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제구, 무엇이 먼저인가?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한국시절, 페르난도 아로요라는 투수코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경험도 있었고, 마이너의 코치 경험도 풍부했습니다.

그 둘이 한국에서 첫 시즌을 보내던 2008년의 어느날, 아로요 코치는 직전 경기 등판에서 제구를 잡지 못했던 한 강속구 투수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운좋게 그가 그 강속구 투수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는 95마일의 공을 던질 수 있다. 그걸 너처럼 그냥 던지는 것은 throw다. 그 95마일의 공을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던지는 것을 PITCH라고 한다. 야구장 마운드 위에서 공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을 Pitcher라고 부른다. Pitcher는 Pitch를 해야하는 사람이다. 너는 Pitcher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던져라."

노장이었던 아로요 코치는 그 강속구 투수에게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타이르는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곁에서 이 대화를 들었던 저는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페르난도 아로요 투수코치와 선수시절의 임경완 코치. 페르난도 아로요 코치는 2019년 투수 코디네이터로 다시 롯데에 복귀했다가 개인 사정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제공 OSEN>

'프로선수에게 저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게 맞나? 어떻게 스트라이크를 던지는가를 가르쳐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의문이 풀린 것은 제가 야구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난 후입니다. 왜 아로요 코치는 구체적인 제구의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걸까요? 그 답은 투수의 제구를 잡는 티칭 혹은 코칭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구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구력의 향상은 오로지 투수 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모두가 다릅니다. 체형이 다르고, 팔높이가 다르고, 개개인이 가진 악력이 다릅니다. 따라서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가는 공의 회전과 궤적은 같은 구종을 구사한다고 치더라도 모든 투수가 다 다릅니다. 그래서 코치의 입장에서 선수들에게 ‘이 동작으로 해야 제구력을 향상시킬 수 있어’라는 획일화된 권유를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구를 향상시키는 방법이 정말 없냐고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현재 모든 야구 선수가 하고 있습니다. 'Playing catch', 우리가 흔히 쓰는 일본식 표현인 '캐치볼'입니다. 점점 짧은 거리부터 점점 거리를 늘려가면서 공을 주고 받는 '캐칭 게임'(이렇게도 부릅니다)은 그냥 어깨를 풀기 위해서 하는 준비 운동이 아니라 선수들의 투구 밸런스도 함께 점검을 하고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지도 점검을 할 수 있는 투수에게는 매우 신성한 훈련입니다.

이걸 조금 구체화시켜서 언급한 투수코치가 있습니다. MLB에서 성과를 보여준 투수코치 중 마이크 매덕스라는 코치입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컨트롤의 마술사였던 그렉 매덕스의 형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시죠,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는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마운드에서 포수 미트까지의 3분의 2 지점이다. 투수는 본인이 투구 3분의 2 지점의 어디를 통과시켰을 때 공이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는지를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어디를 통과 시켜야 타자의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경우, 볼카운트가 투수에게 불리하거나 반드시 스트라이크를 던져야하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다."

마이크 매덕스는 마운드에서 포수 미트까지의 3분의 2 지점 - 대략 12미터 지점이 되겠죠 - 에서 어디를 지나가야 스트라이크가 되는지를 투수가 알고 있어야 언제나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포수의 미트까지 18.44m 지점을 조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쪽의 본인만이 알고 있는 지점을 조준한다는 뜻이죠.

뉴욕 메츠 시절, MLB에서도 인정하는 좋은 커멘드와 컨트롤을 보여줬던 서재응 현 기아코치는 본인이 제구를 잡던 시절의 훈련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츠 시절 컨트롤 아티스트로 불렸던 서재응 현 기아 타이거즈 코치. 서코치를 빼고 한국의 WBC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는 WBC출전을 놓고 소속팀 뉴욕 메츠와 갈등을 빚었고, 그가 WBC 참가를 공식선언하자 며칠 후 메츠는 그를 다저스로 트레이드했다. 너무 예전 사진이라 해상도가 떨어져서 아쉽다. <사진제공 OSEN>
"제가 제구를 잡는데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네트피칭'이었어요. 일단 가까운 거리부터 시작을 하죠. 네트를 가까운 곳에 놓고 네트를 향해 던지면서 계속 이미지를 그려야 해요. '이 공이 포수 미트까지 갔으면 어느 위치였을까?', 이렇게 계속 생각을 하면서 네트에서 조금씩 멀어지면서 던지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미지는 계속 떠올리면서 던져야 해요. 이게 계속 하다보면 점점 느끼게 되거든요. 여기면 스트라이크, 이쪽이면 볼. 이상하다 싶으면 다시 네트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가 다시 던지고 물러나기를 반복했습니다."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마이크 매덕스 코치와 서재응 코치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을 겨냥해서 스트라이크가 되는 가상의 지점을 훈련을 통해 개개인이 깨우쳐야 한다는 이야기죠. 이건 남이 가르쳐서 그리고 가르침을 따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그 감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구속의 경우는 다릅니다. 2010년대 접어들어 스포츠 과학을 기반으로 한 구속 향상에 대한 트레이닝 방법이 미국에서부터 비롯되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예외였습니다. 우리도 물론 발전했지만 다른 나라의 발전 속도에 비해 느렸습니다.

