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우승 밥 먹듯” 말이 현실로…정수빈, 하이원 16강의 메시지

프로 데뷔 1년 반 만에 ‘여제’의 어깨를 두 번이나 눌렀다. 정수빈(26·NH농협카드)은 더 이상 ‘깜짝 이변’의 주인공이 아니다. 2025-26시즌 7차 투어 하이원리조트 LPBA 챔피언십 32강에서 김가영을 승부치기 끝에 꺾고 16강에 오른 그는, 직전 64강에서 박정현을 상대로 하이런 11점을 뽑아내며 흐름을 바꿨다. 데뷔 초반 ‘유망주’라는 수식어는 그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애버리지 1.025(시즌 상위권)라는 건조한 숫자조차, 승부처에서의 침착함과 되받아치기의 리듬 앞에선 오히려 감정이 덜 붙은 축에 속한다.

정수빈의 서사는 요란하지 않다. 숙명여대 통계학과 휴학생, 아르바이트로 처음 당구를 만났고, 프로 선수인 한지승과의 훈련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데이터에 관심 있는 통계 전공자는 각도·두께·당점의 변수를 숫자로 체득했고, 경기장에선 그 계산을 ‘기다림’과 ‘선택’으로 번역한다. 공격을 서두르기보다 세이프티와 확률을 중시하는 운영, 듀스·승부치기에서의 심박 관리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흥미롭다. 독한 연습과 충분한 휴식을 교차시키며 집중력의 고점을 끌어올리는 루틴—결국 ‘필요할 때 가장 정확한 한 방’을 위한 시간 관리다.

김가영과의 악연(?)을 깨고 천적 구도를 만든 2연승은 상징적이다. LPBA에서 가장 많은 경험과 타이틀을 가진 선수 앞에서 정수빈은 두 차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이겼다. 한 번은 12-23의 절벽에서 7-6 연속타로 뒤집었고, 이번엔 세트 1-2 열세를 2-2로 돌려세운 뒤 승부치기 0-3에서 4-3 역전. 내용은 달라도 공통점은 같다. 급하지 않고, 포지션을 회복시키며, 마지막 선택을 명료하게 가져간다. ‘클러치’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준비된 리듬에서 나온다는 걸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

기술적으로는 중장거리 스트로크의 안정과 뱅크 대응이 좋다. 171cm의 신장은 익스텐션 의존도를 낮춰 샷의 두께와 임팩트를 일정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판단이 깨끗하다. 공격·수비의 스위치가 느리지 않고, 실패 후 다음 샷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빠르다. 상대 흐름이 올라올 때 ‘세이프티→짧은 득점→길게 끊기’라는 3단 분절을 그려 넣는 능력은, 팀리그 드래프트에서 NH농협카드가 그를 선점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과제도 있다. 경험의 폭이 더 넓어져야 한다. 세트 초반 리드 상황에서 템포 조절이 과감하지 못해 끌려가는 구간이 아직 있다. 장타(하이런) 비중이 늘었지만, 초구 구성과 리드 유지에 필요한 ‘쉬운 한 점’의 생산성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 다행히 방향성은 명확하다. 전략적 플레이를 기반으로, 공격 볼륨을 조금만 올리면 상위 라운드에서의 득점 효율이 한 단계 뛴다. 그의 말대로 “10년 뒤 우승을 밥 먹듯이” 하려면, 바로 그 ‘밥’이 되는 루틴 득점이 지금보다 더 많이, 더 쉽게 들어와야 한다.

정수빈은 ‘미모·지성·실력’ 같은 낡은 프레임보다, 플레이로 스토리를 쓴다. LPBA 월드챔피언십 2025 최단시간 승리(20분), 7차 투어 16강 진출, 김가영전 2연승—각 라벨은 빛난다. 하지만 그의 진짜 매력은 ‘다음 샷’을 설계하는 태도다. 결과를 받아들이되, 과정은 끝까지 설계한다. 그래서 팬들은 그의 점수판보다 그의 시선을 먼저 본다. 공을 읽는 눈, 자신을 다독이는 눈, 그리고 승부를 마무리하는 눈. 여기가 바로 차세대 에이스의 시작점이다.

NH농협카드라는 팀 환경도 플러스다. 베테랑·외국인·여자선수 라인이 고르게 구성돼 있어, 실전에서 다양한 매치업을 매일 경험한다. 코치진의 전술 데이터와 그의 통계적 관심사는 연결되기 쉽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읽는 태도는 천차만별이다. 정수빈은 그 숫자를 ‘용기 있게 치는 순간’을 위해 사용한다. 그래서 성장의 속도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이제 숙제는 단 하나, ‘반복’이다. 64강의 하이런, 32강의 뒤집기, 승부치기의 사점(四點)—이 장면들을 한 시즌에 여러 번 복제할 수 있다면, 그의 이름 옆에는 ‘이변’ 대신 ‘지배’가 적힌다. 아직 20대 중반, 아직 휴학생, 아직 성장 중. 하지만 이미 충분히 설득력 있는 ‘차세대 LPBA의 얼굴’이다. 오늘의 침착함이 내일의 상수라면, 정수빈의 10년 계획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현실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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