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3일, LG가 29년 만에 정규 시즌에서 우승을 확정 지었다. ‘매직넘버 1’을 남겨둔 상황에서 2위 KT와 3위 NC가 패해, 부산으로 내려가는 버스 속에서 1위의 기쁨을 만끽했다. LG가 정규 시즌 1위에 오른 것은 29년 전인 1994년과 1990년이다. 이해 모두 한국시리즈도 제패해 LG팬들의 기대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에 ‘머니피치’에서는 1990년과 1994년의 LG를 되돌아보려고 한다.
1990년 ‘한강의 기적’을 이룬 LG (71승 49패)
1989년 MBC는 롯데에 반 게임 차이로 앞서며 꼴찌는 면했지만, 팀 내부는 만신창이였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불거진 배성서 감독과 선수들의 대립은 격화돼, 시즌 중에는 선수들이 감독 교체를 요구하는 내홍에 이어진 것. 시즌이 끝난 뒤, 베테랑 선수들을 중심으로 1982년 MBC 초대 감독 겸 선수로 뛴 백인천 감독의 복귀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11월 7일 백인천 감독이 6년 5개월 만에 MBC에 복귀하게 됐다.
“제가 그만둔 뒤로 여러 감독이 MBC를 맡았는데, 저와 그분들과의 다른 점을 선수들도 느낀 게 있었겠죠. 그래도 연습 등은 힘들더라도, 항상 선수들 편을 들어준다는 믿음이 컸던 것 같아요.” 백인천 전 감독의 말이다.
그리고 12월 14일, MBC가 LG에 매각됐다. 즉, 백인천 감독은 MBC에 이어 LG 초대 감독이 됐다. 다만 감독이 바뀌었다고 해도, 1990년 LG 전력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김동수 외에는 뚜렷한 보강이 없었던 것. 백 감독은 김신부와 최일언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마운드 강화에 도모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둘이 합쳐 20승 이상을 기대했지만, 고작 5승에 그친 것.
마운드가 무너진 LG. 그렇기에 시즌 초반은 승리 가뭄 속에 패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6월 3일까지 14승 22패로 공동 선두 빙그레(현 한화)와 해태에 6경기 차로 뒤진 꼴찌(7위)에 머물렀다. 태평양에 0-5로 패한 이날, 경기가 끝난 후 백인천 감독은 LG 팬들이 감독 퇴진 구호를 외치며 청문회를 요구하는 수모도 겪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달 코치는 “성적이 나쁘니까 팀 분위기는 다소 처질 수 있었지만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팀워크는 괜찮았다”라고 밝힌다.
“백인천 감독님이 코치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리 다 잘리면 다 같이 모여서 사업이나 해보자’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요. 이기니까 팀 워크가 좋아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해는 좀 달랐죠. 팀 분위기가 어느 때보다 좋았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한두 선수씩 자기 역할을 해내면서 서서히 강해진 것 같아요.”
그런 선수 중에 한 명이 김건우 전 청담고 감독이다. 1986년 18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거머쥔 김건우는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이 기대됐지만, 1987년 9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수술과 재활을 거듭한 뒤, 1989년에 필드로 돌아왔다. 다만 과거의 구위를 회복하지 못해 그해 3승을 거뒀고, 1990년에도 고작 2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그때 팔이 아파서 100%로 던질 수 없었어요. 70~80% 힘으로 던지는 정도라서 구속이 130km/h도 나올까 말까 했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슬라이더를 잘 던져서, 그것만 줄창 던졌죠. 제가 그해 2승을 거뒀는데, 4월 17일 OB(현 두산)전에서 구원승으로 시즌 첫 승을 올렸어요. 그리고 롯데전(5월 23일)에서 7이닝 1실점 승리를 거뒀죠. 연승을 이어가거나 연패를 끊는 데 나름 역할을 했어요. 다만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요.”
김태원의 각성과 문병권의 역투. 여기에 선발 정삼흠과 마무리 김용수의 보직을 맞바꾼 묘수가 통하며 LG는 힘을 내기 시작했다. 사실 백인천 감독은 믿는 구석도 있었다. “팀에 베테랑 선수가 많아서 스프링캠프 때부터 체력 향상에 힘쓰며 연습을 많이 했죠. 날씨가 더워지면서 투타가 살아날 것으로 기대는 하고 있었어요.”

