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싸구려 디자인" 보급형 체어맨 H와 정신차린 체어맨 W

[체어맨 H│2008-2011]

2008년, 세간의 관심 기대를 한몸에 받은 '2세대 체어맨'이 등장했습니다. 다음 세대 모델이 등장하면 전작은 단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죠. 특히나 체어맨은 출시된 지 이미 10년이나 지난 1세대 모델이었기 때문에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두 예상과는 달리 뉴 체어맨의 생산은 계속됐어요.

2세대 체어맨의 이름이 '체어맨 W'로 결정되자 쌍용차는 기존 '뉴 체어맨'을 '체어맨 H'로 바꿔 라임을 맞추고 병행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GM 대우에서 신형 '마티즈 크레이티브'를 출시한 뒤 구형 '올 뉴 마티즈'를 '마티즈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병행 판매했던 것과 동일한 사례죠.

서브네임 H는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인물을 뜻하는 'High Owner'의 앞 글자에서 따왔고, 이름처럼 기존에 기사를 두고 타는 쇼퍼드리븐보다는 직접 운전하는 오너드리븐 성격을 강조했어요. 말이 좋아 오너드리븐이지 새로운 플래그십으로 자리 잡은 체어맨 W와의 간섭을 피하고자 의도적인 급 낮추기가 자행된 모델이었습니다.

직전 모델에서 에쿠스와 경쟁하기 위해 앞다투어 탑재한 첨단판 장비와 뒷좌석 관련 옵션이 대거 삭제됐고, 그에 맞춰 가격이 내려가면서 그랜저, SM7 같은 준대형차와 경쟁하게 됐죠. '이게 있네?' 싶은 옵션이 남아 있고, '이게 왜 없냐...' 싶은 옵션이 없어졌어요. 크롬을 배제한 휠과 트렁크 끝에 붙은 H 뱃지를 제외하면 뉴체어맨과 외관상 차이는 없었기 때문에 체어맨 H를 구매한 오너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기존에 뉴체어맨을 소유했던 오너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신차 개발비가 부족한 쌍용으로서는 라인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이지만, 가뜩이나 체어맨 W가 등장하면서 뉴 체어맨조차 반 체급 아래로 인식되는 것도 서러운 판국에 아예 보급형 체어맨 이미지까지 씌워진 것이니까요. 한때 에쿠스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국산 최고급 차'로 체어맨을 선택했던 기존 소비자는 불편한 심기를 숨길 수 없었던 것이죠. 체어맨이라는 이름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급은 여전했죠. 오랜 기간 쓰이며 검증된 내구성 좋은 파워트레인과 유압식 서스펜션만으로도 고속 주행에서의 안정감과 부드럽고 안락한 승차감은 그대로 제공했습니다. 3.6L 라인업과 몇몇 옵션이 삭제된 것만 섭섭했을 뿐, 본질은 여전히 '편안한 대형 세단'이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가격에 만족스럽게 운행할 수 있는 차였어요. 오히려 각종 첨단 사양이 빠지면서 전자 계통의 잔고장이 현저히 줄어든 것도 소소한 장점이었죠.

출시 다음 달인 2월 한 달 판매량 '600대'. 뉴 체어맨의 판매량을 떠올리면 선방했지만, 같은 기간 가격이 비슷한 그랜저는 5천여 대가 넘게 팔렸으니 경쟁 차에 비하면 역시나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습니다. 체어맨 W가 출격한 이후에는 아예 체어맨 W보다 못한 판매량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체어맨 H 뉴 클래식│2011-2015]

모두가 이제 그만 놓아주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여전히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체어맨은 또 한 번의 대규모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뉴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2011년 등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리무진 컨셉트카가 떠오르는 전면부는 둥근 반달 형태의 헤드램프 디자인과 그릴에 각을 세워 인상을 한층 날카롭게 다듬었고, 유행이 지난 투톤 대신 원톤으로 깔끔하게 칠해 더 늘씬해 보이는 측면은 새로운 디자인의 17인치 휠로 신차 느낌을 더했습니다.

후면은 작은 리어 램프를 트렁크까지 연장했고, 번호판을 다시금 위로 올려 초기형 모델과 비슷해졌어요. 전반적으로 전적의 중후함은 덜어내고 오너형 세단으로 한층 거듭난 분위기였죠. 다만 전작에 비해 딱히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는 외관 때문에 호불호가 심히 갈렸습니다.

전작보다 확실히 젊어지기는 했지만, 무게감을 덜어내면서 아예 보급형 체어맨의 상징이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시장의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죠. 영화 <더 셀>의 한 장면을 오마주 한 TV 광고를 선보였던 게 기억에 남네요.

변화는 실내에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초기형의 구성을 답습해 첨단화만 이루었던 이전 모델과 달리, 디자인을 대폭 수정하면서 신차에 탔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했어요. 체어맨 W와 비슷한 구성의 센터페시아는 하단에 있던 인포테인먼트 모니터를 상단으로 올려 편의성을 높였고, 체어맨 H 시절 생긴 공갈 버튼 대신 필요한 기능만 이어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여기에 체어맨 W와 동일한 디자인인 스티어링 휠, 화려한 계기판은 중앙에 자리한 단색의 LCD 정보창을 이용해 주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안내했죠.

