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갔던 국민 미니밴
월드컵의 기대감이 감돌던 2002년. 대대적인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내/외관 디자인을 크게 개선한 '카렌스 2'가 출시됐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부분들이 확실하게 달라졌고, 이름에 마저 '2'가 붙었으니 2세대로 거듭난 풀체인지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출시년도만 봐도 짐작되듯 높은 수준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었습니다. 참고로 1년 앞서 환골탈태한 '카니발 2' 역시 이와 동일한 케이스죠. 그나마 출시 3년 만에 갈아엎은 이 차들은 양심적인 편이고, 당시 이런 식으로 상품성을 강화했던 차들이 꽤 있었습니다.
외관은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전작의 친근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부분을 매끈하게 다듬어 한층 도시적인 분위기로 거듭났습니다. 직전 모델의 심심한 느낌도 여전했지만, 이를 세련된 디자인의 휠과 강렬한 대형 리어램프로 보완한 점도 좋았죠. 콩알만 한 경쟁차 '레조'의 리어램프와 확실하게 대비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입섬'을 참고했다는 것을 대놓고 티냈던 C필러 기둥을 삭제하고 쿼터글래스의 면적을 넓히는 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더욱 깔끔해졌어요.
실내 역시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한참 뒤에 등장한 K7의 '마징가 갑빠'는 애교로 보이는 가오리 모양의 방패형 센터패시아에서는 어떻게든 신차처럼 보여야 한다는 그들의 강박이 느껴졌습니다. 뭐 난해하긴 했지만, 의도대로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죠.
최신 라인업에 발맞춰 울긋불긋한 우드그레인 대신 차분한 금속 느낌의 플라스틱 패널로 마감해 외관의 도시적인 느낌도 그대로 반영했어요. 단, 설계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실내의 크기와 칼럼식 변속 레버는 직전 모델과 동일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패밀리카로 활용하기에 충분한 거주성을 제공했고 풀 오토 에어컨과 후방감지 센서 등 사용자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편의 기능을 강화해 상품성을 높였죠.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이 추가돼 승객 안전성을 강화한 것도 좋은 부분이었고요.
파워트레인은 이전 모델과 동일한 1.8L LPG 및 가솔린 엔진, 2.0L LPG 엔진에 새로 추가된 2.0L 가솔린, 나중에는 더 넉넉한 토크와 준수한 연비를 제공하는 2.0L 커먼레일 디젤 사양까지 무려 5가지나 되는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제공해 소비자들의 입맛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력은 역시 LPG 모델로 여전히 무난한 성능을 제공했지만, 구형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겨울만 되면 소음이 증가하고 시동이 잘 안 걸리는 등 '기화기' 방식의 LPG 차라면 고질적으로 겪는 문제를 그대로 답습했죠.
덕분에 새로 추가된 디젤 모델이 돋보였는데요. 산타페 같은 중형 SUV에 쓰인 2.0L 'D 엔진'으로 가벼운 공차 중량과 시너지를 일으켜 LPG 모델보다 더 경쾌한 주행이 가능하면서도 그에 뒤지지 않는 경제성을 갖췄습니다.
그러나 2003년 정부가 대기환경보전법을 강화하면서 배출가스 총량제를 실시해 유해가스를 많이 뿜는 디젤차들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이 카렌스 디젤의 발목이 잡혔습니다. 이전까지는 다목적 경유 승용차로 따로 분류하던 RV차들을 차량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세단과 동일한 승용차로 분류해 더 엄격한 배출가스 기준을 적용, 이에 미치지 못하면 생산을 중단시켜 아예 판매하는 디젤차의 양 자체를 줄여 오염물질의 총량을 제한해야 한다는 제조사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죠. 이로 인해 '갤로퍼'나 '레토나', '스포티지' 같은 구형 디젤 모델들이 이 시기 우르르 단종됐어요.
