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은행들에는 ‘기회의 땅’ 최빈국 빈농에겐 ‘절망의 땅’
“무책임한 대출” “정상적인 기업활동” 맞선 가운데 ‘빚의 굴레’ 빠진 농민 고통 더해
‘캄보디아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금융) 기관의 비윤리적인 대출 관행으로 현지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목소리가 캄보디아 시민사회에서 나오고 있다. 해당 기관 중에는 한국의 금융기업도 포함돼 있다. 이 문제 제기에 주목한 기업과인권네트워크에서 현지 조사에 나섰다. 기업과인권네트워크는 한국 기업의 해외사업과 관련된 인권, 노동, 환경 문제를 감시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국내 인권·노동·환경·공익법단체의 연대체이다. 한겨레21은 2024년 8월7일부터 13일까지 7일 동안 이들의 현지 조사에 동행해 ‘프라삭’을 인수한 KB국민은행,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이 만든 ‘비전펀드’를 인수한 우리은행의 캄보디아 채무자 14가구를 심층 인터뷰했다. 그러면서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과 북동부의 한 시골 마을 등 두 마을을 방문해 이곳 주민들의 삶이 이 금융기관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함께 살폈다. —편집자 주
2024년 8월11일 캄보디아 프놈펜 시내의 한 사무실. 마르고 작은 체구의 16살 소녀 수아(가명)가 들어왔다. 수아는 질끈 묶은 머리에 맨발이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경계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수아는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집안 빚을 갚기 위해 2년 전 학교를 그만두고 농장 일을 시작했는데, 제초제 등으로 인해 목과 폐 상태가 나빠졌다.
카사바와 캐슈너트 농사 등을 지으며 60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수아는 몇 년째 빚에 시달리고 있다. 시작은 2020년이었다. 오래전 카사바 농사 투자를 위해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금융) 기관인 ‘비전펀드’에서 돈을 빌렸다 잘 갚은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비전펀드에서 은행이 됐다는 곳’에서 1만달러(1319만여원)를 대출했다. 하지만 수아네 농지 일부가 광산 기업의 주변 개발로 헐값에 수용되는 바람에 제대로 빚을 상환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Credit officer)의 빚 상환 독촉이 이어졌다. 수아가 학교를 그만두고 농장 일을 시작한 까닭이다. 수아가 농장에서 버는 일당은 1만리엘(3200원) 남짓. 그에 반해 2024년 8월 현재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은 원금만 8천달러(1056만원)이고, 연 이자율은 원금의 18%에 이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빚 상환 독촉이 사채 사용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토지를 헐값에라도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의 압박에 농사지을 때 필요한 트랙터와 등교 등 일상에 필요한 오토바이 등이 사라져갔다. 연 이자율 120%에 이르는 사채업자의 돈 500만리엘(162만원)까지 빌리게 된 탓이다.
수아에게 ‘비전펀드’의 대출문서를 보여달라고 하자 수아는 엄마의 커다란 비닐 소재 가방을 뒤져 문서를 꺼냈다. 그걸 받아든 수아 엄마는 은행 이름을 보여줬다. 대출 문서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파란색 로고가 찍혀 있었다. ‘WOORI BANK’(우리은행)였다.
‘월드비전 비전펀드’ 인수한 우리은행… “‘NGO 은행’ 대출 쉬웠다”
캄보디아 소녀 가정의 소액금융 대출문서에서 우리은행 로고가 발견된 까닭은, 우리은행이 2018년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월드비전이 만든 ‘비전펀드’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2014년에도 캄보디아 소액금융 기관인 ‘말리스’를 인수했고, 두 회사를 합병(WB파이낸스)해 2022년 1월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상업은행(캄보디아우리은행) 인가를 받았다. 한국의 은행이 캄보디아 상업은행으로 곧장 진출하긴 어렵기 때문에 먼저 소액금융 기관을 사들이고 합병, 자본금 기준을 충족시킨 뒤 상업은행으로 전환 허가를 받는 우회 경로를 택한 것이다.