저는 체어맨을 비롯한 쌍용차에서 처음 접한 기능인데, 주차나 출차할 때 앞바퀴가 비뚤어져 있으면 정렬 상태를 그래픽으로 알려주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쌍용 측에서 보기에도 직전 모델은 너무하다 싶었는지 앞 좌석 통풍 시트와 블루투스 오디오, 후방 전동 블라인드 같은 편의 옵션을 채워 넣으면서 이제서야 '하이 오너'를 위한 차로 거듭났습니다. 나중에는 연식 변경을 통해 AV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열두 개 스피커에 하만카돈 프리미엄 사운드를 제공하기도 했어요.

이 무렵 줄곧 써 오던 싱글 암 와이퍼도 일반적인 더블 암 와이퍼로 변경됐죠. 여전히 그대로인 직렬 6기통 엔진은 출력을 살짝 손봐 효율을 높였고, 옛날 대형차 특유의 푹신하고 기분 좋은 승차감을 간직해 가족과 함께하기에 훌륭했어요. 여러모로 상품성을 개선해 갈수록 젊어져만 가는 준대형 세단의 피로감을 느꼈던 중장년 소비자에게 어필했지만, 급속도로 변화하는 트렌드에 구형 차대와 파워트레인으로 대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2015년을 끝으로 단종됐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범택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차였어요. 단정하고 보수적인 디자인과 뒷좌석 위주의 안락한 승차감, 검증된 내구성까지. 엔진만 어떻게 한다면 고급택시로 제격이었을 것 같아요. 독일에는 오래된 E클래스가, 일본에서는 오래된 크라운이 굴러다니는 것처럼요.

1세대 체어맨 그리고 체어맨 H는 벤츠 안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훌륭한 차로 평가받는 W124 E클래스를 기반으로 한 만큼 완성도가 높은 모델이었습니다. 이렇게나 운이 없을까 싶은 쌍용차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수명을 늘려나간 탓에 플래그십의 위엄이 희석되어 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만, 그 시절을 풍미했던 체어맨의 위상은 2세대 W가 성공적으로 이어받았으니 그나마 다행히 아닐까 싶네요.

한편 파워트레인은 오랜 기간 벤츠, 쌍용의 수많은 차종에 쓰이며 내구성이 검증됐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자잘한 문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대의 최고 수준의 첨단 사양으로 휘감아 경쟁력을 갖췄지만, 이런 차들이 으레 그렇듯 연식이 쌓이며 전자 계통의 잔고장에 시달렸습니다. '뉴 테크'부터 적용된 에어 서스펜션이 종종 주저앉기도 했어요. 물론 에어 서스펜션이라는 것 자체가 소모품에 가깝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수명을 다한 것일 뿐이었지만...

이 외에도 수입 부품을 많이 사용해 부품 가격이 여타 국산 차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 이마저도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까지. 중고차 구매하실 분은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특히 외장 부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네요.

[체어맨 W│2008-2011]

다시 2008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뀐 이후 출시된 쌍용차의 주력 제품 라인업이 줄줄이 실패해 나가는 와중에도 '이 차'에 대한 기대와 관심만큼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서 뉴 체어맨이 체어맨 H로 몸을 낮추고, 이를 발판 삼아 등장한 2세대 '체어맨 W'는 'World Class(월드 클래스)'라는 의미로 붙여진 서브네임 W와 함께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80년대 만들어진 벤츠의 차대를 오랫동안 개량해 써오며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번에는 체어맨 W를 위해 자체 개발한 플랫폼을 적용했고, 전장은 소폭 짧아졌지만, 폭을 키워 이전보다 훨씬 듬직해진 인상이 돋보였죠. 각을 살린 전면부는 전작의 초롱초롱한 인상을 지워 내고 보다 진중한 인상으로 거듭났습니다.

뉴 체어맨과 마찬가지로 헤드램프 하단에 LED 방향 지시등을 배치해 고급스러움을 더했는데, 당시만 해도 전면부에 LED가 쓰이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유난히 멋져 보였어요. 지금도 이런 사소한 차이로 차급이나 트림을 구분하기도 하죠.

후륜구동 특유의 짧은 프론트 오버행과 긴 휠 베이스가 돋보이는 측면은 국산 세단 최초로 19인치의 거대한 휠을 장착해 여느 수입 세단 못지않게 고급스러웠습니다. 후면 역시 면발광을 더한 LED 리어램프, 대구경 대형 머플러로 멋을 냈어요.

벤츠 S클래스의 느낌이, BMW 7 시리즈의 향기가 스치기도 하는 외관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단정하게 꾸며져 체어맨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처음부터 유럽 물을 먹었던 모델답게 불필요한 장식은 최대한 배제하면서 자칫 심심해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특유의 풍채와 덩어리감으로 채워 그 존재감이 충만했습니다.

