녀온 후 보드게임산업협회에 메일을 보내 ‘보드게임산업에 종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곳에서 보드게임지도자 양성과정을 듣다 ‘마인드 체스’라는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2009년 입사해 6년 동안 체스 선수와 강사로 활동하며 세계대회에 출전했다.
전통시장에서 청년상인으로 출발
“퇴사 직전 1~2년 정도 슬럼프를 겪고 있었어요. 체스대회도 준비해보고, 체스 선수·심판도 양성했습니다. 체스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처럼 보드게임을 다뤄보고 싶었어요. 기술이 발전할수록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짙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양극화가 심해진다고 할까요. 스마트폰으로 혼자서 편리하게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한 갈증이 생깁니다. 이 시장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 높아질 거라 봤습니다.
창업에 관한 책을 읽고 강연도 들으러 다녔습니다. 마침 전통시장에 청년들이 창업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창업 동아리를 함께 했던 친구들도 김 대표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했다. 친구들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네가 한다면 나도 한다’는 반응이었다. 김 대표는 자신감을 얻고 2016년 7월 퇴사 후 본격적으로 창업을 준비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체스를 가르치며 한달 100만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 대표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운영하는 ‘청년창업 및 가업승계 아카데미’를 들었다. 2박 3일 동안 창업 교육과 컨설팅을 받았다. 창업 아이템 분석, 사업 타당성 검토, 창업계획서 쓰기, 마케팅·판매전략, 식품위생법 등을 공부했다. 김 대표는 우수 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있는 우수 전통시장에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 수원 영동시장 28청춘, 서울 구로시장 영프라자, 이대 스타트업 상가 등을 돌아다니며 가게 자리를 알아봤다.
“세 가지를 따져봤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 중요했습니다. 또 공방을 운영하는 청년 상인이 많은데 저희가 함께 어울리기 힘들 거라 봤습니다. 좀 더 다양한 가게가 모인 곳에 있어야 보드게임 펍이 잘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지막으로 청년상인이 모여 마을을 이룰 수 있는지를 봤어요. 서로 상생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평택 통복시장이 가장 적합했어요.”
평택 통복시장 청년숲에 들어가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사업계획서를 쓰고 발표를 준비했다. 창업 교육을 들을 때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탈락하고 말았다. 김 대표와 동업자 친구들은 사업평가단을 찾아가 어떤 점을 보완해야할 지를 물었다. 평가단 의견이 '기존 사업과 차별화돼 새롭다'와 '기존 사업과 이질적이다'로 갈렸다고 했다. 대부분 공방이나 먹거리 사업을 하기 때문이다.
“'마니아'나 '덕후'만을 겨낭한 듯하다는 평을 들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먹거리 메뉴에도 신경을 써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됐습니다. 이때 저희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저희가 ‘그냥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다면 장애물 앞에 쉽게 좌절했을 겁니다. 우리가 이 사업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함께 팀으로 가도 될지를 고민하는 계기였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2주 후 ‘추가합격’ 소식을 들었다. 인테리어 비용 1000만원 중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400만원은 공동창업자인 친구 2명이 부담했다. ‘청년창업 및 가업승계 아카데미’에서 우수 학생으로 뽑힌 김 대표는 경기신용보증재단에서 약 2% 이자율로 200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창업할 때 동업자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한 친구들이니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성격과 성향을 알아요. 누가 ‘아’하면 서로 ‘어’한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믿음이 없었으면 창업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
'스페인의 이비자섬'을 꿈꾼다
‘공공’이 지닌 강점은 ‘보드게임 전문가’들이 모였다는 점이다. 보드게임 상자를 쌓아놓고 음료만 가져다주는 주인이 아니다.
“손님들에게 어떻게 해야 보드게임을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보드게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어요. 보드게임방은 사라졌지만 보드게임 시장은 계속 성장했어요. CEO이자 게임 기획자로 고민할 거리가 많습니다. 내실을 다지려면 연구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나중엔 직접 보드게임을 기획·개발할 생각이다. “요즘 명절에도 가족이 다 함께 모이기 힘들잖아요. ‘혼밥(혼자먹는 밥)’이 자연스러운 시대이기도 해요. 이럴 때일수록 ‘함께 모여 웃고 떠들고 싶은 감성’을 지키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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