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탁구의 간판 신유빈이 베이징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들었다. WTT(월드테이블테니스) 그랜드 스매시 중국 대회 8강에서 주천희(삼성생명)의 거센 바람을 정면에서 받아내 4–2로 뒤집었고, 한국 여자 선수로는 그랜드 스매시 단식 최초 4강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단순히 ‘좋은 성적’이 아니라, 흐름을 거슬러 스스로 길을 낸 승부였다. ‘중국만 만나면 작아진다’는 오래된 인식, 그리고 올 시즌 내내 붙잡아 늘어지던 중국전 연패의 사슬을 끊고 그 여세로 ‘집안 라이벌’까지 넘어선, 동력의 전환점이었다.

경기 내용은 더 극적이었다. 첫 두 게임을 내리 내주며 0–2로 뒤졌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오늘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주천희는 이 대회에서 이토 미마(일본 8위), 스쉰야오(중국 12위)를 잇달아 제압하며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키는 크지 않지만, 기본기가 단단하고 배포가 큰 선수다. 초반 두 게임은 그 강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듀스 공방 끝에 14–16을 내준 1게임, 그리고 7–11로 밀린 2게임은 신유빈 입장에선 흔들릴 만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그가 올해 만든 가장 큰 무기는 ‘버티기’와 ‘전환’이다. 세 번째 게임부터 서브 회전량을 확 늘리고, 리시브를 한 박자 빠르게 처리해 초구에서 주도권을 가져오는 장면이 반복됐다. 3게임 11–8, 4게임 11–9, 5게임 11–9. 스코어만 놓고 보면 근소하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리듬을 잡은 쪽, 승부의 주제를 바꾼 쪽은 신유빈이었다. 마지막 6게임 11–7은 그 전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 8강 한 경기에 앞서, 신유빈은 16강에서 세계 4위 콰이만을 3–2로 잡아냈다. 올 시즌 내내 중국 선수들에게 단식 8연패로 눌려 있던 상황을 생각하면, 그 한 번의 승리가 사실상 심리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콰이만은 왼손 셰이크, 초구부터 각을 세워 코너를 찌르는 타입인데, 그 흐름을 꺾으려면 리시브 위치와 임팩트 타이밍을 고쳐 잡아야 한다. 신유빈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렸다. 전위에서 앞당겨 잡는 ‘빠른 첫 스윙’과 긴 랠리로 끌고 가는 ‘길게 버티기’를 상황마다 번갈아 쓰며 상대 리듬을 깨뜨렸다. 8연패가 끝나는 순간, 탁구대 위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스코어가 아니라 표정이었다. “나는 나를 믿지만, 내 연습과 훈련을 더 믿는다”는 그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 떠나는 선수’라는 주세혁 감독의 증언이, 이번 대회처럼 큰 무대에서 구체적인 득점으로 환산되기 시작했다.

주천희전은 그 연장의선에 있었다. 1·2게임을 내주고도 서두르지 않았다. 3게임 8–8에서 연속 3득점을 뽑아낸 서브 패턴은 이 경기의 전환점이 됐다. 짧게 낮추는 커트성 서브와 짧게 들어오다 갑자기 길게 뻗는 회전 변화를 섞자, 주천희의 리시브가 살짝 들리기 시작했다. 그 타이밍에 신유빈은 백핸드로 초구를 먼저 걸며 선제권을 틀어쥐었다. 4게임 10–5에서 10–9까지 쫓겼을 때 마지막 한 점을 어떻게 가져오느냐가 중요했는데, 여기서 보여준 선택은 ‘정공법’이었다. 피하려 하지 않고, 네트 가까이로 붙여 상대를 앞으로 끌어낸 뒤 빈 공간으로 밀어넣는 한 박자 빠른 드라이브. 이런 한 점이 모여 흐름이 된다. 5게임 9–9에서 다시 두 점을 쌓을 때도 원리는 같았다. 초구 선제, 각도 변화, 마지막엔 깔끔한 마무리. 그리고 6게임 10–7 매치 포인트에서 침착하게 끝냈다. 승부를 오래 하다 보면 마지막 한 점이 자꾸 멀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이 가장 많이 연습한 루틴을 믿고 그대로 가져오는 선수가 결국 이긴다. 이번 8강의 결말이 그 교과서였다.
이 결과가 갖는 의미는 숫자보다 크다. 그랜드 스매시는 WTT 체계에서 세계선수권을 제외하고 위상과 포인트, 상금이 모두 최상위인 대회다. 본선 64강부터 세계 정상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한 경기만 삐끗해도 밀려난다. 그 무대에서 한국 여자 선수가 단식 4강까지 간 것은 처음이다. 랭킹 포인트로 보면 700점이 즉시 더해지고, 당장 톱10 문턱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점프’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 단숨의 도약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콰이만의 강한 템포를 제어하고, 주천희의 끈질김을 운영으로 돌파하는 과정은 치밀한 준비와 반복 훈련 없이는 어렵다. 이번 8강은 ‘폼이 좋았다’가 아니라 ‘세트를 뒤집는 기술을 갖췄다’는 증거에 가깝다.

