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들의 '드림 시티' 여행기

달리기를 사랑하는 도시로의 여행

The City that Loves Running

달리기의 호흡으로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 저 도시의 강물처럼 흘러가본다는 것. 어떠한 한계 너머의 나 자신을 찾는다는 것. 마라톤이란 여행을 하면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다.


도쿄에서의 어느 봄날 아침, 내 앞에는 2만여 명의 주자가 출발선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내 도쿄 마라톤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동시에 하늘로 쏘아 올린 흰 종이 조각이 벚꽃잎처럼 나부끼며 잠시 도시를 하얗게 지웠다. 그 사이로 주자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출발 직전에 몸을 풀고 있는 오스틴에게 말했다. “오스틴, 여행한다 생각하고 달려요.” 오스틴이 웃어 보였다. 그가 쓰고 있는 러닝용 고글 너머로 커다란 눈이 보였다. 아이처럼 눈이 빛났다. 그가 호각 소리만을 기다리는 경주마처럼 날 쏘아봤다면 슬펐을 것이다. 부디 오스틴이 자신만의 레이스를 펼치길 바랐다. 마라톤은 경쟁만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다. 주자들은 여행이나 명상처럼 새로운 세계로 달려나가기 위해 마라톤에 참가한다. 이 여행에는 단순한 규칙이 있다. 달려야 한다는 것. 걷는 것도 자전거를 타는 것도 아닌 달리기의 호흡으로 여행해야 한다는 것. 물론 달리기의 호흡에 익숙해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한 달에 200~300킬로미터를 달렸다. 지난 겨울엔 주로 새벽에 달렸다. 겨울의 새벽은 우물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아주 추운 날도 있었는데 두꺼운 옷과 모자, 장갑을 끼고 씩씩하게 달렸다. 새벽을 헤치고 달리다 보면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겨울 새벽에 몸이 적응할수록 나의 달리기는 가볍고 빨라졌다. 오스틴은 불과 3개월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유명 셰프로 알려져 있는 그는 중학생 때까지 미국에서 수영 선수로 활동했고 지금은 크로스핏과 사이클을 즐긴다. 마라톤 완주는 그의 오랜 버킷 리스트라고 했다. 나는 3개월 동안 오스틴의 달리기 훈련을 도우며 함께 도쿄 마라톤 완주를 준비했다. 여행에는 좋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다. 마라톤도 그렇다.

서퍼가 파도를 찾아 여행하듯이 러너는 달리기를 사랑하는 도시로 향한다. 마라톤은 달리기를 사랑하는 도시가 만든 축제다. 얼마나 달리기를 사랑하느냐면 오직 러너를 제외하고는 모두 멈춰 선다. 우선은 도시 전역의 주요 도로가 통제된다. 도롯가에 주차되어 있던 차들은 모두 자리를 옮겨야 한다. 작년 호주 골드코스트 마라톤에 갔을 때는 해변가의 주차장조차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파리 마라톤에서 만난 번화한 시내에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차가 사라진 세상을 달려나가는 기분이 좋다. 그동안 도시는 인간이 아닌 차를 중심으로 설계되어왔다. 인도는 도로에 비해 터무니없이 좁고 한가운데서 밀려나 있다. 우리는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비로소 인간이 도시의 주인공이 된 느낌. 마라톤을 위해 도로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마라톤이 열리는 도시의 시민들은 기꺼이 주말 동안 자원봉사자로 나선다. 해외에서 온 러너를 위해 통역을 하고,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거리 응원을 펼친다. 오사카 마라톤에 다녀온 한 친구는 식당가를 지날 때 한 초밥집 주인이 유부초밥을 나눠주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나는 그것이 마라톤의 연료라고 생각했다. 거리 응원이 사그라지면 마라톤이란 축제도 스위치를 끄고 막을 내리는 것이다.

오스틴과 나는 도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도쿄 마라톤 엑스포에 들렀다. 선수 등록을 하려면 마라톤 대회의 이름을 내건 엑스포에 가야 한다. 그곳에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GPS가 내장된 칩과 배번, 마라톤 참가 기념품 등을 지급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에너지 젤부터 러닝화, 트레드밀까지 온갖 러닝 용품을 선보이는 박람회도 열린다. 엑스포는 선수가 아니어도 출입할 수 있고 제품 구매도 가능하다. 한 여행사에서는 러너들을 위한 여행 상품에 마라톤 엑스포를 넣었을 정도다.