7월 한때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8월을 시즌 3위로 마감했다. 1위 빙그레와 4.5게임 차이로 뒤지고 있어, 산술적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은 기대할 수 있지만 시즌 우승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LG는 9월에 15승 5패를 거두며 대역전극을 펼친다. 특히, OB와의 시즌 최종전에서는 9회 말 김동수의 끝내기 홈런으로 1-0 승리를 거뒀고, 해태가 태평양에 2-5로 지며 첫 정규 시즌 정상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을 상대로 ‘4대빵’으로 제압하며 한국시리즈도 제패했다.
LG가 우승한 데는 베테랑 선수들과 함께 김동수 등 신인 선수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지만 김용달 코치는 두 가지 요인도 중요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LG의 전폭적인 지원이죠. MBC는 아무래도 공기업이라서 팀 지원이 좀 아쉬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LG는 선수단 대우도, 지원도 잘해줬어요. 이해부터 1990년 후반까지는 다른 팀이 LG 선수를 부러워했을 정도니까요. 외국 구단과 자매 구단도 맺고, 미국에서 열리는 교육리그도 보내주는 등 명문구단으로 가는 비전이 있었어요.”
“둘째는 백인천 감독님이 감독에 전념한 게 컸어요. 원년 때는 선수로도 뛰다 보니까 팀 관리나 통솔 등에 아쉬움도 있었어요. 그런데 감독에 전념하게 되면서 여러 부분에서 팀을 세세하고 치밀하게 신경 썼어요. 특히, 전력 분석이 그랬죠. 그전까지는 상대 분석을 수작업으로 했는데, 백인천 감독님이 일본에서 전산시스템을 가지고 왔어요. 시즌 초반을 지나면서 전력 분석 데이터가 쌓였고, 그게 중·후반의 대반격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다고 봐요.”
LG와 백인천 감독의 인연을 오래가지 못했다. 1991년 시즌을 앞두고 백인천 감독이 MBC와 맺은 2년 계약 등은 무효라면서 계약 갱신을 요구한 것. 시즌 중에 사퇴할 뜻을 나타낸 백 감독은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LG 역시 시즌 중·후반부터 백 감독을 붙잡을 뜻이 없음을 나타내며 다음 감독 선임에 나섰다.
그 당시를 잘 아는 어느 관계자는 “처음엔 이광환 감독이 후보에는 없었다”라고 밝힌다. “당시 LG에는 단장이랑 코칭스태프와 감독 선임과 관련한 협의도 여러 차례 열렸다. 즉, 현장의 의견도 적극 반영하려고 한 것이다. 그때 일부 코치는 김재박 감독을 밀었다. 감독 출신 지도자를 미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협의를 하는 가운데 이광환 감독이 거론됐고, 결국 지휘봉을 잡았다. 미·일 야구를 경험한 이광환 감독을 통해 LG에 선진 야구를 접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1991년 10월 8일 LG 사령탑에 오른 이광환 감독은 “OB 감독을 맡았는데, 라이벌인 LG 사령탑에 오르는 데 거부감도 있었다”라고 한다. “꽤 심사숙고를 했죠. 그래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온 건데 생각만 하는 건 LG에도 예의가 아니라고 봤어요. 정말 그때는 LG에서 해보고 제 야구가 안 통하면 야구계를 영원히 떠날 각오도 있었어요. LG가 마음에 들었던 게 당장 우승이 아닌 3~4년 뒤에 항상 우승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이광환 감독이 LG 사령탑에 오른 첫해(1992년)는 시즌 7위에 그치며 LG팬들의 비난도 많이 받았다. 이듬해는 시즌 4위에 오르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등 향상된 성적표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LG는 1994년을 맞이했다.
1994년 ‘신바람 야구’을 일으킨 LG (81승 45패)
1993년에 가을야구를 맞봤다고 해도, LG를 우승후보로 손꼽는 야구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공수의 핵심인 김동수와 송구홍이 군대 문제로 전력에서 이탈해 그 공백을 메우는 게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빗나가라고 하는 게 예상이라는 말처럼 LG는 시즌 초반부터 앞으로 치고 나갔다.
4월 26일 1위에 오른 후, 시즌 마감까지 6경기를 남겨둔 9월 10일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었다. 즉, 4월 26일 이후 줄곧 1위를 달린 것이다. 시즌 최종 성적은 81승 45패. 2위 태평양과의 승차는 무려 11.5게임 차이나 났다. LG가 이해 시즌 1위를 놓친 적은 딱 6일밖에 없었고, 81승은 당시 한 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이었다.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태평양을 ‘4대빵’으로 제압하며 정상에 섰다.