전술적으로도 수확이 선명하다. 첫째, 서브·리시브의 ‘질’이 올라왔다. 단순히 코스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회전의 종류와 깊이를 바꿔 리시브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둘째, 초구 주도권에 대한 집착이 긍정적으로 작동한다. 상대가 먼저 건 게임에서는 길게 버티며 타이밍을 흐트러뜨리고, 자신이 먼저 건 랠리는 두세 번 스윙 안에 마무리한다. 셋째, 체력과 집중력이 붙었다. 5게임 후반, 6게임으로 갈수록 스텝이 느려지지 않고 오히려 빨라졌다. 이런 포인트가 쌓이면, ‘중국전만 가면 숨이 찼다’는 예전의 고정관념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물론,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준결승 상대는 세계 2위 왕만위 혹은 일본의 간판 하리모토 미와였다. 왕만위는 코스 숨김과 전환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하리모토 미와는 리듬 브레이크와 수비 전환이 탁월하다. 두 선수 모두 초구부터 압박이 강하니, 3구·5구 설계가 이번에도 성패를 가를 것이다. 리시브 높이가 들리는 순간 창구가 열린다. 반대로 신유빈이 짧은 공을 낮게 눌러두고 3구를 먼저 걸어 리드를 잡는다면, 지금의 상승 흐름을 그대로 결승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 하던 대로’다. 서브에서 변화를 만들고, 초구에서 먼저 때리고, 길어지면 체력을 믿고 버티는 그 리듬. 욕심은 접고 원칙을 밀어붙이면, 결과는 따라온다.

이번 성취는 개인을 넘어 한국 여자탁구에도 메시지를 던진다. 오랫동안 우리는 중국의 두터운 벽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왔다. 하지만 스포츠는 언젠가 그 벽을 깬다. 벽이 낮아져서가 아니라, 그 벽을 넘어설 선수가 자란다. 신유빈은 그 ‘성장’이 개인의 끈기, 코칭 스태프의 설계, 팀 훈련 문화가 함께 움직일 때 현실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16강의 콰이만전이 심리적 빗장을 열었고, 8강의 주천희전이 운영과 집중력의 증명을 마쳤다. 이제 남은 건 한 경기를 더, 같은 태도로 치르는 일이다.
컬럼의 마지막엔 늘 같은 질문이 남는다. “이 흐름이 이어질까?” 답은 이미 경기력 속에 있다. 서브 한 번, 리시브 한 번, 초구 한 번.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바뀌었고, 그래서 큰 장면이 나왔다. 그랜드 스매시 최초 4강이라는 타이틀은 역사 속 기록으로 남겠지만, 신유빈에게 더 중요한 건 ‘다음 랠리 첫 스윙’이다. 그는 스스로 증명했다. 믿을 것은 운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매일 앞당겨 나와 반복한 그 연습이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도 믿어 보자. 배짱과 기술, 체력과 운영을 함께 갖춘 21살의 라켓이, 베이징의 소음을 가르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이번 4강 진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오래됐던 징크스를 지워낸 자리엔 새 루틴과 새 자신감이 자리를 잡았다. 탁구대 위의 작은 볼은 가볍지만, 그 위에 실린 마음은 무겁다. 신유빈은 그 무게를 이길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 한국 여자탁구는 다시 꿈을 꿀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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