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진 재판·뒤바뀐 정치지형…검찰, ‘사법농단 유죄’ 끌어낼까
[주간경향] 지난 9월 11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311호 법정.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의 2심 첫 재판이 열렸다. 사법농단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하는 등 법관 독립을 침해한 사건이다.
2017년 3월 처음 의혹이 불거졌고, 2019년 2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을 기소했다.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사건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판사들의 성향을 파악하거나 불이익을 준 의혹이 터지면서 많은 시민, 판사가 분노했다. 하지만 재판이 5년 넘게 이어지면서 애초 재판을 담당한 검사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재판에서 검사들의 태도는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정치지형도 달라졌다. 문재인 정부 때 사법농단 수사를 지휘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사법농단 수사가 사법부 장악이라고 주장하는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나서 대통령이 됐다. 검찰을 향한 비판 여론, 혼잡한 정치 공방 속에 사법농단 수사·재판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을 교차하고 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자의 법관 독립 침해 행위에 마땅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양 전 대법원장, 재판 개입에 무관한가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법원행정처의 위법·부당한 재판 개입, 법관 독립 침해는 있었다고 인정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재판부에 결정을 취소한 뒤 다시 하라고 하거나, 대법원에 사건 쟁점에 관한 의견을 전달한 것이 재판 개입으로 인정됐다. 심의관에게 특정 사건 재판부에 대한 법리 전달, 심증 확인을 지시한 것은 사법행정권 남용이라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방안을 심의관들에게 검토시킨 것도 위법하다고 인정됐다. 위법으로 평가되진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법원행정처, 청와대, 외교부,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측이 각종 협의를 한 사실이 확인됐다.
다만 1심 재판부는 이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아래에서 벌인 일이고,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지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봤다. 또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어 형법상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위에선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 아래에서 스스로 했다는 1심 판결을 시민사회·법조단체들은 “제 식구 감싸기”, “사법 역사의 수치”라고 비판했다.
2심 재판에서도 사실관계, 공모 여부, 직권남용죄 법리 적용이 모두 중요한 쟁점이다.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검찰에 있다. 검찰은 1심 무죄 판결을 2심에서 유죄로 뒤집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 9월 11일 서울고법 형사14-1부(박혜선·오영상·임종효) 심리로 열린 2심 첫 재판 분위기는 5년 전 1심 재판 때와는 사뭇 달랐다. 1심 재판 초기엔 사법농단 사건 수사를 직접 담당했던 특수부 검사가 많게는 10명 가까이 법정에 나와 때론 언성을 높일 정도로 치열하게 주장하고 피고인 측과 공방을 벌였다. 2심 첫 재판엔 검사 4명이 나왔는데 적극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한 검사가 항소하는 이유와 재판 진행에 대한 의견을 건조하게 설명했을 뿐이다. 이 검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 등 사법부의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1심 무죄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들은 ‘1심에서 무죄가 나온 마당에 2심에서 더 심리할 것이 없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였다. 양 전 대법원장 측 이상원 변호사는 “검찰의 항소이유를 봐도 별다른 주장이 없다”며 “1심 판단을 뒤집기에는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 박 전 처장 측 노영보 변호사는 “1심에서 다 했는데 무엇을 더 하겠느냐”며 “서면을 냈으면 그것을 보면 되는 것이고 구술변론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노 변호사는 검찰이 항소이유서에 ‘법정모독성’ 말을 썼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노 변호사는 “검찰이 항소이유서에 1심 재판부나 법정에서 증언한 전·현직 법관들에 대해 ‘온정주의’, ‘대법원장 구하기’, ‘작심 재판’, ‘양심이 없다’고 썼는데 낯이 뜨겁다”며 “이런 항소이유서는 외국에선 법정모독죄로 처벌할 정도”라고 했다. 고 전 처장 측 고일광 변호사는 “사법부 위상 강화는 법원에 부여된 헌법적 사명인데, 검찰이 이를 직권남용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자의적인 프레임”이라며 “대법원이 사법행정권자는 재판에 개입할 수 없다고 이미 판단했는데 검찰은 이를 무시하고 여론에 호소하면서 다시 판단해 달라고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2022년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의 재판 개입 사건에서 무죄를 확정한 바 있다.
입증책임 있는 검찰, 소극적 태도 보이나
피고인 측이 ‘법정모독’, ‘여론 호소’와 같은 날 선 표현을 써가며 검찰을 비판했지만, 검찰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피고인 측은 검찰이 2심에서 어떤 추가 증거를 제시하고 증인을 신청할지를 담은 입증계획을 아직 제출하지 않은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 변호사는 “항소 이후 7~8개월이 됐는데 검찰이 아무런 입증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입증에 많은 필요가 없다면 항소이유를 (법정에서) 자세히 구술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사법농단 재판은 법원이 법원 내부에서 발생한 일을 스스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왔다. 1심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쪽 논리를 상당히 많이 수용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비판 글을 쓴 법관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것을 적법한 사법행정권 행사라고 본 게 대표적이다. 대법원장 인사권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했다. 동시에 법조계에선 재판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었다. 실체적 진실 규명이 지연되고 외부 상황에 따라 재판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검찰은 재판 초기부터 신속한 진행을 촉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이 재판 단계마다 형사소송법 원칙을 끄집어내 집요하게 따지면서 오랜 시간이 소요된 탓도 있고, 검찰이 애초 47개라는 지나치게 방대한 공소사실로 기소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갈수록 재판에서 검찰의 힘은 점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법농단 수사를 지휘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대통령이,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는 국민의힘 대표가 됐다. 국민의힘은 사법농단 수사가 ‘억지’라고 비판한 정당이다. 한 대표는 양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 후 “사실상 대법원의 수사 의뢰로 진행된 사건”이라며 책임을 미뤘다. 검찰은 1심에 대한 공식 입장을 간략하게만 냈다. 유독 사법농단 건에 소극적이다. 법조계에선 뒤바뀐 정치 구도와 검찰 모습이 무관치 않다는 말이 나왔다.
재판이 더디게 진행되는 가운데 제도 개선은 거꾸로 가고 있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 판사들이 윗선 눈치를 보는 관료화 현상이 사법농단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법원 개혁 정책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고 방치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추진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 사법행정자문회의 설치는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폐지했다. 오히려 대법원은 법관 다양화를 위해 ‘법조경력 10년 이상’의 사람을 법관으로 임용하게 한 법에서 기준을 ‘5년 이상’으로 줄이자고 주장하고 국회가 이를 논의 중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9월 6일 성명에서 “사법농단 사태를 통해 법원 내부에서만 경력을 쌓으며 관료화된 법관들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온전한 법조일원화 시행의 필요성은 재확인됐다”며 “국회와 법원은 이를 잊은 것인가”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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