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나온 북한 요원들은 ‘국정원이 나 좀 안 건드려 주나’ 한다”
국정원 1급 베테랑
정일천 가톨릭관동대 교수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이선 헌트(톰 크루즈)처럼 근육질에 날렵한 사람이겠거니 했다. 국가정보원에서 약 30년 근무하고 1급으로 퇴직한 정일천(61) 가톨릭관동대 교수는 예상과 달랐다. 체형과 인상이 이웃집 김씨 같았다.
이 전직 스파이가 ‘정보기관의 스파이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국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한중 수교가 이뤄졌고 동북 3성은 정보 전쟁터가 됐다. 대북 휴민트 부서에서 북한 엘리트들을 포섭하며 고급 정보를 캐낸 그는 지상낙원의 후계자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 ‘김정은’이 적시된 공식 문건을 최초로 입수하기도 했다.
지난달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정 교수는 “정치권이 국익을 중심에 두지 않고 정파적으로 흔들다 보니 국정원이 중병을 앓고 있다”며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거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사고에서 제발 벗어나자”고 말했다. “헤즈볼라를 겨냥한 이스라엘 모사드의 ‘삐삐 폭발 공작’ 보았지요? 저는 부러웠습니다. 우리 정보기관도 조속히 야성(野性)을 회복해 필요할 땐 이런 비밀 공작을 수행할 능력을 갖춰야 해요.”
◇대북 공작만 25년
-국정원에서 어떤 일을 했나요.
“삼성에 입사했다가 1992년 시험에 합격해 국가안전기획부(현재 국정원)에 들어갔습니다. 초기 4년은 대북 정보 분석을, 나머지 25년은 대북 공작을 했지요. 정보 분석은 종일 북한 관련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끼리는 그 부서에서 벗어나는 걸 ‘탈북’이라고 했어요(웃음). 김대중 정부 출범할 무렵 공작국으로 건너가 휴민트, 즉 간첩 심는 일을 했습니다. 공작원이 현장에서 뛴다면 공작관(case officer)은 그들을 조종하는 지휘자예요.”
-재직 중 간첩을 얼마나 심었습니까.
“북한이나 제3국에 10명 가까이요. ‘공작 인가’라고 부릅니다. 영화 ‘공작’의 모델이 된 암호명 흑금성처럼, 공작원을 만들고 정보를 수집해 오는 하나의 사업으로 발전시켜야 인가가 나와요.”
-공작이 체질이었나 봅니다.
“여건을 개척하는 일이 재밌더라고요. 기업의 영업사원처럼 이건 ‘사람 장사’예요. 남북한의 교류·접촉이 많아지면서 공작 여건이 나아졌습니다. 북한 스파이들도 그랬겠지요. 저는 좌파 정권, 우파 정권에서 다 진급했습니다.”
-책에 ‘행복한 스파이였다’고 썼는데.
“국가를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는 이 일을,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했습니다. 휴민트망을 여럿 만들고 성과도 냈지요. 보안상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 운영되는 공작들도 있습니다. 사고 없이 공무원 최고 직급까지 올라가 은퇴했으니 행복한 스파이죠.”
-스파이는 보안이 생명인데 고통받거나 손해 본 일이라면.
“결혼하려면 예비 배우자도 신원조회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직업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사회생활을 하느라 괴로웠지만 받아들였어요. 제 딸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제가 광장시장에서 일하는 줄 알았지요(웃음).”
-훌륭한 공작관의 조건도 있나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공작원의 성향과 환경은 천차만별이고 돌발 상황도 많아 공작은 일종의 종합예술이에요. 플랜B, 플랜C를 늘 준비합니다. ‘공작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처럼 운도 꽤 작용합니다. 공작관은 여우, 곰, 능구렁이로 변신해야 해요. 공작원과 호흡이 잘 맞아서 그 파이프로 좋은 정보가 계속 흘러나와야 성공한 공작이에요. 그럼 금전적 보상을 해주고, 공작원은 그 자금을 이용해 더 좋은 정보를 뽑아냅니다. 희생, 헌신, 불편 감수 같은 단어에 거부감이 있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좋아요.”
