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마당에 흔했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만 먹는 '황금 과일'

지금은 이름조차 낯선 비파나무 열매
비파나무 자료사진. / High Mountain-shutterstock.com

남쪽 바다를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과일이 있다. 노란빛을 띠며 길쭉하게 자란다. 단단한 껍질 안에 향긋한 과육이 들어 있다. 이름은 비파다. 익숙하지 않지만, 한 번 맛보면 기억에 남는다. 매장에서 흔히 볼 수는 없다. 계절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비파는 지금 딱 이 시기에만 먹을 수 있다.

비파는 아열대성 과일이다. 겨울에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어야 열매를 맺는다. 월동 기온이 -3도를 밑돌면 꽃눈이 얼어 죽는다. 이런 기후 조건을 갖춘 지역은 많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비파가 열리는 곳은 제주도, 전남 완도, 경남 남해가 거의 전부다.

특히 전남 완도는 비파의 주산지다. 군 단위로 재배 면적을 확대하며 지역 특화 작목으로 키우고 있다. 2024년 기준 완도군의 재배 면적은 71헥타르, 연간 생산량은 140톤 수준이다. 5월 중순부터 하우스 재배 비파가 먼저 수확되고, 6월에는 노지에서 자란 일반 비파가 출하된다.

겨울에 꽃 피우고 여름 문턱에 열매 맺는다

비파나무 자료사진. / TAMMY M JOHNSON-shutterstock.com

비파는 다른 과일과 생장 주기가 다르다. 11월부터 1월 사이에 꽃이 핀다. 겨울철 한복판이다. 이 시기에 꽃이 피고, 수정된 꽃자리에 열매가 생긴다. 이후 5~6개월 동안 서서히 자라 5월 말에서 6월 사이 수확된다. 과일 하나가 자라는 데 반년이 걸린다.

열매는 손바닥보다 작고 타원형이다. 색은 노란빛 또는 연한 주황색에 가깝다. 과육은 부드럽고 즙이 많다. 씨앗이 2~3개 들어 있으며, 크고 단단하다. 껍질은 얇아 쉽게 벗겨지고, 씹을수록 은은한 향이 입안에 남는다. 잘 익은 비파는 복숭아보다 향이 강하고, 살구보다 단맛이 깊다. 당도는 평균 12~13브릭스. 복숭아, 수박 등 여름 과일과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유통 기간은 훨씬 짧다. 껍질이 얇고 수분 함량이 높아 저장성이 떨어진다. 수확 후 며칠이 지나면 당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과육도 무른다. 이 때문에 생과 상태로는 생산지 인근에서만 소비된다.

생과, 가공, 차까지… 버릴 곳 없는 비파의 활용법

비파 씨 자료사진. / Subbotina Anna-shutterstock.com

비파는 껍질을 손으로 벗기거나 칼로 얇게 칼집을 내면 쉽게 벗겨진다. 씨는 크지만 과육이 넉넉하게 붙어 있다. 따로 조리하지 않아도 바로 먹을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씨앗을 삼키지 않는 것이다. 씨에는 ‘아미그달린’이라는 자연 독성 성분이 소량 들어 있다. 몸에 해를 줄 만큼은 아니지만, 씨는 피하고 과육만 먹는 게 좋다.

농가에서는 “비파는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말한다. 가공품으로도 다양하게 활용된다. 비파청, 비파잼, 비파주스, 비파주 등. 껍질과 과육을 함께 졸여 만들거나, 즙을 낸 후 당분을 더해 저장성을 높인다.

청으로 만들면 얼음물에 타 마시는 음료로, 주스로 만들면 단맛이 강조된 디저트용으로 활용된다. 샐러드나 카나페에도 활용되며, 고기 육수에 넣으면 은은한 단맛이 배고, 국화주에 넣으면 향긋한 과실주가 된다. 수분이 많아 바로 먹는 게 일반적이지만, 말려서 장기 보관하기도 한다.

잎도 쓰임새가 많다. 말린 비파잎은 약재처럼 차로 우려 마신다. 기관지염, 기침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은은한 향 덕분에 기호식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잎 뒷면에는 솜털 같은 유모 조직이 있어 햇빛과 해충으로부터 잎을 보호하는 구조를 가진다. 차로 우리면 이 부드러운 털 덕분에 향이 고르게 추출된다.

과일이면서 약재, 옛집 마당에서 자라던 나무

마당 비파나무 자료사진. / High Mountain-shutterstock.com

비파는 과일이기도 하지만 오래전부터 약재로도 쓰였다. 특히 비파잎은 한방에서 ‘노과엽’이라 불리며 기관지염, 기침, 천식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전해진다. 비파잎에는 아미그달린, 우르솔릭산, 사포닌, 폴리페놀 등이 들어 있다. 이 성분들은 항산화, 면역력 보조, 염증 완화 등에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육에는 베타카로틴, 비타민A, 칼륨이 풍부하다. 눈 건강, 피부 재생, 혈압 조절 등에 도움이 되는 성분이다. 열대과일처럼 향이 강하면서도 단맛 위주인 덕분에 아이들 간식으로도 어울린다. 한 번에 많이 먹기보다는 소량씩 즐기는 과일로 적합하다.

비파는 한때 마당 한켠에서 자주 자라던 나무였다. 제주도나 남해 바닷가 집들에서는 특별히 심지 않아도 자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농업이 대규모 단지화되면서 소규모 자생 수종은 사라졌고, 비파도 시장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최근 들어 비파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짧은 유통 기간, 한정된 산지, 낮은 생산량. 이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며 희귀성과 계절성을 갖춘 작물로 자리잡은 것이다. 대형 마트에서는 거의 유통되지 않으며, 대부분 산지 직거래를 통해 소비된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과일, 지금은 한국 남해안의 특산

비파 나무 열매 자료사진. / Viktor Kochetkov-shutterstock.com

비파는 원산지가 중국 남부다.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부터 재배되던 기록이 있으며, 이후 제주와 남해안을 통해 한국에도 자리를 잡았다. 제주에서 처음 자생한 비파는 일본계 품종과 섞여 현재까지 재배되고 있다.

지금은 완도군, 남해군, 제주도 등에서 주력 품종을 선별해 재배하고 있다. 농촌진흥청과 지역 농업기술센터는 품종 개량도 진행 중이다. 병충해에 강하고 당도가 높으면서도 유통이 가능한 품종을 목표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비파를 생과로 즐길 수 있는 시기는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1년 중 단 한 달 남짓에 불과하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한다. 저장성이 낮고 유통 기한도 짧아 마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열매는 상처에 약하고, 조금만 눌려도 당이 급격히 빠진다. 이 때문에 상품성이 낮고 유통이 어렵다. “왜 이렇게 귀한 과일을 잼으로 만들고 술에 넣냐”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생산자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아까운 과일이 썩어버린다”고 말한다.

비파는 남해안에서만 자라고, 계절이 짧고, 풍미가 뚜렷하다. 그 자체로 현재 한국 식탁에서 가장 계절감 있는 과일이다. 직접 만나는 게 쉽지 않아 더 기억에 남는다. 짧게 피고 금세 사라지는 계절의 흔적처럼,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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