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기억, 그리고 우리 삶의 진실

1999년 하버드대와 일리노이대 심리학자들이 진행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농구공을 주고받는 영상을 보여주며 흰 셔츠팀의 패스 횟수를 세라는 과제를 준 뒤 "고릴라를 봤는가?"라고 묻자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는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현상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목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바쁜 사람일수록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보고 있는 것"보다 "보고자 하는 것"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존재다.
왜곡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기억은 사실을 그대로 저장하는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퍼즐처럼 조각조각 흩어진 경험의 잔상이다. 기억 속 공백은 추측과 상상으로 채워지며 그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마치 실제로 겪은 것처럼 굳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왜곡된 기억'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개인의 우화(Personal Fable)'라고 부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각색하며 자신만의 '진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저장될 당시보다 꺼내보는 순간의 감정, 환경, 기대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언제나 지금의 나에 의해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바둑에서는 대국이 끝난 뒤 처음부터 다시 한 수씩 돌을 놓으며 반성하는 과정을 '복기'라 한다. 조직에서도 과제가 끝나면 복기하며 잘한 점과 놓친 점을 되짚는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복기의 핵심은 '몰라서 놓친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외면한 것'에 더 가까워진다. 우리가 눈앞에 벌어지는 문제를 외면하고 멀리 보이는 가능성만 기억한다면 결국 삶의 고삐를 놓치고 말 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대부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화가 폴 세잔은 똑같은 사과를 아침과 오후에 다르게 기억한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를 그냥 넘기지 않고 그 순간의 인식과 시선에 집중했다. 그리고 사과가 썩어갈 때까지 각도와 시점을 달리하며 그렸다. 사과 하나에서 세상을 본 사람이다. 결국 그는 단 하나의 사과로 파리를 넘어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사과가 아닌 자신의 시선을, 고정된 인식을 고치고자 한 노력 덕분이다. 이처럼 본질을 바라보는 태도는 순간의 충격에서 비롯된 반성과 재인식의 결과였다.
정치와 일상,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과연 어떤가? 최근 사회 곳곳, 특히 정치권에서는 왜곡된 기억에 사로잡힌 채 본질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여·야 모두가 과거의 단편을 자신에게 유리한 서사로만 포장한 채 진실은 뒷전이 되고 있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는 국민이 떠안고 있다. 민초들의 현실은 점점 왜곡된 기억의 그늘 속에서 더 외로워지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억압된 감정이 기억을 왜곡시킨다"고 말했다. 반복해서 왜곡되는 기억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감정의 억압이나 의지의 개입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억은 삶을 구성하는 재료이자 나를 만드는 이야기다. 그것이 온전하려면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기억의 퍼즐을 다시 맞출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왜곡된 기억이 만든 삶이 아닌, 진실된 시선이 이끄는 삶.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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