마이크로파이낸스는 저소득층이나 금융서비스 소외계층을 위해 무담보 소액대출 등을 해주는 소액금융을 일컫는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창안했다. 신용이 없는 최빈국 빈곤층을 대상으로 소액을 대출해주고 이들이 이 대출금을 밑천 삼아 자립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시장친화형 빈곤대책으로 추앙받으며 크게 확산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도 그런 사례 국가 중 하나다. 캄보디아에선 특히 글을 쓰거나 읽지 못하는 농민들 혹은 금융 문해력이 낮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가진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유도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농민들이 결국 토지를 빼앗기거나 소액금융을 매개로 사채 빚더미에 안게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무담보 대출이라는 소액금융의 취지를 훼손하는 행태인 셈인데, 여기에 한국의 은행들이 개입돼 있다.
수아네 가족도 조상에게 농지를 물려받아 수확물로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선주민(크메르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이었다. 게다가 수아의 엄마는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한다. 은행의 대출영업전담 직원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농지를 가진 이들에게 대출을 권유하고, 가난으로 생계가 어려운 이들은 덜컥 대출에 손댔다가 빚 상환 독촉의 늪에 빠진다. “(대출영업전담 직원들이) 광고하러 왔어요. 저한테 대출이 쉽다고, 마을에 대출을 권유하는 광고를 해달라고 했고요. 저도 사람들에게 이 NGO 은행은 돈을 매우 쉽게 빌려준다고 말했어요. 처음엔 (대출이) 쉬웠지만, 나중엔 (상환이) 어려워졌어요.” 수아 엄마의 말이다. 수아 엄마가 우리은행을 ‘NGO 은행’이라고 표현한 건, 처음 돈을 빌릴 때 월드비전의 ‘비전펀드’였기 때문이다.
빚은 곧 빚으로 빚을 갚는 구조로 이어졌다. 수아는 “우리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이 새 대출을 받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했고, 사채업자를 추천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채를 써서 우리은행 빚을 일부 갚고 나면, 다시 우리은행에 새로 빚을 더 내어서 이번에는 사채 빚을 갚게 하는 식으로 빚을 불려나갔다.
현지 인권단체인 ‘리카도’는 수아네 가족이 이렇게 ‘빚으로 빚을 갚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고 밝혔다. 또 신규 대출을 처리할 때마다 은행에 큰 서비스 수수료도 내야 했다고 전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소액금융 기관이 취급하는 소액대출에 대한 이자율이 연 18%를 초과하지 못하게 규제하지만, 서비스 수수료나 연체료, 사채로의 상환 유도 등으로 이 규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 과정을 거치면 최빈국 빈곤 농민은 완전한 경제적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프라삭 인수 KB국민은행… “대출 직원이 돈 빌려 빚 갚으랬다”
우리은행만이 아니었다. 캄보디아 북동부에서 만난 30대 후반 보파(가명) 부부는 케이비(KB)국민은행이 현지 소액금융 기관 ‘프라삭’을 인수해 만든 ‘KB프라삭’에서 2018년 약 3천달러(400만원)를 빌렸다.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농사짓는 데 필요한 돈이었다. 첫 대출 때만 해도 카사바와 캐슈너트 수확량이 나쁘지 않아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9년 또 한 번 농사에 필요한 돈 5천달러(660만원)를 빌렸고, 이때는 수확량이 나빠지면서 대출금을 다 갚지 못했다. 이후 2022년에는 세 번째 대출로 8천달러(1050만원)를 빌려야 했는데, 여기에서 2019년 대출금에서 갚지 못한 원금과 서비스 수수료, 이자 등을 바로 상환하게 되면서 달랑 5천달러만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수확량이 좋아지지 않아 대출금을 다 갚지 못했다.