뒤이어 나온 2세대 에쿠스가 화려한 장식을 덕지덕지 붙이고 나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느껴지실 거예요. 개인적으로 에쿠스를 타시는 분과 체어맨을 타시는 분의 성향이나 느낌이 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요. 체어맨 W 역시 그런 오너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저의 선입견이지만 각 브랜드와 차종, 브랜드의 성향에 따라 오너가 생기거나 역으로 오너의 성향에 따라 브랜드가 차를 맞추는 일이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궁전 같은 실내]

비교적 수수한 외관에 비해 실내는 최고급 차에 걸맞은 온갖 고급 소재로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차분하고 단정한 블랙과 화사하고 고급스러운 베이지, 그레이톤의 내장 색상을 입맛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고, 상위 모델은 도어트림과 A필러 천장을 온통 스웨이드 소재로 마감해 고급스러움이 배가 됐죠.

폭넓게 두른 우드 그레인과 도어트림의 '시트 조절 장치'를 보면 언뜻 신형 S클래스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어요. 특히 대시 보드를 가로지르는 '크롬 에어벤트'는 탑승객을 향해 바람을 직접 쏘는 것이 아니라 무풍 에어컨처럼 은은하게 바람을 뿜어 쾌적한 실내를 유지했는데요. 이건 체어맨 W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었죠.

은은한 컬러의 계기판은 중앙에 자리한 컬러 LCD 정보창으로 순간 연비, 장애물 알림 등의 각종 정보를 깔끔한 그래픽으로 전달했습니다. 두툼한 4 스포크 스티어링 휠은 옛스러운 하단 리모컨을 드디어 버렸고, 수동 모드에서 기어 단수를 조절할 수 있는 시프트 버튼까지 새롭게 더했습니다.

+,-로 레버를 직접 움직이는 방식에 비해 몸동작이 거추장스럽지 않았고, 언뜻 보면 패들 시프트처럼 이용할 수 있을 듯했지만 반응이 느려 쓰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쉐보레 엄지 버튼과 쌍벽을 이루게 되는 '수동 변속 토글'과 함께 이럴 거면 없어도 된다는 평가를 받았죠. 애초에 경쾌한 주행을 하는 차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계기판과 동일선상에 배치해 시인성을 높인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보기만 해도 시원스러운 8인치 터치스크린 / 17개 스피커에 7.1 하만카돈 프리미엄 사운드로 풍부한 해상력을 선사했습니다. 40GB 내장 하드디스크를 갖춰 좋아하는 음악이나 동영상을 저장해 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재떨이가 아닌 i-Drive를 모방한 다이얼과 각종 버튼이 자리했는데요.

이 다이얼로 주행 중 모니터에 손을 올리지 않고도 다양한 기능을 조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디오 볼륨만 조절할 수 있었어요. 꾸준히 이어지던 아날로그시계도 디지털로 바뀌어 공조 장치 화면과 합쳐졌습니다. 날짜와 요일 등 표시되는 정보는 많아졌지만 아날로그시계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이 사라진 것은 아쉽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버튼 시동 스마트키 / 국내 최초 앞 좌석 무릎 에어백 / 운전석 요추 마사지 시트 / 덜 닫힌 문을 스스로 닫아주는 '소프트 클로징'과 차간 거리 조절이 가능한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 등 당대 넣을 수 있는 편의 장비는 몽땅 들어갔죠. 없는 것부터 찾는 게 빠를 정도였어요.

뒷좌석 역시 말이 필요 없었죠. 질 좋은 가죽으로 감싼 푹신한 시트와 말랑한 헤드레스트는 소비자의 입맛을 저격했습니다. 열선 및 통풍 기능과 마사지 시트, 상석에 제공되는 우드 테이블, 전동식 커튼과 리클라이닝 등 전작의 호화로운 편의 사양은 물론, 비필러 에어벤트가 추가로 마련돼 더욱 쾌적한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뒷좌석 모니터는 평소에는 깔끔하게 숨어 있다 필요할 때만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어렸을 때 이게 왜 이렇게 멋져 보이던지. 다만 의외로 공간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시트가 두툼해진 탓인지 뒷좌석이 체감상 좁아졌다는 의견이 많았고, 뒷좌석 승객의 시야 확보를 위해 높게 설정한 시트 포지션도 오히려 헤드룸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죠. 분명 차가 커졌고 휠베이스 역시 많이 증가하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의아한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뒷좌석에 중요한 손님을 모시는 이 차의 역할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한 단점이었죠. 그 아쉬움은 리무진 모델이 달래줬습니다. 이번에도 전장과 휠 베이스를 30cm가량 늘린 스트리치드 리무진을 함께 선보였는데, 은은한 무드 램프와 퍼스트 클래스의 벽을 전용 시트로 전작보다 더 고급스럽고 안락한 승차 환경을 선사했습니다.

외관도 연장된 부분을 바디 컬러로 처리해 일반 모델과의 차이가 유난히 두드러졌는데요. 유리창이 매끄럽게 이어져 나름대로 일체감이 있었던 전작의 리무진 모델보다 뚝 끊어진 모습이라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단단한 기둥을 세워 탑승객을 더 안전하게 지켜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다음화에서 계속되며 멜론머스크의 이용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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