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에 최하고과, 복직하자 직무변경 “출산휴가·육아휴직도 제대로 못 쓴다” [출산율이 바닥인 이유]
SPECIAL REPORT
“임신하면 제가 낸 성과가 없어지나요? 입사 8년차인 지금까지 매년 고과를 잘 받았는데, 임신 사실을 알린 후 처음으로 최하 고과를 받았어요.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어서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고군분투하며 일했는데 지난 1년이 너무 허무하고 속상합니다.”
출산을 앞두고 있는 A(34)씨는 2022년도 인사평가 결과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았다. 충격을 받은 A씨가 면담을 신청하자 상사는 ‘올해 휴직에 들어가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해 임신 사실을 미리 알린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A씨는 “실적을 쌓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게 후회되고 회사에 정이 다 떨어졌다”며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자진해서 나가기를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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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 최저친데, 임신·출산·육아에 불이익 주는 직장 문화
저출산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가운데 직장에서 임신·출산·육아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여전히 속출하고 있다. 출산율이 매년 최저치를 경신해 ‘0.78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신기록’을 세우기까지는 경직되고 시대착오적인 직장 문화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일하는 부모 모두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출산 당사자인 여성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이 더 만연하다. 출산휴가, 육아휴직은 물론이고 그 단계에 도달하기도 전인 임신 소식을 알리는 것부터가 난관이기 때문이다.
임신한 직원이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례는 비단 A씨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하는 부모의 경력단절을 예방하고, 법률상담을 지원하는 지자체 직장맘지원센터와 직장갑질119 등 시민단체에는 임신·출산으로 인한 불이익 상담이 끊이지 않는다. 서울시 동부권직장맘지원센터의 김미정 법률팀장은 “고과를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주는 곳이 많다보니, 임신한 직원에게 ‘어차피 휴직할거니 이번엔 양보해라’라는 식으로 고과를 낮게 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직장인 여성에게 임신이 ‘행복’과 동시에 수많은 ‘고민’을 안겨주는 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가정이 적극적으로 자녀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대기업 직장인 B(29)씨는 “임신한 걸 알고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뻤지만 이내 ‘언제 밝혀야 최대한 불이익을 덜 받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며 “어렵게 들어온 직장인데 출산 후 복귀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맘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직장에 임신을 밝히는 시기를 두고 고민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임산부가 직장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가운데 임신기간에 활용할 수 있는 난임치료휴가, 임신기간 근로시간 단축, 태아검진 시간 허용 등의 정책을 적극 활용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특히 공무원이 아닌 일반 직장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설령 권리를 쟁취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요구하더라도 쓴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올해 하반기 출산을 앞둔 30대 직장인 C씨는 “임신 7주에 몸이 안 좋아서 임신기간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사용하겠다고 말했더니 대표로부터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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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3명 중 1명 “출산휴가 자유롭게 쓰기 어렵다"
상당수 직장인은 출산휴가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만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에게 설문한 결과 ‘출산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35.9%에 달했다. 직장인 3명 중 1명 꼴이다. 비정규직(54.3%), 5인 미만 사업장(59.9%), 월 임금 150만원 미만(65.3%) 등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고,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출산 휴가를 쓰기 어렵다고 답한 비율이 절반 이상이었다.
실제 출산휴가 사용자가 재직 중인 기업을 봐도 기업 규모가 클수록 활용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출산휴가자의 40.6%는 종사자 300명 이상인 기업에 재직 중이었고, 종사자가 50~299명인 기업 재직자는 25.8%, 5~49명인 기업 재직자는 26.8%, 5인 미만 기업 재직자는 5.5%였다. 직장에 따라 정책 활용도가 갈리면서 부모가 함께 출산휴가를 사용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상황’이 ‘이상(理想)’이 됐다.
출산 당사자인 여성조차 출산휴가를 100% 활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2020년 출생아 수는 27만2337명. 이들을 낳은 여성 중 44%는 출산 당일 취업 상태였다. 다태아 산모를 고려하더라도 최소 11만명의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하던 중에 아이를 낳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같은 해 출산휴가를 사용한 여성은 6만9690명에 불과했다. 11만명의 63% 수준이다. 남성 출산휴가자는 여성 휴가자의 28%에도 못 미치는 1만9684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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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모두 육아휴직 2.1%, 갈 길 먼 아빠의 육아휴직
육아휴직 사용은 더 요원하다. 직장갑질119의 조사 결과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기 어렵다’고 답한 직장인은 43.1%로 출산휴가에 대한 설문보다 부정적인 응답이 더 높았다. 육아휴직 역시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임금이 낮을수록 자유롭게 쓸 수 없다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66.7%)와 월 임금이 150만원 미만(62.9%)인 경우에는 10명 중 6명 이상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실제로 2021년 전국보육실태조사에서 맞벌이 2500가정의 육아휴직 사용 현황을 조사한 결과 부모 모두 휴직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63%에 달했다.
