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의 탄생
1998년의 어느 날이다. 베어스가 OB로 불리던 마지막 해다. 라커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주장의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인다. 31살의 고참 포수 김태형이다.
“이봐, 나 좀 잠깐 보자.” 새로 온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를 한 켠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커튼을 친다.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 속에서 뭔가 일이 있었다. 상황은 그렇게 단번에 정리됐다. 개성이 강한 용병이 그날부터 고분고분해졌다.
아스라한 전설의 시작이다. 훗날 튼동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다. 튼동은 커튼 + 감동님의 합성어다. 비슷한 류의 단어로 각동, 눕동 등이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다. 올해 2월이다. 본인이 밝힌 사건의 전말이 있다. 해설위원 데뷔를 준비할 때다. 미국 애리조나 스프링캠프를 방문했다. SBS Sports 중계팀과 동행했다. 이동 중에 정우영 캐스터가 오래된 사건의 내막을 묻는다.
그런데 뜻밖이다. 당사자는 튼동이라는 말을 모르는 눈치다. 한참 설명을 듣더니 ‘그런 게 있었냐’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사실 관계를 정정한다. “아니, 단둘이 커튼 뒤로는 안 갔지. 왜냐하면 괜히 잘못 데리고 갔다가….” 하면서 멋쩍게 웃는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때는 수훈 선수에게 (보너스 혹은 인센티브를) 나눠주는 게 있었어. 내가 주장이었는데, 선수들이 똑같이 돌아가면서 나누자 했는데, 야수 중에는 우즈가 거의 다 가져갔으니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렇게 못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너 잠깐 이리 와봐’ 해서 말했지. ‘감독님한테 얘기해서 다시는 너한테 티켓을 안 주도록 하겠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에게도 소리쳤지 ‘앞으로 우즈한테 얘기하는 X들은 나한테 혼날 줄 알아.’ 그랬더니 그다음부터 고분고분해졌지.”
정우영 캐스터가 다시 한번 팩트를 확인한다. “커튼 뒤로 끌고 간 건 아니구요?” 그러자 펄쩍 뛴다. “아이구, 보는 데서 그래야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고 갔다가, 두들겨 맞으면 어떻게 하라구. ㅎㅎㅎ”
하긴 체급 차이가 확연하다.
투명 커튼 1
감독 첫해(2015년)였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말이다. 창원에서 열린 다이노스전 때다. 게임이 잘 풀린다. 8-3으로 앞서던 8회였다. 무난한 승리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덕아웃 분위기가 쎄~하다. “야, 너 이리 와봐.” 심상치 않은 호출이다. 김재호 앞에 투명한 커튼이 드리워진다. 부동자세로, 눈도 못 마주친다. 묵직한 훈시가 이어진다. 이 장면은 중계 화면에 그대로 담겼다.
이유는 산책 주루였다. 2루 땅볼을 치고 1루까지 설렁설렁 뛰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에 설명이 뒤따른다.
“그라운드 위에서 힘든 기색을 보이면 안 된다. 그렇다고 질책한 건 아니다. 김재호를 야단치려고 했다면, 나중에 조용히 방으로 불러서 얘기했을 것이다. 경기 중에 그런 건 선수단 전체에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만큼 김재호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튼동)

투명 커튼 2
이번에는 2018년의 일이다. 대구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수비를 준비하던 때였다. 원정팀 벤치에서 호통이 터진다. 역시 그 멘트다. “야, 너 이리 와봐.”
포수 양의지가 즉각 불려 간다. 그리고 덕아웃 앞에서 열중쉬어 자세가 된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다.
추정되는 이유가 있다. 경기 내내 판정에 불만이 쌓였다. 직전 타석에서도 빠진 듯한 공을 스트라이크로 잡아줬다. 결국 삼진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게 언짢았다. 곽빈의 연습 투구를 일부러 놓친 것처럼 보였다. 포수 출신으로 눈치가 100단 아닌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포수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흔들린다.” 김 감독의 지론이다. 감정을 앞세우면 게임을 그르칠지 모른다. 더욱이 신인 투수를 끌고 가야 하는 상황 아닌가. 따끔한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또 있다. 자칫 문제가 커질 수 있는 장면이다. 의도적으로 공을 놓쳤다면, 그래서 심판을 위협한 것으로 보인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게 뻔하다. 감독이 먼저 손을 쓰는 게 낫다. 실제로 양의지는 이 사건으로 벌금 300만 원, 봉사활동 80시간의 KBO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1990년 정재호(OB 포수)의 비슷한 사건 때 10경기 정지에 비해서는 가벼운 처분이었다.

이웃집 커튼
2019년 잠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자이언츠와 경기에서 정수빈이 쓰러졌다. 상대 투수(구승민) 공에 등 부위를 맞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9-2로 앞서던 8회였다. 이 게임에서만 두 번째 사구다. 이로 인해 갈비뼈가 골절됐다.
홈 팀 감독은 잔뜩 화가 났다. 덕아웃을 뛰쳐나와 그라운드로 향한다. 이번 커튼의 대상은 상대 팀이다. 공필성 수석코치와 언성이 높아진다. 가해 투수를 향해서도 뭐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이 부분이 논란이 됐다. 베어스 측은 “야구 좀 잘할 수 없겠냐”는 식의 얘기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매체는 관계자의 말을 빌려 김 감독이 막말에 가까운 언사를 했다고 보도했다. “투수 같지도…”라는 워딩으로 표현됐다. 이로 인해 또 하나의 전문 용어가 탄생했다. 투.같.X.라는 줄임말이다.
김 감독은 며칠 뒤 상대 코치들(공필성, 주형광)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해당 투수에게는 욕설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공교롭다. 4년 만에 사건의 주요 관계자들이 다시 만났다. 커튼을 친 주인공이 바로 그 이웃집 감독으로 부임했다. 해당 선수는 현재 투수 조장이다. 취임식에서 축하 꽃다발을 전하고, 기념사진 촬영도 함께했다. 또 다른 언쟁 상대였던 당시 투수코치(주형광)는 곧 1군 메인 투수코치로 부임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커튼의 신비
흔히 말하는 맹장이다. 직설적이고, 강한 리더십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다.
2년 전 골든글러브 시상식 때다. 양의지가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로 뽑혔다. 소감을 말하는 자리였다. 주변의 감사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특히 “저를 키워주신 김태형 감독님께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라고 고개를 숙인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당시 소속팀(NC) 이동욱 감독을 빼놨다는 점이다. 시상식이 끝난 뒤에야 깨달았다. “너무 죄송하다. 단상에 올라가 김태형 감독님과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이동욱 감독님께도 감사한 마음”이라며 애프터 서비스를 해야 했다.
박건우도 두산 시절 커튼의 단골손님이다. 힘들다는 푸념 한마디에 곧바로 짐을 싸서 2군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달리 끈끈하다. 다이노스로 옮긴 뒤에도 여전하다.
“너무 자주 전화해서 귀찮아 죽겠다. 쓸데없이 보고 싶다는 말까지 한다.” KBO 최고의 카리스마도 푸념하게 만든다. 그의 커튼은 뭔가 신비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