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칼럼]통일을 ‘신 포도’ ‘못 먹는 감’ 취급할 일인가
당위-현실 괴리 속 南北 南南 ‘정치化’
외면하면 길 잃고 집착하면 멀어질 뿐
정작 걱정할 것은 꺼져가는 北 비핵화
평생 통일운동가를 자처하던 그로서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와 남한의 ‘자유의 북진’ 주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존재론적 위기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는 지나온 삶과는 180도 다른 주장으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부정에 앞서 반성과 성찰은 없었다. 대신 현실론자의 기민한 변신만 두드러졌다. 늘 적정선을 넘는, 그래서 스스로 신뢰를 깎아 먹는 진보좌파의 과잉 부채질 경향을 새삼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한데 그 구설홍보(노이즈 마케팅) 효과는 용산의 자동반사적 대응 탓에 의외로 커졌다. 불순하다고 여겨지는 소리라면 참질 못하는 보수우파는 맹렬하게 반응했다. 특히 대통령실 관계자가 멀리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까지 직접 국무회의에서 반박하고 나섰다. 정부 일각에선 “백수(白手) 정치인의 넋두리에 대꾸할 필요 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지만, 일찍이 윤석열표 통일 구상을 내놓으면서 ‘사이비 지식인과 선동가’ ‘반자유 반통일 세력’과의 투쟁을 역설했던 대통령이니 맞대응의 유혹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통일 논쟁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갈수록 국민 관심이 시들어 가던 문제지만 일단 정치의 풀무질이 더해지자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사실 남북 관계에서 통일은 먼 미래의 기약으로 넘겨둔, 그러면서도 늘 악용을 경계하는 동시에 언제 닥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변수였다. 이런 당위와 현실 간 괴리 때문에 남북 어느 쪽이든 통일을 얘기하면 할수록 상대에 대한 적화통일 또는 흡수통일의 의심은 커진다.
남남(南南) 관계에서 통일은 더욱 난감하고 예민한 문제였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통일론은 진퇴를 되풀이했다. 남북 관계가 괜찮던 시기에는 혹여 북측의 심기를 거스를까 통일 대신 평화를 앞세우며 뒷전으로 밀어놓았지만, 남북 관계에 찬바람이 돌면 대북 공세 차원에서 통일을 전면에 내세우곤 했다. 사실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거나 ‘통일 대박’을 외친 것도 꽉 막힌 남북 관계의 현실에서 나온 궁여지책인 측면이 컸다.
현 정부의 통일 독트린도 마찬가지다. 국내 사상전과 대북 심리전, 국제 여론전이란 3대 전략 아래 내놓은 공세적 통일론은 전임 정부의 ‘가짜 평화’를 공격하기 위한 대내용이기도 하다. 당초 정부는 올해로 30년 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의 수정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여야 합의로 마련돼 진보·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이어진 통일 방안을 대체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강화된 여소야대의 정치 현실 속에선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북한의 선수 치기도 정부의 통일 방안 수정 의지를 꺾는 요인이었다.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은 국제사회의 비핵화 요구를 거부하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대외 전략의 부산물이다. 북한은 2년 전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하고 지난해 핵 보유를 헌법에 명문화한 데 이어 올해 통일 관련 표현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동족이 아닌 한국에는 언제든 핵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의 신뢰성’을 한층 높이는 북한식 억제전략인 셈이다.
작금의 국제 정세에서 요원해지는 통일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주목할 것은 점점 멀어지는 북한 비핵화의 현실이다. “비핵화는 이미 끝난 문제”라는 러시아나 비핵화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는 중국은 둘째치더라도 ‘사실상 핵무기 소유 국가’ 북한과의 외교를 강조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의 문제 제기, 그리고 미국 민주·공화 양당의 정강정책에서 사라진 비핵화 문구가 향후 어떻게 드러날지를 더 걱정해야 한다.
통일은 외면할 수도 없지만 집착하면 멀어질 뿐이다. 그간 화해협력의 초입에만 머무르다 번번이 북한에 뒤통수를 맞아온 좌파도, 아예 그 단계도 진입하지 못한 채 요행수로서 통일만 외치는 우파도 마찬가지다. 얄팍한 태세 전환이나 고리타분한 자기최면으론 안 된다.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라고 지레 외면하거나 먹을 수 없는 감을 앞에 두고 심술부리듯 찔러나 보자는 식이어선 번번이 북한에 휘둘리며 우리의 내상(內傷)만 깊게 할 것이다. 때아닌 통일 논쟁에 매달릴 게 아니라 꺼져가는 비핵화를 되살릴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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