세계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제이컵 디그롬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메이저리그 첫시즌이었던 2014시즌의 경우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구속은 시속 150.5km였습니다. 그의 구속은 시즌을 거듭하면서 계속 증가세를 보이는데 2017년 153.2km/h, 2019년 156km/h, 2021년 159.8km/h를 기록합니다. 지난 시즌 약간 감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즌 평균 시속 159.2km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습니다. 그가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속 10km에 가까운 구속증가가 큰 영향을 끼쳤음이 명확합니다.

선수들이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투수 제이컵 디그롬, 이번 WBC에는 출전하지 않은 그는 올해부터 텍사스 유니폼을 입고 마이크 매덕스 코치와 호흡을 맞춘다. (사진제공 OSEN)

단, 제가 이야기하는 '구속을 늘려라'는 '제구를 신경쓰지 말라'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에 따른 구속 증가와 함께 개인의 노력을 통한 제구력 향상은 함께 달성해야하는 문제입니다.

몇 년 전부터 화제가 됐던 일본의 괴물투수 오타니가 고교 1학년 시절 작성했다고 알려진 만다라트를 잠시 보시겠습니다.

스포츠 니폰에서 공개한 오타니가 고교 1학년 당시 작성했던 만다라트.

오타니가 작성한 위 표에서 볼 수 있듯, 스피드와 제구는 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체와 몸통의 강화를 통해 불안정성을 없애고, 피칭을 늘려가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고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오타니 쇼헤이는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제자리 걸음을 걷는 사이 세계 야구계는 스포츠 과학을 바탕으로 한 속도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는 우리는 투수진의 WBC 예선 빠른공 평균구속 14위의 나라가 됐습니다. 반면 우리를 부러움에 빠지게 만들었던 일본은 선발투수의 빠른공 평균구속 156.3km로 이 부문 1위를 기록했습니다.

세계에서는 최고시속 160km를 넘나드는 포심 패스트볼이 득세하고 있고, 거기서도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리그에서 제구 된 140km/h 초반의 공이 통한다고 해서 빠른공을 가진 투수에게 '속도를 떨어뜨려서라도 일단 제구부터 잡아라'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고 결국 그 투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 될 것입니다. 속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혹은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도록 만들면서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코칭스태프가 해야할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WBC 중계방송을 하면서 이대호 해설위원도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시속 150km 이상의 공을 항상 접하고 있는 일본의 타자들이 우리 타자들보다 빠른 공에 대처가 더 좋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 경기의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시속 150km를 넘을까 말까한 환경인 거고요.

오타니 쇼헤이는 이번 WBC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이자 가장 강력한 타구를 날리는 타자였습니다.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대회에서 선발투수의 스피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팀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예선까지 선발투수들의 투구 빠른공 평균구속이 시속 147.1km로 본선 진출 스무 팀 중 10위에 그쳤습니다. 가장 빠른공을 던진 선발투수는 지난 도쿄올림픽 예선에서 우리 대표팀을 상대로 선발로 나섰던 닉 마르티네즈로 빠른공 평균 151.4km를 던졌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디그롬, 슈어져, 벌렌더, 게릿 콜 등의 리그 특급 투수들은 부상 또는 시즌 준비를 위해 나오지 않았던 거죠. 물론 그들 중 몇몇도 전성기에 비해 구속 자체는 떨어져있기는 하지만요.)

이런 미국에 답답함을 느낀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J.J 쿠퍼 에디터의 한마디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 번 읽어보시죠.

"알다시피, 구속은 투구의 전부가 아니다. 속도와 함께 속구의 궤적과 움직임이 어우러질 때 빠른공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속은 언제나 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느린 구속으로 인해 불이익을 봤다."

미국을 한국으로만 바꾸면 딱 우리 이야기죠?

-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