보파 부부가 이 과정에서 겪은 일도 수아 가족과 비슷하다. “대출영업전담 직원은 사채를 이용하거나 오토바이를 팔아서 대출금을 갚으라고 했어요. 어쩔 수 없이 사채 100만리엘(약 32만원)을 빌렸는데, 월 이자율이 10%(연 이자율 120%)였어요. 사채를 쓰면서 부채가 크게 늘었어요. 땅도 매물로 내놓았어요. 제가 사는 마을에는 은행 대출금 5천달러를 갚지 못해 남편이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는데, 지역 당국은 그런 문제가 생기면 가족 내부 문제로 비공개 처리해요.” 보파의 말이다.
보파 역시 수아 엄마처럼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보파는 자신과 같은 농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잃는다는 건 결국 일용직 농장 노동자 등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보파의 아내는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한) 마을 사람들이 베트남 회사 소유의 고무농장에 일하러 갔다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빚만 지고 돌아온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 은행 직원들을 마을의 각 가정에 보내 대출을 받으라고 권유하고, 절차가 쉽다고 하고, 토지 소유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대출과 이자가 어떤 것인지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대출을 받으면 어떤 이자로 어떻게 되는지 자세한 내용을 홍보해야 합니다.” 보파가 말했다.
동남아시아에도 예외 없이 기후위기가 영향을 끼치면서 농사 수확량은 점점 악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액금융을 거쳐 사채로 내몰리는 사례는 수아네와 보파 부부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KB프라삭 채무자인 농민 가이(가명·42)도 “캐슈너트는 11월~1월에 꽃을 피우는데, 기후위기로 날이 더워지면서 꽃이 너무 말라 많이 떨어졌고, 평소보다 열매도 적게 맺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시 대출 상환이 어려워졌고, 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은 “이웃에서라도 돈을 빌리라”고 했으며, “은행뿐 아니라 다른 사채업자에게도 대출을 더 받아 감옥에 가는 상황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경작지 잃고 반강제적 아동노동… 빈곤 심화하고 대물림까지
이들이 겪은 일은 캄보디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일까. 개발인류학자인 프랑크 블리스 독일 함부르크대학 교수가 2022년 독일 정부 예산을 받아 수행한 연구 결과(1533호 “소액금융은 극빈층에 부적합, 그들에겐 지원이 필요하다” 참조)를 보면 실태를 가늠할 수 있다. 블리스 교수는 캄보디아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1388가구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하고 100명을 심층 인터뷰해 캄보디아 내 소액금융 기관들이 정말 주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지 분석했다. 분석 결과 블리스 교수가 낸 결론은 소액금융 기관들이 “공격적인 고객 (대출) 권유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블리스 교수는 특히 캄보디아 소액금융 대출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로 공급 과잉인데도 금융기관들이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이라는 담보를 감안해 현금 흐름을 무시한 무책임한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블리스 교수는 연구 보고서에서 “마이크로파이낸스센터 등의 연구에 따르면 2017년 이미 프놈펜을 제외한 캄보디아는 소액금융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대출담당자가 마을에 매일 상주하는 경우가 많아 마을에서도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며 “채무자의 과다부채와 토지 부실 매각 사이의 연관성이 확인됐다. 소액금융 기관 관련 은행들이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고 썼다.
