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기자의 76회 칸영화제 유랑기 1

프롤로그: 파리에서의 짧은 망상

파리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몽파르나스 타워와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사이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3일간 몽파르나스 타워와 공동묘지 두 곳 다 가지 못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고 변명하고 싶다. 바깥보다 집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굳이 고른다면 여행보다는 관광을 선호하는 편이다. 부지런히 돌아가는 것보다 대체로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주변에선 종종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며 여행 예찬 강의가 시작된다. 넷플릭스 영화 <가이드 투 러브> 중 이런 대사가 있다. “관광객은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고, 여행자는 경험하고 싶어 해요.” 무슨 말인지는 이해한다. 사전적으로도 여행(旅行, travel)은 다른 장소에서 이뤄지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관광(觀光, tour)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니까. 다만 세상의 8할을 영화와 책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눈으로만 보는 게 항상 그렇게 얄팍하고 부정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반대로 조금은 떨어져서 눈과 귀로 감상할 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칸영화제에 가고 싶어 한다.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영화들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영화들도 있지만 정말로 칸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의 경우는 대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작품들이라 나의 수비 범위 바깥에 있는 경우가 많다. 요즘 칸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의 상당 부분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국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칸영화제가 특별한 건 그곳의 분위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이번에 다녀와서 뼈저리게 실감했다. 나의 첫 칸영화제 출장은 2018년이었다. 한국 영화 <버닝>이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화제가 됐던 해였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해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이미지 북>이었는데 교과서에서 보던 감독이 이렇게 꾸준히 왕성하게 활동하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는 데 놀랐고, 그 고행과도 같은 길에 존경과 헌사를 보내는 영화제의 분위기에 취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영화제 기간 프랑스의 작은 휴양도시는 그야말로 영화의 전당, 아니 신전으로 변모한다. 모든 영화제는 마치 축제와 같은 들뜬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에 취하면 평소에는 시큰둥하게 볼 영화도 마치 걸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다지 영화에 대해 생각이 없던 사람도 마치 시네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칸영화제는 그런 흥분의 최고봉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려고 기꺼이 한 시간을 뙤약볕에서 기다리고, 영화가 시작될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차오르고, 감독과 배우들이 입장할 때면 마치 록스타가 온 것마냥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광신이 아니다. 영화가 마음에 안 들면 상영 중에도 단호하게 극장 밖으로 우르르 나간다.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고백과 싫었던 영화에 대한 불쾌감 모두 열정적이다. 마치 세상에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남은 것 같은 착각. 극장 산업이 서서히 붕괴하고 영화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시대에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보루에 당도한 기분. 가히 종교의식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솔직히 올해는 썩 내키지 않았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기를 두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오랜만의 출장이 낯설기도 했다. 처음 갔을 땐 뭣 모르고 부딪쳐 배우기도 했지만 한번 해보고 나니 신기함은 줄어들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 늘었다. 그럼에도 올해 마음을 다독여준 것은 함께 떠나는 동료들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인연이라 믿는다.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결정적으로 누구와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서 영화에 대한 인상이 크게 바뀌곤 한다. 수다를 나눌 든든한 동료들을 믿고 마음을 다잡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코로나19 직후 모두가 영화의 위기를 말하는 지금, 칸의 분위기가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아기가 태어난 후 정해진 루틴(주로 아기의 취침 시간에 맞춘)을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강제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오직 영화를 보고 듣고 말하는 작업만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기대된다.

두 번 본 영화를 좋아한다. 첫 번째의 긴장과 흥분으로 놓치고 말았던 것들이 조용히 다시 말을 거는 감각이 좋다. 두 번 간 영화제는 내게 어떤 표정으로 말을 걸어줄지 상상하며, 숙소에 누워 쓰잘 데 없는 잡념으로 종이와 펜을 낭비하는 가운데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써본다.


