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억원에 팔리는 세포·유전자치료제, 국내 개발은 '정체'

박정연 기자 2024. 9. 26.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원천기술 최고 수준이지만 임상시험 인프라 '낙제점'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시설을 나타낸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2020년 출시된 노바티스의 유전자치료제 졸겐스마는 출시 1년 만에 매출 1조원을 돌파하며 제약계를 놀라게 했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근육이 악화되거나 소실되는 질환인 척수성근위축증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이 약의 정가는 약 28억원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약'으로 불리면서도 매년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졸겐스마는 문제가 생긴 유전자의 대체본을 주입해 근육 기능을 유지하는 단백질을 발현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유전자의 대체본을 주입하는 데는 유전자 전달체인 바이러스 벡터의 한 종류인 아데노연관바이러스(AAV)가 사용된다.

문제가 생긴 유전자를 보충하거나 대체하는 데 사용되는 바이러스 벡터는 세포·유전자치료제 개발의 핵심 기술이다. 졸겐스마의 뒤를 잇는 차세대 세포·유전자치료제 개발에 뛰어든 글로벌 제약사들이 바이러스 벡터 기술 역량에 몰두하는 이유다.

이처럼 희귀·난치병 치료의 새로운 돌파구로 지목되며 전세계 연구자들과 제약바이오업계가 앞다퉈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 세포·유전자치료제의 국내 기술 개발은 좀처럼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원천기술 연구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상용화 전단계인 임상시험 착수에 연구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임상시험에 돌입하기 위한 임상연구 인프라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탓이다.

고위험 임상연구 승인을 받기 위해 필요한 유전물질 전달체를 생산할 수 마땅한 시설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지적이다. 연구자들은 해외 민간기업과 기관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만큼 실제 수급은 쉽지 않은 실정이다.

25일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 따르면 2019년 이후 국내에서 개발된 세포치료제에 대한 품목허가는 2019년 이후 한 건도 없다. 2021년 노바티스의 키메릭항원수용체-T(CAR-T) 항암 치료제인 '킴리아주'에 대한 품목허가 이후 4건의 수입 유전자 치료제에 대한 품목허가만이 이뤄졌다. 

현재 규제당국의 문턱을 넘은 임상연구는 소수에 불과하다. 9월 기준 첨단재생의료바이오법에 따라 '적합' 판정을 받은 임상연구계획은 세포치료제 31건, 유전자치료제 6건이다. 산업계는 전세계 국가에서 진행 중인 세포·유전자치료제 임상시험이 2200건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세포·유전자치료제 임상연구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허가를 받기 위해 필수적인 인공 바이러스벡터 제조 인프라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 벡터는 유전물질을 인간의 체내에 전달하는 바이러스 전달체다. 고위험 세포·유전자치료제 원천기술을 가진 연구자가 임상연구 승인을 받기 위해선 인체용 바이러스 벡터값을 확인하고 식약처에 제출해야 한다. 

연구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운영 중인 대부분의 위탁생산(CMO) 시설은 의약품제조및품질기준(GMP)을 충족하는 바이러스 벡터 생산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양질의 바이러스 벡터를 제조할 수 있는 대기업의 생산 시설은 협업 자체가 어렵거나 활용 비용이 비싸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바이러스 벡터를 얻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의 민간기업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르는 것이 값'이 되어버린 바이러스 벡터를 외국에서 들여오기 위해선 20~50억원이 필요하다.

이같은 이유로 국내 세포·유전자치료제 임상연구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국가가 투자하는 바이러스 벡터 생산시설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천기술을 가진 연구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2022년 자체 개발한 CAR-T 치료제로 소아 백혈병 환자 치료에 성공한 강형진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국립보건의료원(NIH)을 비롯해 주요 병원과 연구기관에 양질의 바이러스 벡터를 생산할 수 있는 CMO 시설이 마련돼 있으며 연구자들이 이를 사용하는 체계까지 잘 갖춰져 있다"며 "개별 기관에서 이러한 인프라를 조성하긴 어려우며 국가 사업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상연구 허가 절차의 효율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법에 따르면 고위험 세포·유전자치료제 임상연구 승인은 보건복지부의 검토를 거쳐 식약처가 최종 승인을 하게 된다. 승인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평균 2년이다. 두 개의 기관을 거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모되며 연구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행정적 부담도 크다는 이야기다. 

규제기관의 특성에 따라 역할을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제기된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안전성을 중시하는 식약처가 검토를 맡고 기술 자체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복지부가 승인을 맡으면 승인 과정에 훨씬 융통성이 확보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내 고위험 세포·유전자치료제 임상연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애가 타는 것은 희귀·난치병 환자들이다. 이주혁 소아희귀난치안과질환협회 회장은 "국가가 지정하는 미래 전략기술에 지정되면서 첨단바이오 연구개발(R&D)에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고 있지만 정작 환자들에게 절실한 분야에 대한 예산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고 토로했다.

바이러스 벡터 임상연구에는 20억원에서 50억원 상당의 비용이 필요하지만 현재 이 정도 규모의 예산이 배정된 가 R&D 사업은 없다. 혁신적인 차세대 치료제 개발을 위한 국가신약개발사업단과 범부처 재생의료기술개발사업단의 사업 교부액도 최대 10억원 수준에 그친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