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기 다른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 두 형제가 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가족이 운영하던 농기구용 고무 제조 공장이 기울어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귀향 후 가업을 물려받은 두 형제는 훗날, 우연한 계기로 타이어 사업에 뛰어들면서 인생의 변환점을 맞았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형 앙드레 미슐랭(André Michelin)은 화가, 동생 에두아르 미슐랭(Édouard Michelin)은 엔지니어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경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공장을 정상 가도에 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슐랭 형제는 공장 문 닫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1889년, 한 사이클리스트가 공기 주입식 타이어 수리를 위해 미슐랭 형제의 공장을 찾았다. 당시 공기 주입식 타이어는 천으로 감싼 고무 튜브에 접착제를 발라 바퀴 림에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기존 통고무 타이어에 비해 승차감, 핸들링은 뛰어났지만 정비성은 떨어졌다. 두 형제는 장장 세 시간에 걸쳐 타이어를 분해 및 수리했다. 이후 타이어를 다시 붙인 뒤 밤새 접착제를 말렸다.

다음 날, 에듀아르는 타이어를 점검하기 위해 시운전에 나섰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타이어가 터졌다. 비록 수리는 실패로 끝났지만 부드러운 승차감에 반한 에두아르는 주입식 타이어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다. 그해 5월 28일, 두 형제는 미쉐린 타이어를 설립했다. 2년 뒤에는 15분 만에 뺐다 끼울 수 있는 탈착식 공기압 타이어 특허 등록을 마쳤다.

1891년, 프랑스에서는 장거리 자전거 레이스 파리-브레스트-파리(Paris-Brest-Paris)가 열렸다. 파리와 서부의 항구 도시 브레스트(Brest)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경주다. 총 주행거리는 1,200㎞. 당시 행사에 참가했던 경륜 선수 샤를 테롱(Charles Terront)은 미쉐린의 탈착식 타이어를 끼운 자전거로 대회에서 우승했다. 미쉐린이 타이어 제조사로서 처음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두 형제는 이듬해 파리-브레스트-파리에서 영감을 얻은 경주를 개최했다. 이름은 파리-클레르몽페랑-파리.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파리와 클레르몽페랑을 자전거 타고 왕복해야 했다. 선수들이 소화해야 하는 거리는 820㎞. 에두아르는 도로 곳곳에 못을 뿌렸다. 타이어를 일부러 펑크 낸 뒤 빠르게 갈아 끼우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영역 넓히다
미쉐린은 ‘파리-브레스트-파리’ 경주 이후 1,000여 명의 사이클 선수가 찾아와 타이어를 요청할 만큼 성장했다. 1892년에는 타이어를 해외에 수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덕분에 매출도 함께 올랐다. 동시에 ‘던롭의 공기압 타이어를 따라 한 회사’라며 좋지 않게 바라보는 이도 늘었다. 참고로 ‘라이벌’ 던롭은 1888년, 이미 공기 주입식 타이어 특허 출원을 마치고 양산까지 성공한 상태였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던 두 형제는 1895년 자동차 산업에 관심을 가졌다. 해당 분야의 잠재력을 알아본 에두아르와 앙드레는 곧바로 자동차용 공기압 타이어 개발에 몰두했다. 이를 위해 세 대의 시제차도 만들었다. 하지만 자전거보다 하중이 높은 자동차 타이어를 만들긴 쉽지 않았을 터. 수차례의 사고와 펑크 등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성공적으로 개발을 마쳤다.

같은 시기,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은 파리-보르도(Bordeaux)-파리 경주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파리↔보르도를 왕복하고 돌아오는 대회로 약 1,200㎞에 달하는 거리를 100시간 안에 달려야 했다. 소식을 접한 미슐랭 형제는 시제차 3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미쉐린의 번개(L’Éclair of Michelin)로 대회에 참가했다. 네 발에는 자체 개발한 탈착식 공기압 타이어를 끼웠다.