마라톤이 열리는 도시는 대회를 앞두고 조금 들떠 있다. 도쿄 마라톤에는 매년 3만~4만 명의 러너가 참가한다. 도쿄는 베를린, 시카고, 뉴욕 등과 함께 세계 6대 마라톤 도시로 손꼽힌다. 일반인은 접수를 하더라도 아주 낮은 확률로 추첨을 통해 선발되기에 이 마라톤 축제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체력은 물론 운이 함께해야 한다. 올해는 레전드 마라토너인 엘리우드 킵초게와 시판 하산이 이곳을 찾아 출발선에 섰다. 그들이 달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흥분되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에 과일 사탕처럼 반짝이는 러닝화를 신고 총총 걷는다. 그들의 걸음이 한 조각의 설탕처럼 가볍다. 러너들은 마라톤 전에 탄수화물을 몸에 축적하는 카보로딩(carbo-loading)을 한다. 3~4시간 이상 달리는 마라톤의 특성상 탄수화물을 몸에 충분히 쌓아두는 일종의 식이요법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는 마라토너를 위한 미식의 도시이기도 했다. 나는 일본의 인기 드라마 <심야식당>의 배경이 된 신주쿠에서 소바와 덮밥을 먹으며 에너지를 몸에 비축했다. 훈련으로 지쳐 있던 몸에 힘이 생기고 여기저기 쑤시던 근육도 서서히 치유되었다. 그렇게 도쿄에서의 며칠이 지나고 도쿄 마라톤이 시작된 것이다.

오스틴과 나는 도쿄 마라톤의 출발점인 도쿄도청을 빠져나와 신주쿠 시내를 향해 달렸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도쿄돔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성지인 아키하바라 거리를 지나 10킬로미터에 접어들 땐 시가 행진에 참여한 관광객처럼 도쿄 시내와 시민의 응원을 만끽했다. 콧수염을 붙이고 커다란 모자를 쓴 슈퍼 마리오 복장의 주자도 보였다. 스미다강을 따라 전통 공예 상점이 즐비한 아사쿠사를 달릴 땐 약간 오르막이 있었고 레이스의 절반쯤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라톤의 제1규칙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에너지 젤을 꺼내 먹었다. 도쿄에서도 가장 번화한 긴자의 와코 백화점 앞을 지날 땐 넓은 거리와 웅장한 건물들에 압도되어 잠시 피로를 잊기도 했다. 그러나 30킬로미터를 지나는 시점이었고 발걸음이 물에 젖은 자루처럼 무거웠다. 이제 밖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점이 된 것이다. 마라톤의 30킬로미터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결승선까지는 바닥만 보고 뛰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도쿄타워나 황궁의 고즈넉한 외벽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내 호흡의 경로와 몸의 무게와 근육의 미세한 통증을 느끼며 달렸다. 긴자의 명품 거리는 왕복 2차선의 비교적 좁은 도로였다. 주자와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레이스의 열기가 더 뜨거웠다. 결승선까지는 고작 2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오스틴은, 나는 왜 마라톤을 굳이 버킷 리스트에 넣었을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힘든 것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렸다. 아마 오스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이거 절대 다시 안 할 거야.”

오스틴이 레이스를 마치고 외친 첫마디다. 그러나 완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투정이라고 생각한다. 거룩한 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결승선에서의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온 것 같다. 먹고 마시고 여행하면서 말이다.

러너와 달리기를 사랑하는 도시들

골드코스트 마라톤

바다를 바라보면서 달릴 수 있다는 건 러너에게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서퍼스 파라다이스, 버레이 헤드로 이어지는 해변을 따라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단연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라톤 코스라고 생각했다. 마라톤 후의 리커버리는 그저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도쿄 마라톤

도쿄 마라톤은 세계 6대 마라톤에 속하는 아시아 유일의 대회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쿄 시내를 달리기로 여행하다 보면 새삼 이 도시가 가진 문화유산에 감탄하게 된다. 열띤 거리 응원은 세계 최고 마라톤이라 해도 손색없다.

파리 마라톤

샹젤리제거리에서 시작해 바스티유광장과 에펠탑, 트로카데로광장을 지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만 이 마라톤에 참가하기 전에 역사 공부가 필요했다. 도시를 이루는 거리와 건축물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다면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을 거다.

글을 쓴 이재위는 냉혹한 도시에서 모글리처럼 사는 작가. 매일 빠짐없이 걷고 달리고 산을 오르고 파도를 탄다. 매거진 <아웃도어>와 <고아웃>을 거쳐 <지큐>에서 일하고 있다. 서핑, 등산, 마라톤, 트레킹 등 자연 속에서 겪은 모험을 담은 책 <오늘 파도는 좋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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