캄보디아 시민사회 인권단체의 비판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수아네와 보파 부부, 가이의 사례들처럼 과도한 부채가 ‘경작지 손실’을 만들어 농민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KB프라삭에서 돈을 빌린 농부 로맘 폰(가명·37)은 헐값에 농지를 잃기 직전에 처한 사례였다. 그는 “은행 직원이 매달 찾아와 땅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내가 가진 땅은 농사짓기 아주 좋은 비옥한 땅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1만7500달러(2326만여원)에 팔 수 있는 땅인데, 급하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1만달러(1330만원)에 팔게 됐다”고 호소했다. 농사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어 시장에 팔 과일을 찾기 위해 10일 동안 숲에 머물다가 집에 돌아오는 부수적 경제활동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은행 직원이 찾아와 20~30분 동안 앉아 있으면서 돈을 갚으라고 아내에게 반복해서 독촉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둘째, 대출금을 제때 상환해야 한다는 강박과 높은 이자율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아동노동’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동은 학교 교육을 그만두게 되고, 낮은 금융 문해력은 대물림된다. 자녀 넷과 입양아 둘을 키우는 농부 마오(가명·46)의 집은 아이들이 모두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입양한 아이 2명은 집안 형편 때문에 마을을 떠나야 했던 어느 미혼모의 아이와 여동생의 아이다. 장성한 아들이 공사장에서 일하고, 16살 딸도 학교를 포기하고 가게에서 일하지만 빚을 감당하기 힘들다.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야 하는 등 돈이 필요해 우리은행에서 빌린 돈은, 다른 사례들처럼 사채로 이어졌다. 우리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 개인 대출을 받으면서 월 이자율 10%, 연 이자율 120%의 늪에 빠진 것이다.
KB프라삭 채무자인 칸(가명·44)도 “첫딸이 학비가 걱정된다며 11학년에 학교를 그만뒀다. 셋째 아들은 7학년 때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둘째 딸은 10학년에 다니는데 아이가 학교만 마칠 수 있다면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빚은 꼭 상환할 테니 이자율만 좀 낮춰줬으면 좋겠다. 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들은 윤리가 없었다. 마을로 찾아와서 우리 집 앞에서 (빚 상환을) 독촉하고, 큰 소리가 들리면 마을 사람이 모두 나와 심각하게 보고, 자녀와 동네 어린아이들까지 그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셋째, 미등록 체류나 가족 간 이별 등 비자발적인 노동 이주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터뷰한 한 중년 여성이 전한 이웃의 사례는 비극적이었다. 그는 “농업은 망하고 막일꾼 노릇을 할 곳도 구하지 못해 암울해하던 한 이웃이 은행과 사채업자가 압박하자 오토바이 트레일러에다 아이들 5명을 태우고 새벽에 출발했는데, 초조한 채로 운전하다보니 자동차와 부딪혀 아이 둘이 세상을 떠났다”며 “은행이 갚을 기간을 더 주지 않고 다른 기관에서 대출해서라도 갚으라고 해서 생긴 위기였다”고 말했다.
넷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식량 불안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수아네도 이 문제에 대해 말을 보탰다. “쌀과 숲에서 뜯은 나물을 넣어 죽을 끓인다”거나 “인권단체가 지원해준 생선 통조림 1개로 3일 동안 먹은 적이 있다”와 같은 얘기다.
