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대기업들이 창업주의 경영 철학과 기업가 정신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창업주의 정신을 레거시(Legacy)로 보존하는데서 더 나아가 헤리티지(Heritage)로 재해석해 조직 정체성과 경영 철학을 임직원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기술과 자본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글로벌 격랑 속에서 이 같은 유산의 재조명은 불확실한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자기 확신의 근거가 되고 있다.
31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호암 이병철 창업회장이 남긴 철학을 단순히 기념물처럼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경영 현장에 맞게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 설립된 호암재단과 호암상이다. 과학·의학·예술·사회공헌 분야에서 인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발굴해 지금까지 182명에게 총 361억원을 수여했다.
2021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제안으로 과학상을 물리·수학, 화학·생명과학 두 부문으로 확대하며 창업주의 인재 제일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 이 회장은 4년째 사재를 출연하며 상의 위상을 높이고 있으며 매년 가을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거행되는 추도식에는 범 삼성가가 모여 창업자의 뜻을 되새긴다.
창업 2세대인 이건희 선대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며 철학을 사회적 가치로 확장했다. 그 대표적 산물이 1993년 문을 연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다. 올해로 개교 32주년을 맞은 이 학교는 국내 유일,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기업 운영 안내견 양성기관으로, 장애인과 안내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기여해 왔다. 단순한 사회공헌을 넘어 인간 존중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경영 철학을 실천한 결과물이다.

SK그룹은 뿌리 의식을 품은 공간을 통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개관 30주년을 맞은 수원 선경도서관에 25억원을 기부한 것이다. 이 도서관은 1995년 최종현 선대회장이 형인 최종건 창업회장의 애향 정신을 기려 세웠다.
수원은 SK의 모태인 선경직물이 출발한 도시이자 창업 형제의 고향이다. 선경도서관은 이러한 뿌리 의식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최 선대회장은 부지매입부터 건립, 장서 확충까지 직접 챙기며 형의 뜻을 현실로 옮겼고 선경도서관은 개관 이후 수원 시민들의 지식의 샘으로 자리잡았다.
최 선대회장이 강조했던 '배움은 곧 나눔'이라는 철학은 지금도 이어진다. 대학과 도서관에만 400억원 넘게 기부하며 인재 양성에 힘썼던 그의 정신은 오늘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내세우는 '사회적 가치 창출'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SK가 여전히 수원에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LG그룹은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기술입국(기술로 나라를 일으킨다) 신념을 다시 소환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구 명예회장의 경영 아래 LG는 수많은 국내 최초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고 기술 자립과 인재 육성을 기반으로 한 혁신을 이어갔다.
그는 민간기업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전국에 70여개 연구소를 세우며 R&D를 성장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기술 우선주의, 인재 육성 시스템, 인화(人和) 중심의 조직문화는 오늘날까지 LG의 기업 DNA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 구광모 회장이 AI·바이오·클린테크 같은 미래 성장축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도 구 명예회장이 남긴 기술입국 철학을 21세기 산업 언어로 계승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포스코그룹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유산을 포스코청암상을 통해 계승하고 있다. 2006년 제정된 이 상은 '창의·인재육성·희생·봉사'라는 창업이념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박 명예회장이 국가 산업화 과정에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면 청암상은 포스코가 사회적 책임을 기업 정체성의 일부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박 명예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포항제철을 건설하며 한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장인화 포스코홀딩스 회장이 취임 직후 국립현충원을 찾아 박 명예회장과 박 전 대통령 묘소를 함께 참배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뿌리를 재확인하려는 행보로 해석된다.
현재 포스코는 박 명예회장의 기업보국 정신을 바탕으로 철강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2차전지 소재, 수소 등 친환경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과거 제철을 통한 국가 산업화가 목표였다면, 오늘날에는 친환경 소재 기업으로의 전환을 통해 시대적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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