-지휘해 성공한 공작 사례라면.
“밝힐 순 없고,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고위급을 포섭하는 공작을 주로 했습니다. 제가 데려온 사람은 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공개되질 않았어요. 대표적 성과는 김정일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김정운’으로 잘못 알려져 있을 때, 제 휴민트망으로부터 ‘김정은’ 이름이 명시된 북한 공식 문건을 최초 입수한 것입니다. 큰 보람을 느꼈지요.”
◇정보 찾으러 지옥까지 간다
-화이트 요원과 블랙 요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화이트 요원은 백색, 블랙 요원은 흑색이라 불러요. 백색은 해외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가는 직원들입니다. 외교관 여권을 들고 나가지만 국정원 출신이라는 걸 그 나라 정보기관이 다 알아요. 백색도 정보를 수집하지만 24시간 감시가 붙는다고 보면 됩니다. 최근 미국에서 노출된 ‘수미 테리 사건’처럼요. 최악의 경우 화이트 요원은 ‘페르소나 논 그라타(PNG·외교적 기피 인물)’로 추방될 뿐이고요.”
-그럼 블랙 요원은요?
“까마귀라고도 하는데, 공작 부서가 적임자를 선발해 내보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진짜 스파이’죠. 저는 본부에서 그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오래 했어요. 흑색은 사업체를 만들어 가기도 하고 여행사나 식당 등 목표에 접근하기 좋은 업종을 운영합니다. 보안 때문에 귀국하기 어렵고 전화나 이메일도 거의 사용하지 못해 고독하고 애환이 많은 존재예요.”
-그럼 어떻게 연락하나요.
“옛날에는 인편으로 보냈고 21세기에는 예컨대 ‘스테가노그라피’라고 사진이나 동영상 파일에 정보를 숨깁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9·11테러 때 사용한 암호화 기술이에요.”
-첩보와 정보는 어떻게 다릅니까.
“첩보는 ‘검증되지 않은 단계의 정보’를 말해요. 휴민트로 많이 들어오는데, 정보가 되려면 정확하고 필요하고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첩보 10개 중 정보는 1개 정도예요. 스파이들은 가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팔아서라도,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도 찾아간다는 각오로 일합니다.”
-2022년 11월 김정은이 미사일 발사장에 딸 주애를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 그 첩보를 사전에 입수했다면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만약 그런 첩보가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입수됐다면 즉시 보고되고 또 관심을 갖고 추적했을 거예요. 검증되지 않은 곳에서 나왔다면 보고하기도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김정은이 군 고위급 장교들 앞에서 ‘너희들이 앞으로 충성해야 할 사람‘이라며 아주 어린 딸 주애를 후계자처럼 소개했다는 첩보가 있긴 했어요.”
-대북 휴민트는 국정원 인기 부서인가요.
“제가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존재감이 없었어요. 그런데 정보의 퀄리티는 점점 좋아졌습니다. 배경에는 한국의 체제 우월성도 작용했을 거예요. 북한 요원들이 해외에 나오면 남북한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알게 되잖아요. 밀수 등 외화벌이에 상납까지 해야 하니 죽을 맛인 거죠. 그래서 공략하기 쉬워졌습니다. 작년엔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정치참사도 넘어왔잖아요. 지금 해외에 나온 북한 요원 중엔 ‘국정원이 나 좀 안 건드려주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봅니다.”
-제2의 스파이 전성시대가 오고 있나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전역에서 첩보와 방첩 활동이 활발해졌어요. 중동 정세도 악화됐고 중국과 북한 등에 대한 정보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신냉전으로 불릴 만한 국제 환경이 조성된 거예요. 이스라엘 모사드는 이란 테헤란에서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를 암살했고, 이란 최정예 혁명수비대의 핵심에도 모사드가 침투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국정원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조직이 흔들리고 그 부작용이 상당한데.
“국정원은 더 이상 권력기관이 아닙니다. 지난 정부에서 국내 정보 수집을 다 없앴고, 대북 방첩 활동과 관련해 수사권은 폐지됐어요. 국정원이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으론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직원 편 가르기가 심하고 사기는 떨어지고 부서 폐지와 인력 재배치로 전문성도 약화되는 것 같아요.”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요.