판잣집 수준 집주인에게 토지 담보 대출 ‘유혹’
캄보디아 북동부의 한 선주민 마을에 사는 농부 노이(가명·49)도 자신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그는 KB프라삭과 우리은행의 채무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 그는 “우리 집에도 은행 직원이 찾아와 (빚 상환을) 독촉하긴 했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집에는 은행 직원이 찾아가 독촉하는 걸 멈췄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을에 있는 한 이웃집에서 남편이 사망하자 그 집 아내와 아이들에게 빚을 갚으라 독촉하러 찾아왔는데, 정작 그 집 아내는 읽고 쓰는 방법을 모를 뿐만 아니라 선주민이어서 크메르어로 말하는 것조차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겨레21은 2024년 8월10일, 노이가 사는 마을을 직접 방문해봤다. 마을에는 세이브더칠드런과 같은 국제구호개발 NGO들의 홍보물이 벽에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쓰레기 더미에도 NGO 관련 서류가 보였다. 윗옷을 입지 않은 여성 노인이 더운 날씨 탓에 의자에 늘어져 앉아 있기도 했다. 특히 이 마을은 주거 상태가 열악했다. 가옥이라고 해봐야 대나무 같은 얇은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벽면 위에 낡은 포대로 찢어진 부분을 막아놓은 사실상의 움막이었다. 철 소재의 얇은 지붕은 군데군데 덧대고 녹슬어 재건이 필요했다. 집 안에는 흙바닥에 평상만 놓여 있었고, 가구랄 것도 없어 칫솔 등 생활필수품들은 벽면에 얽혀 있는 나무 사이에 끼워놓았다. ‘집을 짓기 위해 대출을 받았다’는 가난한 농민들의 말은 한국인이 상상하는 대출을 통한 주택 자산 불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로지 최저주거기준을 좀더 낫게 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려는 대출이라는 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을에 유리창과 견고한 벽면이 있는, 양옥 형태로 지어진 주택은 하나뿐인데, 이 마을의 유일한 도매중개상 집이라고 했다. 나머지 집들은 형편이 좀 나은 경우도, 두꺼운 나무 골조에 탄탄한 나무판자를 연결해 만든 수준이었다. 한 인터뷰이는 “2년만 지나도 집이 너무 낡아 대출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토지라는 담보를 보유한 농민들이 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들의 대출 권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업은행” 소액대출 책임과 기업 윤리 어디에
한국의 은행들은 이런 실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받은 ‘KB국민은행 답변서’를 보면, 은행은 비윤리적 관행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프라삭은행은 대출거래약정서 내 환경보호, 사회 및 거버넌스 원칙을 지키고” “KB프라삭 채권 추심시 임직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 강령을 통해 고객의 자발적인 의지로 채무를 상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은행도 대출업무담당 직원들을 대상으로 윤리행동 강령을 교육하고 있고, 위법 행위가 확인된 경우 법인 내부 징계 규정에 따라 조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현지 조사를 했던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강지윤 미국변호사는 인력 운용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지적했다. “KB프라삭 은행의 2023년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KB가 프라삭을 완전 인수한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총 순수익(세후)이 원화로 약 5800억원입니다. KB가 최빈국 빈곤층을 대상으로 이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채권의 효과적인 회수를 보장할 수 있는 대출영업전담 직원의 인센티브제도라고 생각합니다. KB프라삭 은행 임원이 직접 밝힌 내용에 따르면, 은행 대출영업전담 직원의 기본 급여는 한 달에 250달러지만, 회수한 금액의 15%가 인센티브로 누적돼 한 달에 최대 1천달러까지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해당 직원이 알선한 대출 전체에서 부실채권 비율이 3%를 넘어가면 인센티브를 아예 못 받아요. 이러한 구조가 직원이 채권 회수를 위해 사적 대출 권유나 토지 매매 압박 등 어떤 방식이라도 쓰게끔 하는 강력한 유인이 되는 겁니다.”
결국 KB프라삭과 우리은행의 대출 관행은 전형적인 ‘약탈적 대출’이라 할 수 있다. 약탈적 대출은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능력을 벗어난 과다대출행위를 일컫는다. 캄보디아 가구의 연평균 수입이 2021년 기준 1591달러인데, KB프라삭의 2023년 연간보고서에서 평균 대출 금액은 8560달러에 이른다. 특히 캄보디아에선 2001년 토지법 제정으로 토지권 보급이 본격적으로 진행됐고, 땅값이 계속 오르면서 농민들은 실제 수입에 견줘 높은 가치를 지닌 토지권을 갖게 됐다. 소액금융 기관들이 이 토지권을 노리고 과다대출을 해줬고, 토지를 팔아서라도 상환하도록 압박하며 극빈층을 대상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런 문제를 블룸버그나 가디언 등 국외 언론도 보도한 적이 있는데, 이 보도들 역시 공히 ‘캄보디아 빈곤층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마이크로파이낸스의 취지 때문에 세계은행그룹 개발금융기관인 국제금융공사(IFC)의 투자가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왔는데, 현장에선 오히려 금융착취와 토지수탈이 발생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이에 IFC의 준법담당옴부즈맨(CAO) 사무소는 캄보디아에 있는 6개 주요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기관에는 KB프라삭이 포함됐다.