2일 차, 영화의 날씨: 어수선하거나 시큰둥하거나

날씨가 흐리다. 칸의 쨍한 햇살을 기대한 동료는 살짝 실망한 눈치지만 나는 적당히 습하고 흐린 날씨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피부에 공기의 착잡한 무게가 감겨 들어오는 기분을 느끼며 여기가 한국이 아님을 실감한다. 미세 먼지가 덜해서 그런지 괜히 칸의 공기는 맑은 날과 흐린 날 모두 보정 필터를 씌운 것처럼 선명하다. 들뜬 기분에 취한 탓인지 숙소가 극장에서 적당히 거리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영화를 보러 극장까지 걸어가는 시간, 이동 중에 마주하는 것들은 본격적인 감상을 시작하기 전 예열하는 시간, 약간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도 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숙소에서 극장으로 향하던 중 우연처럼 기분 좋은 만남이 있었다. 사실 만남이란 건 일방적인 표현이고 칸에서 꽤 이름난 이탈리안 레스토랑 야외 의자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앉아 있는 걸 마주한다. 칸에서 우연히 만난 첫 영화인이 고레에다 감독이라니. 아는 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숫기를 갖추지 못한 나는 이럴 때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빨리 지나가는 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올해 경쟁부문에 또다시 신작 <몬스터>를 들고 왔다. 참 부지런한 감독이다. 잘해왔던 걸 계속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황금종려상 수상 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프랑스), <브로커>(한국) 등 해외에서 작업을 하더니 이번에는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에 연출을 맡았다. 직접 각본을 쓰지 않고 연출만 한 건 오랜만인데, 솔직히 <브로커>가 적잖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다. 경쟁부문 첫 상영이라는 것도 기대를 떨어트리는 요인 중 하나였다. 대개 아주 초반에 있는 영화들이 수상을 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마침 다른 상영 일정도 겹쳐 ‘할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하지만 내심 부담 없이 첫 상영 관람을 포기했다. 이걸 왜 꼭 칸에서 봐야 하는 걸까 투덜거리면서도 인터뷰 탓에 미리 봐야 했던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상영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 <몬스터>를 먼저 관람한 동료에게 뜻밖의 문자가 왔다. 대략 “고레에다 감독의 전환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좋았다.”는 극찬이었다. 동료는 첫 칸영화제 출장이었는데 속으로 역시나 첫 출장의 흥분으로 인한 가산점이겠거니 싶었다.


3일 차, 영화의 날씨: 반성의 기쁨

다음 날 아침,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몬스터>를 관람하자마자 내 섣부른 판단을 반성했다. 동료의 표현 그대로였다. <몬스터>는 이전 고레에다 영화들과 비슷한 듯하면서 달랐다. 좀 더 역동적이면서도 세심하고, 틀에 박힌 듯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순간들을 제공한다. 학교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엄마, 선생님, 아이들의 각기 다른 시선의 3부 구성으로 재구성한 이 영화는 동일한 사건이 시점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진실의 껍질을 벗겨나간다. <라쇼몽>이 연상되는 구성 탓에 익숙하다 여겨질 수도 있지만 1, 2, 3부의 표현 방식, 정확히는 구성과 프레임이 모두 조금씩 변화하는 연출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결국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만큼 그걸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핵심이라는 단순명료한 힘을 새삼 깨달았다.

오랜만에 본질로 돌아와 실력을 발휘하는 고레에다 감독의 카메라 시점, 인물의 위치, 동선과 블로킹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영화가 왜 시청각 매체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몬스터>가 준 기분 좋은 충격 덕분에 굳은 머리에 조금은 금이 간 기분이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영화의 신전에 들어서기 위한 통과의례였던 걸까. 겨우 한 번 와본 것 가지고 이미 영화제를 몇 바퀴 돌아본 것처럼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지난 며칠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극장에 들어설 때마다 들키지 않게 짧은 심호흡을 하고 허리를 바짝 곧추세운 채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엉덩이를 붙이고 10분도 채 가지 않을 다짐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몬스터>는 올해 나의 시금석이다.