출산휴가와 마찬가지로 아빠의 육아휴직은 갈 길이 더 멀다. 공동양육 개념이 확산하며 최근 남성 육아휴직자가 크게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전체 육아휴직자 통계를 보면 여전히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남성 육아휴직자는 2011년 3053명에서 2021년 4만1910명으로 10년 새 13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2021년 육아휴직자 17만3631명 중 75.9%(13만1721명)은 여성이다. 남성은 24.1%에 그쳤다. 맞벌이 2500가정 중 아빠만 육아휴직을 사용한 가정(2.1%)은 엄마만 사용한 가정(32.6%)보다 크게 적었고, 심지어 부모 모두 휴직한(2.4%) 사례보다 저조했다.
특히 남성이 여성보다 육아정책을 사용하기 더 어려운 현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주 양육자를 엄마로 한정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3세 아이의 아빠인 11년차 대기업 직장인 D(38)씨는 “사례가 드물어서 그런지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면 ‘일이 힘들어서 쉰다’ ‘곧 퇴사할 사람’이라고 보는 분위기라 육아휴직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8월부터 육아휴직 중인 E(32·남)씨 역시 “육아휴직 계획을 밝혔을 때 ‘너가 왜?’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아직까지 아빠가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게 공감대를 못 사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근로자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직장에서 해당 정책을 사용한 근로자들이 공공연하게 불이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혜인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대한 불이익은 불법이지만, 현실에서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는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며 “근로자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것처럼 다른 이유를 만들어 부당함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기에도 법과 현실의 간극은 크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마치고 직장에 복귀한 F(35·여)씨는 “남편도 육아휴직을 하고 싶어 하지만 복직하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분위기라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 1학년 자녀를 둔 G(34·여)씨는 “이른 오후에 집에 오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남편이 육아휴직에 들어갔는데, 불이익을 우려해 성과평가가 끝난 후 휴직 계획을 밝히니 ‘남아있을 사람도 아닌데 왜 고과를 잘 받았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고 전했다. 현재 G씨의 남편은 복직 후 부서 및 직무 변경을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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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vs ‘출산’, ‘일’ vs ‘육아’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않아야
육아 정책의 활용도를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출산율을 제고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김미정 법률팀장은 “일하고 싶은 여성이 ‘일’과 ‘출산’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않고 직장을 다닐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육아정책을 활용한 후 복직했을 때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일정 갯수 이상 해당되는 경우 불이익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를 도입하는 걸 고려할만 하다”고 덧붙였다. 류외희 서울시 종로구육아종합지원센터장 역시 “부모가 일하면서 아이를 케어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의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 사용을 장려해 보편적 권리로서 육아정책을 사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나영 육아정책연구소 부연구위원은 “남성의 육아휴직을 강제하고 관리·감독을 강화해 사회 전반에 육아 정책 사용 분위기를 확산해야하고, 장기적으로는 근로시간을 줄여 부모가 아이를 직접 케어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슬기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현행 배우자 출산휴가 10일은 아빠가 주 양육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엔 너무 짧다”며 “아빠의 육아휴직을 의무화할 수 없다면, 출산휴가라도 기존 10일에서 ‘한 달’로 늘리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스웨덴의 경우 남성에게 육아휴직을 의무적으로 할당한 이후 출산율이 반등했다. 스웨덴의 합계출산율이 1999년 1.5명에서 2019년 1.7명으로 늘어난 배경에는 여성의 경력단절을 완화하고 남성의 육아 참여를 유도한 정책이 있었다. 독일 역시 1994년 1.24명까지 떨어졌던 합계출산율을 2020년 1.53까지 끌어올린 국가다. 독일은 가사 분담 등 성평등 인식을 정착하고, 탄력근로제를 활용해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일과 가정의 양립이 여성 경력 단절 문제, 육아 정책 사용률 제고, 출산율까지 잡을 수 있는 키 포인트가 되는 셈이다. 아빠들의 적극적인 육아참여와 정책 사용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는 20명의 아빠가 아이와 함께 케이크 만들기 활동에 나섰다.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폈다. 4살 아이와 참여한 17년차 직장인 H(46·남)씨는 “아이와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아빠를 많이 찾고, 출근 후 아이가 아빠를 찾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보람차다”고 말했다.
윤혜인 기자 yun.hy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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