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남길 것인가…<대홍수>가 비튼 재난 영화의 공식

※ 이 리뷰에는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소행성과 충돌한 지구, 남극에서 시작된 대홍수가 한반도까지 들이닥치고 평화로운 아파트 단지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재난은 AI(인공지능)센터 연구원인 안나(김다미)와 여섯 살 아들 자인(권은성)이 사는 303호에서도 감지된다. 급속도로 물이 차오르는 절체절명의 상황, 안나는 자인을 업고 목숨을 건 탈출에 나선다.
19일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된 넷플릭스 신작 <대홍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에서 출발한다. 모자의 평온한 아침을 깨우는 불안의 기운은 창문밖으로 차오르는 거대한 파도와 아수라장이 된 주민들의 탈출 행렬, 자연재해에 맞선 이들의 사투로 이어지며 재난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 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센터 보안팀 희조(박해수)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관객을 이끈다. 알고보니 안나는 인간의 모성을 ‘이모션 엔진’(사람의 마음을 구현한 AI)으로 완성해야 하는 인류의 핵심 미션을 수행 중인 인물. 대홍수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의 마음을 실험하는 시뮬레이션 장치다.

상황은 이렇다. 소행성 충돌 이후 인류는 우주로 긴급 대피하고, 전 세계 7개 AI 센터에서 ‘사람의 마음’을 이모션 엔진으로 완성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모션 엔진의 개발자인 안나는 직접 모성애 실험체로 자원해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아이를 구해내는 실험을 반복한다. 실험체인 엄마가 아이를 찾지 못하면 인류는 멸종하고, 성공하면 모자는 신인류로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
안나가 미션에 실패할 때마다 시간이 처음으로 되감기는 무한 타임루프 구조는 SF적 색체를 더한다. 물이 차오르는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같은 하루가 수만 번 반복되는 동안 안나의 선택과 감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영화는 일반 재난 영화가 가지는 직선적 탈출 서사와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낸다. 거대한 재난을 전면에 내세운 SF 블록버스터지만,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지점이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천착하는 점도 통속적인 재난 영화와는 다른 점이다.
<대홍수>는 공개 하루 만인 20일 ‘대한민국 오늘의 톱10 영화’ 1위에 올랐고, 23일 플릭스패트롤 집계기준 71개국에서 톱10에 진입하며, 3일 연속 넷플릭스 글로벌 톱 영화 부문 정상에 섰다. <더 테러 라이브>(2013) <PMC: 더 벙커>(2018) <전지적 독자시점>(2025) 등에서 긴박감 넘치는 연출력을 선보인 김병우 감독이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김병우 감독은 22일 서울 종로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아주 오래전, 인류의 다음 진화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며 “10년 전 누나가 아들을 낳고, 개인적으로 창세기 노아의 ‘대홍수’에 관심을 갖게 되며 ‘육아’, ‘노아의 대홍수’, ‘진화’ 3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반 이후 인공지능 등 SF적 요소의 비중이 커지며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재난으로 시작해 장르가 비틀어지며 더 극적인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결국 사람의 마음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영화 곳곳에는 타임루프를 암시하는 이스터 에그도 숨어 있다. 매일 아침 안나의 볼에 붙어 있는 스티커, 하루가 반복될 때마다 바뀌는 티셔츠의 숫자, 탈출 과정에서 입고 있는 코트 등 사소한 디테일들이 감정의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음을 환기한다. 감독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같은 장면 속에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대홍수>는 한국형 재난 영화의 틀 안에서 새로운 변주를 시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르적 외형으로 관객을 끌어들인 뒤 AI와 모성, 인간의 감정이라는 다층적 질문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낯선 리듬을 감수한다면 <대홍수>는 ‘지구의 마지막 날’이라는 진부한 문장을 끝내 다른 의미로 바꿔 놓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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