LG 우승과 함께 이광환표 ‘자율야구’는 야구계를 넘어 사회에도 큰 영향을 줬다. 이광환 감독은 “당시 LG그룹의 경영철학이 자율경영이라서, 자율야구는 그에 접목한 좋은 네이밍”이었다며 “LG그룹 임원 등에게 제가 하려는 야구를 설명하기 쉬웠다”라고 말한다. 다만 “자율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선수에게 오로지 맡기는 야구로 생각하는 이도 있었던 거는 아쉬웠죠. 사실 자율이라는 말보다 시스템 야구가 더 적당했다고 봐요.”
시스템 야구란, 많은 연습량보다는 효율적인 연습을 통한 선수 경기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팀 운영 등을 포함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선수단 운영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인 코치에게 권한을 나눠주고, 선수 관리에 있어 최전선에 선 트레이너 등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선수단을 운영했다. 또 투수들의 역할 분담을 통한 마운드 운영 ‘스타 시스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광환 감독은 1992년 시즌이 끝난 뒤, 투수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알려주었다. 선발인지 불펜인지, 그리고 불펜이라면 승리조인지 추격조인지, 마무리인지 미리 구분해 그 역할에 맞게 마운드에 올렸다. 선발 4~5명에 롱릴리프와 셋업맨 2명씩, 마무리 1명으로 마운드 운영을 세분화·체계화해 시즌을 치렀다.
이 스타 시스템이 뿌리를 내린 1994년에는 선발 4명이 두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이상훈이 18승을, 김태원은 16승을, 정삼흠은 15승을 올렸고, 신인 인현배도 10승을 기록한 것. 또 불펜에서는 김용수가 30세이브를 거뒀고, 차동철과 강봉수, 민원기, 차명석, 전일수 등도 22승 16세이브를 합작했다. 민원기 충암고 코치는 “경기 내내 등판을 준비하지 않고 어느 상황에서 올라갈지 알고 있어 준비하기도 쉬웠죠. 또 체력도 안배도 돼 한 시즌을 던져도 힘든 줄을 몰랐어요”라고 밝힌다.
타선에서는 ‘신인 3인방’인 유지현과 서용빈, 그리고 김재현의 활약이 돋보였다. 유지현은 3할 타율(0.305)과 함께 15홈런, 51도루를 기록했다. 서용빈은 정교한 타격으로 타율 0.318을, 김재현은 20홈런-20도루를 달성하며 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또 신예 박종호도 21도루를 기록하며 공수에서 힘을 보탰다.
김용달 코치는 “이광환 감독님의 시즌 운영을 보면서 참을성이 대단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코치들에게도, 선수들에게도 믿고 맡기는 게 많았는데, 그렇기에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을 거예요. 감독님이 직접 나서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믿고 기다리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또 경기 초반에 번트가 아닌 과감한 강공과 도루 등 공격적인 야구를 한 것도 신인들이 활발하게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광환 감독은 신인 3인방과 함께 “베테랑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 시즌”이었다고 한다. “투수에서는 김용수, 타선에서는 한대화가 버팀목이 되어 주었어요. OB에서 감독할 때는 젊은 선수 위주로 세대교체를 다소 서두른 것도 있는데, LG에서는 신예들만큼이나 베테랑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죠. 우승한 데는 신구조화가 결정적이었어요.”
“팀을 리빌딩한다고 해서 무조건 젊은 선수만 기용하는 인위적인 세대교체로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적어도 투타에서 팀의 기둥이 될 선수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역할을 한 대화랑 김용수 등이 잘해줬어요.”
이해 주장을 맡은 노찬엽 연천 미라클 수석코치 역시 “신구 조화를 잘 이룬 게 우승의 원동력”이었다고 밝힌다. “1990년에는 치열한 경쟁 끝에 타율왕을 놓친 게 아쉬웠죠.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한 거에 자부심도 있어요. 1990년이나 1994년 모두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아무래도 1990년에는 신예로 우승한 거고 1994년에는 팀의 주축으로 우승을 이끌었다는 차이가 있죠. 그래서 저는 1994년에 우승한 게 더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 '통합 우승'을 기원한 엘린이의 꿈은 5년 만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