5일 차, 영화의 날씨: 영화와 시간, 영화의 시간, 영화 밖 시간

돌이켜보니 왕빙의 <청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적 시간을 제공한다. <청춘>은 2014~19년까지 중국 의류 산업의 중심인 즈리시에 모인 젊은 노동자들의 삶을 담았다. 이미 <비터 머니(bitter money)>에서 탐구한 주제이지만 좀 더 어린 청년 그룹으로 대상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순간들이 발견된다. 왕빙에 익숙한 사람에겐 그저 흥미로운 범작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서구권에서는 굉장히 이색적으로 다가간 듯하다. 초반에는 스크린데일리를 비롯한 매체 평점의 선두를 차지할 만큼 호의적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뤼미에르 대극장에서의 박수 소리와 마치 처음 겪어보는 것처럼,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처럼 뻘쭘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 화답하는 왕빙 감독의 수줍은 표정이 영화만큼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영화인들이 그토록 칸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칸을 벗어나면 또다시 놀랄 만큼 아무도 관심이 없어져 외로운 고행의 길을 걸어야겠지만, 지구 어딘가에 자신의 작업을 이토록 환영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거창한 세레머니는 의미가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영화는 나아간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남는 건 결국 사람이다.

왕빙의 영화 역시 노동하는 육체라는 주제만을 집요하게 찍지 않고 거기 있는 ‘사람’을 담는다. 사건보다 상황, 대상보다 공간과 정황을 응시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청춘>은 왕빙과 떠나는 210분간의 시간 여행에 가깝다. 왕빙의 다큐멘터리 작업엔 극적인 터치가 거의 없는데, 아니 어쩌면 없기에 새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여기에 마법 같은 건 없다. 죽어 있는 시간을 담는 성실한 눈과 부지런한 손길의 영화라고 해야 할까. 즈리시에 모인 젊은이들은 창문 없는 공장에서 소음 속에 일하고, 휴대폰을 보며 쉬고,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작업장 부지의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일상을 무한 반복한다. 사실상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는데 이들의 일상은 해맑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감옥의 크기가 천차만별이라 그걸 인식하느냐 못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무한 반복하는 이들의 시간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소음 같았던 미싱 소리가 나의 시간 속에도 녹아들어 거의 들리지 않는 기분이다. 문득 즈리시의 젊은이들 사이에 함께 서 있는 내 감각을 발견한다. 왕빙이 구현하는 영화적 시간은 어쩌면 이런 동화작용의 과정인 걸까. 카메라를 든 왕빙은 이들과 얼마나 긴 시간을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마침내 투명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어떤 영화들은 그 시간을 함께 버티는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

영화 <청춘> 스틸

한편 현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한한 공기도 있다. 올해는 유난히 아시아권 기자 중 중국 기자가 많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아마도 이들 대부분을 <청춘> 프리미어 상영관에서 마주한 것 같다. 영화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열정적으로 쳤던 이들도 대부분 중화권 기자들로 짐작된다. 그 열띤 반응을 보며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청춘>은 프로파간다를 목표로 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춘다. 왕빙 감독이 카메라로 발굴하는 건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 안에서 전혀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들이다. 이 영화는 대단한 선전이나 고발을 하지 않아서 더 서늘하고 무섭다. 누군가는 그걸 진실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꽤 많은 중화권 기자들이 <청춘>을 보며 중국 영화의 에너지, 포용성, 위상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한국 영화를 대할 때 그런 이상한 이중적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애국주의를 말할 땐 혐오감에 달아나려 하는데, 정반대의 영화를 볼 땐 또 뭔가 아쉬워 국가라는 프레이밍을 자연스럽게 씌우고 있다. 중국 지하전영이 거의 전멸한 시점에 왕빙의 행보는 분명 중국 영화 ‘산업’과는 궤를 달리하는 남다른 면모가 있다.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우리와 중국 영화 시장이 단절되면서 중국 영화 자체가 미지의 대륙처럼 다가온다.

글. 송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