“국정원은 이제 더 힘을 뺄 곳이 없는 기관이 됐어요. 북한이라는 명확한 정보 목표가 있으니 정보기관은 그에 어울리는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성을 잃으면 야성이 없어지고 나약해져요. 국정원은 대통령이 ‘김정은 제거’를 명령할 때 곧장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하느냐 마느냐는 정무적인 영역이고요.”
◇국정원을 흔들지 마라
-휴민트는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인데.
“김정은이 열차를 타고 지방으로 현지 지도를 가는 동향은 인공위성 등 테킨트(과학기술을 통한 정보수집)로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가 왜 가는지, 건강은 어떤지, 핵무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휴민트(스파이를 통한 정보수집)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보수 정권은 북한 체제 붕괴를 위해 공격적인 공작을 추진하고, 진보 정권은 정상회담 등 남북 관계 구축에 우선순위를 뒀어요. 공작 활동은 어느 한쪽도 중단해선 안 됩니다.”
-남북한 스파이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한다고요?
“북한 스파이들은 인터넷만 연결해도 한국 뉴스가 넘치고 제3국을 우회해 쉽게 국내에 침투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스파이들은 북한 사람을 접촉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제한적이니 불리하죠. 하지만 한국은 막강한 자금력, 체제 우월성 등 보이지 않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 격차가 커져서 여건 만들기 쉬운 지금이 호시절이에요.”
-상대 국가의 스파이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 역이용하는 이중간첩도 있나요.
“다른 국가의 스파이를 포섭해 이중스파이로 활용하는 것은 스파이의 세계에서 많이 있는 일이에요. 대한민국도 당연히 그런 이중스파이를 활용합니다. 이중스파이는 매우 위험하고 고도의 두뇌싸움이 필요한 공작이지만 잘 운영될 경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북한 요원이 우리 쪽으로 자진해 걸어 들어오는 경우도 1년에 몇 건씩 발생합니다. 금전, 체제 불만, 개인 비리 노출로 인한 처벌 우려 등이 그 이유이고요.”
-국내에서 암약하는 북한 간첩은 어느 정도 규모일까요.
“직파 간첩은 줄었지만 내부적으로 자생한 간첩이 많은 게 문제예요. 규모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7~8년 전에 북한 간첩망이 국내 모처에 운영한 드보크(비밀 매설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국내인 간첩이 카페에서 북한에 보내는 보고문을 작성하다 붙잡힌 적도 있고요. ‘요즘 간첩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저는 ‘바로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 간첩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빨리 복원해야 해요.”
-국군정보사령부 비밀 요원들의 신상 정보가 담긴 군사 기밀을 중국 동포에게 유출한 혐의로 최근에 정보사 전 군무원이 구속됐는데.
“국정원 공작 부서가 정보사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큰집 역할을 합니다. 정보사의 활동 방식은 공격적이지만 투박해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보사 조직 전반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개선이 이뤄져야 합니다. 우리도 간첩의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글로벌 추세를 따라야 하고요.”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수미 테리 사건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국 내 대북 전문가로서 영향력 있는 인물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언하고 활동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국정원 화이트 요원들의 임무인데, 그 과정에서 방심하고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게 문제죠. 무조건 반성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이 사건으로 수미 테리라는 협조자를 잃었을뿐더러 국정원의 아마추어 행태가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았어요. 앞으로 누가 국정원에 협조하려 들겠느냐는 게 더 큰 손실입니다.”
-이 기회에 꼭 하고 싶은 말이라면.
“국정원은 과거에 정치 권력의 도구로 악용되면서 지탄을 받았고 아픔을 겪었습니다. 뼈저리게 반성하고 환골탈태해, 이제 본연의 업무를 벗어난 불법 행위는 못 하도록 제도화돼 있어요. 더 이상 외부에서 국정원을 흔들면 안 됩니다. 우리 요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십시오. 후배들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정보 활동에 매진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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