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명나라를 당황하게 만든 '임진왜란'의 진짜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일으켰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이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실현 가능성의 여부와 별개로, 당시에 그런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은 임진왜란이 조선과 일본의 충돌을 넘어서는 국제적 사건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중심에 있던 명나라는다양한 국제적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때마다 재화와 병력을 소모해가며 때로는 지배자로서, 때로는 조정자로서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이후에 명나라의 판단에 따라 일본과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고 두나라의 관계가 어그러지며 전쟁이 재개된 것을 떠올리면, 명나라가 조선과 일본만큼이나 이 전쟁의 주된 참여자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임진왜란을 동아시아 삼국의 전쟁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진왜란은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가 구현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

그러나 그 질서의 본질은 엄숙한화합의 상징 그리고 미사여구로 치장된 지배와 굴복의 굴레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반증하듯 명나라의 참전 이후전개된 전쟁의 양상은 ‘은혜’와 ‘속박’이라는 사대 질서의 양면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지금부터 그 자세한 면면을 살펴보자.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명나라 참전이 차라리 쉬웠을 것

일본의 조선 침략이 그랬듯이 만일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오히려 명나라도 선명한 방향성을 갖고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정복 전쟁이라기보다 방어전에 가까웠고, 조선을 돕기 위해 원병을 보내기에는 대내외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명가도’라는이 전쟁의 명분은 명나라가 참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조선의 난관: 일본의 요청을 일축하며 명나라의 의심까지 해명해야 해

심지어 일본이 조선을 길잡이로 삼아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떠돌면서 일본뿐 아니라 조선을 향한 명나라의 의심은 깊어져갔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명나라 정벌을 공언하는 일본의 요청을 일축하는 와중에 명나라가 품은 의혹에 어떻게 해명할지를 걱정해야 하는 이중고에 처해 있었다.


조선이 일본 영향력 아래로 들어간다? 명나라에게는 엄청난 위협

명나라가 조선을 향해 불안과 의혹 가득한 시선을 보낸 까닭은 간단했다. 조선이 일본에 함락되면 그것이 명나라에 즉각적으로 미칠 파급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조선이 일본과 동맹을 맺든, 일본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침략의 전초기지로 전락하든 그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않았다. 명나라와 국경을 맞댄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로들어가는 것만으로 명나라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신음하던 것을 보면서도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명나라의 의심: 전쟁 20일만에 수도를 내주고 임금이 도망쳤다고?

전쟁 발발 20일만에 일본군에게 수도를 내주고 임금이 도망치듯 몽진하는 상황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소문처럼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명나라에 망명을 요청한 자가 정말 조선의 임금인지 그 사실 여부를 밝히려고도 했다.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궁극적인 목적이 자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화근을 제거하는 데에 있었다 해도, 실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또 다른 문제였다. 당시 명나라는 영하寧夏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 중이었고, 북방에서는 여진이 누르하치奴爾哈赤를 중심으로 세력을불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 전쟁으로 보면 명확해 지는 것

명나라의 참전으로 임진왜란은 비로소 동아시아의 삼국 전쟁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와사대 관계,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그 질서의충실한 참여자가 되고 싶었던 조선, 그리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조선 땅에서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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