미쉐린의 번개는 트로피를 거머쥐는 데 실패했다. 제한 시간을 한참 넘긴 데다 타이어 파손만 22차례 발생했다. 순위는 46등으로 ‘꼴찌’를 기록했다. 그러나 악재 속에서도 완주에 성공했다는 점, 다른 경주차보다 빠른 타이어 교체 시간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파리-보르도-파리 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미쉐린은 여러 제조사의 러브콜을 받으며 사업을 키워갔다. 1906년에는 이탈리아 토리노, 이듬해에는 미국 뉴저지에 생산 공장을 지었다. 1920~1930년대에는 베트남에서 고무 농장도 운영했다. 1934년엔 타이어 바람이 빠져도 일정 거리를 달릴 수 있는 런플랫 타이어를 선보였다.

미쉐린의 타이어 혁신은 1946년에 정점을 찍었다. 래디얼 타이어(Radial tyre)가 그 주인공이다. 타이어 내부를 구성하는 코드를 원주 방향에 직각으로 배열했다. 그 결과 내구성과 주행 안정성, 연비 모두 잡았다. 기존 타이어보다 가벼운 무게는 덤이다. 뛰어난 성능을 바탕으로 1951년 르망 24시 내구레이스, 1973년 제1회 월드 랠리 챔피언십(World Rally Championship)에서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사회 공헌에도 눈 뜨다

성공 가도에 오른 미쉐린은 보다 친숙한 이미지의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1910년에는 도로 표지판 제작 및 설치에 나섰다. 지역 이름과 도로 번호, 주의 표시 등을 적어 운전자 편의성을 높였다.

미쉐린의 ‘마스코트’ 비벤덤(Bibendum)도 이러한 일환으로 탄생했다. 에두아르 미슐랭은 한 전시회에서 타이어가 쌓인 모습을 보며 사람처럼 생겼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만화가 모리스 로시옹(Mauris Rossillon)을 만나 타이어를 형상화한 캐릭터 제작을 요청했다. 초창기에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의 푸근한 이미지로 거듭났다. 2000년에는 <파이낸셜 타임즈>가 선정한 ‘이 시대 최고 브랜드 아이콘’으로 이름을 올렸다.

여행 또는 음식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미쉐린 가이드(Michelin Guide)를 한 번쯤 들어봤을 듯하다. 1900년부터 발간한 가이드북으로 식당과 숙박시설 등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초창기에는 타이어 정보와 교통 법규, 자동차 관리 팁, 주유소 및 정비소, 호텔 위치 등을 알려주는 데 그쳤다. 이후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호텔에 별을 붙이면서 지금의 틀을 갖췄다. 2016년 기준 전 세계에서 스타를 받은 식당은 2,700여 개에 달한다.
처음에는 미쉐린 타이어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무료로 배포했다. 그런데 특유의 정확한 정보로 많은 이의 입소문을 타면서 유료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1944년,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미쉐린 가이드 1939년판을 참고했다는 일화도 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기후 변화’가 글로벌 공통 이슈로 떠올랐다. 각 회사는 ‘탄소중립’을 강조하며 생산 방식, 제품 등에 변화를 꾀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미쉐린은 에어리스 타이어 업티스(Uptis)를 지목했다.

업티스 타이어의 핵심은 타이어 구조에 있다. 기존 타이어와 달리 바람을 넣을 필요가 없다. 공기 머금는 ‘인너 라이너(Inner liner)’ 대신 빗살무늬 구조물을 촘촘하게 넣었기 때문이다. 충격 흡수는 물론 하중 지탱 모두 담당한다. 휠의 견고함을 유지하면서 편안한 승차감까지 챙겼다. 또한, 현재 타이어보다 30% 가량 가벼운 무게 덕분에 높은 효율도 기대할 수 있다.

미쉐린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2억 개의 타이어 펑크 사고가 발생한다. 부적절한 공기압부터 도로 위 위험요소 등 원인은 다양하다. 이 과정에서 폐기처분하는 타이어가 2억 개에 달한다. 바람 빠질 걱정 없는 에어리스 타이어를 통해 내구성은 물론 폐기물 절감 효과까지 넘보려는 미쉐린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세계 5대 타이어 제조사’로 이름을 올린 미쉐린. 기존의 판을 뒤집을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이며 ‘타이어 잘 만드는 회사’로서 입지를 굳혔다. 더불어 여러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소비자에게 친근한 이미지까지 심었다. 134년이 흐른 지금까지 미쉐린이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다.
글 최지욱 기자( jichoi3962@gmail.com)
사진 미쉐린, 최지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