당연히 디젤 엔진을 주력으로 하는 RV 판매량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제조사들이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결국 환경부는 다목적 경유 승용차 중에서 원래라면 일반 승용차로 분류되어야 하는 9인승 미만 차량, 그 중에서도 보디 온 프레임 설계나 4륜구동 또는 험로탈출에 도움을 주는 차동제한장치 등이 기본장착된 차량, 즉 SUV에 한해 기준을 완화해줬습니다. 1세대 산타페나 투싼 같은 모노코크 도심형 SUV 중 전륜구동 모델에 한해 LSD가 들어가 있었던 이유예요. 커트라인이 낮아졌음에도 안타깝게 카렌스 2 디젤은 해당사항이 없었죠.
하지만 나름의 수요를 확보했던 디젤을 이대로 접기에 아까웠던 기아차는 카렌스의 지상고를 슬쩍 높이고 LSD를 장착, 아예 차명까지 바꿔 다른 모델인 양 판매하는 일종의 편법을 쓰게 되는데, 그 차가 바로 '엑스트랙'입니다. 투톤 범퍼와 클리어 타입 램프를 적용해 외관을 좀 더 터프하게 꾸며 나름 크로스오버 분위기를 풍기는 성의를 보였고, 은근한 수요를 확보해 2세대 모델이 투입되기 직전까지 판매됐어요.
한편 2005년부터는 이 유명무실한 법이 다시금 개정되면서 강화된 배출가스 규정을 충족시키면 차종에 관계없이 디젤 엔진을 탑재할 수 있게 됐죠. 덕분에 후속에서는 다시금 디젤 라인업을 부활시킬 수 있었습니다.
1세대 카렌스는 출시 직후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고 앞서 출시된 중형 미니밴 카니발과 함께 제2의 봉고신화로 불리며 기아차를 RV 전문 메이커로 우뚝 세운 모델이었습니다. IMF 외환위기란 신차에게 있어 치명적인 국가적 경제난 시기에 출시됐지만, 합리적인 가격과 저렴한 유지비, 뛰어난 실용성이라는 삼박자가 빛을 발해 오히려 위기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죠. 초기 모델은 출시 두 달 만에 무려 6만 대가 넘는 계약 대수를 달성, 그 폭발적인 인기를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해 출시 직후부터 모델 체인지가 이뤄지기 직전까지 무려 42개월 동안 만성적인 공급 부족 사태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당초 월 5,000대 규모로 캐파를 잡았다고 하는데, 잔업에 특근까지 해가며 쉬지 않고 찍어내도 주문이 계속 밀려있는 자동차 회사 입장에서 참 꿈같은 성과를 이뤄냈죠. 우리 집 혹은 친구네 차 중에는 무조건 카렌스가 한 대씩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사이 유럽형 MPV를 표방한 대우 '레조'가 등장해 한때 월 판매 1만 대를 넘기기도 하는 등 강력한 경쟁차로 급부상했지만, 카렌스의 인기는 여전했어요. 이후 현대차의 '라비타', 쌍용 '로디우스' 등 다양한 차급의 MPV들이 시장에 속속 등장했고, 그야말로 국산 MPV의 전성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MPV만 늘어난 건 아니었죠. '싼타페'를 시작으로 도심형 SUV를 표방한 차량들이 잇따라 참전하면서 순식간에 RV 시장 전체 규모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때문에 대체재가 많아지면서 후기형 카렌스 2는 전작만큼의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그래도 꾸준한 판매량을 이어갔고 후속 모델이 등장하는 데 훌륭한 발판이 됐어요. 특히 이 모델부터 탑재된 디젤 사양이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수출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는 등 의미있는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카렌스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로 위에 심심찮게 보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이 시기 대부분의 국산 차가 공유하는 고질적인 차체 부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특히 엑스트랙을 비롯한 디젤 모델은 배출가스 5등급으로 조기 폐차 및 운행 제한에 해당하기 때문에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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