하지만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상업은행’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대출금 미상환에 따른 손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영업에 따른 이익 역시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은행들이 소액금융 기관을 인수하면서 ‘빈곤층 지원’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KB프라삭 부대표가 2023년에 한 머니투데이 방송 인터뷰를 보면 “5천달러 이하 소액금융이 전체 포트폴리오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대출 포트폴리오의 90% 이상이 지방 지역 영업에 집중돼 있다”며 “이는 자칫 소외받기 쉬운 지방 지역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은행이 ‘비전펀드’를 인수했을 당시 캄보디아 현지매체인 프놈펜포스트 기사에도 비전펀드 관계자가 ‘빈곤층이나 소액대출을 받은 기존 고객들은 우리은행이 소유한 비전펀드의 전국 지점망을 통해 계속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우리은행이 비전펀드의 비전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전문가들 “소액금융 여전히 필요” vs “빌려준 쪽도 책임”
경제학자들이 최빈국에서 마이크로파이낸스가 악용되는 이런 실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부원장은 “은행 입장에선 돈을 빌려주고 신용 위험을 조절하는 방법이 담보를 잡거나 신용 정보로 평가하는 건데, 개발도상국에는 둘 다 없는 사람이 많다”며 “마이크로파이낸스에서 중요한 건 ‘이자율이 얼마나 낮으냐’가 아니고 ‘이자율은 고사하고 돈을 못 빌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걸 풀어주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 매립지 마을 당까오 지역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극빈층을 관찰하고 문제점 개선을 모색했던 김부열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개발경제학)도 마이크로파이낸스 악용 사례에 대한 비판이 극빈층에 끼칠 영향에 대해 우려했다. “사람들이 이자율 계산도 정확히 못하기 때문에 이자율이 500%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매주 와서 돈 받아 가고 애들 학교 못 가게 하고 쓰레기 주우라고 하는 그런 사채시장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이크로파이낸스를 비판하려면 그 100배쯤 되는 강도로 사채시장을 같이 비판해야 해요.”
다만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은행 이자율을 제한하면 사채시장이 비대해지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신용 평가를 해서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담보를 잡아서 돈을 빌려주는 건 기본적으로 전당포 형식이다. 빌린 사람도 책임이 있지만 빌려준 사람도 평가에 대한 책임이 있다. 거기(최빈국)까지 가서, 그렇게(현금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토지를 담보로 대출해주는 비즈니스 관행)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양현준 서울대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는 “한국의 은행들이 캄보디아 빈곤층을 대상으로 큰 이익을 거두면서,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실효성 있는 채무조정 등의 구제 조처는 외면하고 있다”며 “이는 유엔의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 등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에 관한 국제기준에 반하고, 은행들이 스스로 내세운 인권원칙과 윤리강령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여기, 빈곤층 위한 소액금융의 살풍경
블리스 교수가 수행한 1388가구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대부분 캄보디아인이 대출 기회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대출을 근본적으로 중단해 소액금융 부문을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체는 거의 없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캄보디아 소액금융의 전체 풍경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삶은 분명히 망가지고 있고 “빈곤 감소라는 비전은 흐려져”가고 있다.
인터뷰이 가운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거리에서 국수를 팔거나 이웃의 빨래를 해주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하며 울었다. “내 얼굴과 아이들 사진을 찍어서라도 한국에 알려주세요. 우리는 빚을 갚을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빚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월 상환액을 150달러든 200달러든 양해해주면 몇 년에 걸려서라도 끝까지 상환할 겁니다. 집이 담보로 잡혔는데, 아이들은 자신들은 절에 가서 자도 상관없다고 말해요.”
캄보디아=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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