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장빼기 <2> 김광현 그리고 박건우
9년 전 대구, 한여름 밤의 추억
벌써 9년이 지났다. 2015년 여름의 일이다. 야구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묘한 플레이 하나 때문이다.
대구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였다. 4회 말 2사 후, 박석민의 타구가 포수와 투수 사이를 힘없이 굴렀다. 투수와 1루수, 3루수가 모두 달려들었다. 서로 손을 내밀었고, 공은 누군가의 글러브 속으로 사라졌다.
이미 (1루에서) 타자를 잡기는 늦은 상황이다. 그때였다. 마침 홈까지 질주하는 2루 주자가 눈에 띈다. 투수 김광현이 몇 발짝 앞에서 최형우를 태그했다. 구심은 당연히(?) 아웃을 선언하고, 이닝이 종료됐다.
하지만 느린 화면 속에 진실이 드러난다. 공은 1루수 앤드류 브라운의 미트(글러브) 속에 있었다. 김광현은 빈손으로 태그 플레이를 했던 것이다.
찰나의 일이다. 당사자들은 몰랐을까? 글쎄. 아닌 것 같다. 덕아웃으로 철수하며 둘이 어깨동무를 한다. 그리고 공이 브라운의 손에서 떨어진다. 서둘러 줍는 동작, 김광현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큰 논란이 벌어졌다. 팬들은 ‘사기 태그’ 혹은 ‘유령 태그’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 랭킹이 활성화됐을 때다. 관련 키워드가 밤새도록 상위권을 점령했다. 당시 <…구라다>도 이 얘기를 다뤘다. 감히 ‘밑장빼기’라는 업계의 전문 용어를 떠올렸다.
KK의 첫 미국 진출이 이뤄진 장면
MLB.com에도 이 동영상이 업로드 됐다. 어쩌면 이때부터 KK의 명성이 시작됐을지 모른다. 그가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하기 5년 전의 일이다.
절묘한 트릭 수비였다는 소수의 평가도 있었다. 룰을 위반한 게 아니니 정당한 플레이로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은 달랐다.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양심 없는 플레이다.’ ‘스포츠 정신을 저버렸다.’ ‘사과해야 한다.’ 속된 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규칙 위반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공을 갖지 않은 야수가 주자와 접촉하면 주루 방해가 선언돼야 한다는 얘기다. 결국 논란은 논란으로 끝났다. ‘경기의 일부’라는 말속에 가라앉았다.
현장의 반응도 비슷했다. 당사자의 해명도 그랬다. “태그를 위한 연속 동작에서 나온 일이다. 일부러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소속팀 와이번스도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반론에 수긍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선수단의 입장과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해자 류중일 (삼성)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한다는 취지의 코멘트를 내놨다. “가까이 있었던 나를 비롯해 최형우, 주루 코치가 모두 못 봤다. 배구도 터치 아웃인데 그냥 아웃 판정을 받는 경우가 있지 않나. 광현이가 거기서 아웃이 아니고, 세이프라고 자백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김광현은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이유는 팔꿈치 통증이었다. 예정됐던 올스타전 출전도 포기해야 했다.
야구 규칙 2.15 ‘포구의 정의’
어제(4일) 잠실 경기다. 트윈스-다이노스가 난타전을 벌였다. 5-7로 홈 팀이 뒤진 4회 말. 2사 1루에서 문보경 타석이다. 2구째 슬라이더에 완벽한 타이밍으로 반응했다. 타구는 오른쪽 담장을 향해 높이 솟았다.
우익수 박건우가 따라붙는다. 한참을 쫓아간 끝에 점프 캐치를 시도한다. 공은 글러브 속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오른손으로 높이 들어 모두에게 확인시킨다. 심판의 아웃 선언으로 이닝이 끝났다.
그런데 웬걸. 이 문제 간단치 않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
중계 화면을 0.5배속으로 재생시켜 보시라. 박건우의 포구는 깔끔하지 않다. 잡았던 공은 곧 땅에 떨어진다. 펜스와 부딪히는 충격에 글러브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볼은 멀리 가지 않았다. 몸에 맞고 바로 옆에 떨어진다. 박건우는 그걸 오른손으로 집어서 높이 쳐든 것이다.
그럼 이것을 아웃을 볼 수 있느냐. 그런 문제가 남는다.
야구규칙 2.15 CATCH(캐치, 포구)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포구란) 야수가 날아가는 타구나 송구를 손 또는 글러브로 확실하게 잡는 행위를 가리킨다. (중략) 또 공을 잡는 것과 동시이거나 그 직후에 다른 선수나 펜스에 부딪히거나 넘어져서 공을 떨어트렸을 때는 포구가 아니다.”
이 규칙에 따르면 문보경의 타구가 아웃으로 처리된 것은 잘못된 판정이다. 만약 아웃이 아니었다면 1루 주자의 득점은 충분했다. 2사 이후였고, 오스틴 딘의 달리기도 느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5-7이던 스코어는 6-7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2사 2루(혹은 3루)에서 추가 공격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심판은 물론이고, 타자 본인, 주루 코치, 트윈스 벤치. 어디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LG 팬들이 ‘왜 비디오 판독도 안 했냐’고 아쉬워하는 게 당연하다. (경기는 연장 끝에 트윈스의 승리로 끝났다.)
스포츠와 게임의 경계
2015년의 김광현이 그랬다. 2024년의 박건우도 비슷하다. 그 자리에서, 그 순간 ‘이거 아웃 아닌데요’라고 양심선언 하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승리를 위해 뛰는 팀과 동료들을 생각하면 더 그럴지 모른다.
고니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다. 아귀한테 밑에서 한 장, 정 마담도 밑에서 한 장, 나 한 장. 아귀한테 다시 밑에서 한 장....
아귀 :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 내 패하고 정 마담 패를 밑에서 뺐지?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영화 ‘타짜’ 중에서)
거의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뚜렷한 속성 중의 하나는 (상대를) 속이는 일이다. 투수의 공이 기본적으로 그렇다. 직구처럼 오다가 휘어지고, 떨어진다. 타자도 마찬가지다. 번트를 댈 것처럼 하다가, 강공으로 변신한다. 열심히 하고, 잘하면 이긴다. 반대로 상대 실수로 같은 성과를 얻기도 한다. 스포츠와 게임의 영역이 모호해지기는 지점이 생긴다.
“어쩔 수 없다.” “반사적인 동작이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못 본 사람도 문제다.” 그런 해명이 필요한 일이다. 책임 돌리기까지 동원된다. 그래서 ‘경기의 일부’라는 표현이 유통되는 것 같다. 현실적인 합리화일 뿐이다.
2015년의 김광현을 향해, 그리고 2024년의 박건우를 향해. 누구는 비판할 것이다. 누구는 변호할 것이다. 누구는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결코 존중받을 수는 없는 플레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