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필요 없다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권김현영 | 여성현실연구소장
오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두가지다. 하나는 혈연가족 내에서 손위 남자 형제를 지칭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남남끼리에서 나이 어린 여자가 손위 남자를 ‘정답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을 뜻한다. 친오빠를 부를 때 여동생이 그 호칭에 정다움을 넣어서 호명하는 경우는 살면서 별로 본 적이 없다. 한국의 남매 관계성이란 사이가 좋은 경우에도 내놓고 다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남남인 사이에서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달라는 남자들이 있다. 정다운 사이가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호칭이 정해질 텐데 일단 오빠라고 불리기만 하면 자동으로 그런 사이가 될 거라는 주술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다. 국어사전에는 오빠에 대한 세번째 정의가 수록되어야 한다. 오빠.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성 역할 중 하나로,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될 것을 강요하는 호칭.
한국 여자들의 사회생활은 오빠라고 불러달라는 이들에게 오빠라고 불러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오빠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회생활이 언제나 더 편해지는 것은 아니고, 모든 남자가 연하의 여자에게 오빠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주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오빠라고 불러주는 여자와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는 여자를 아주 노골적으로 차별한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 6회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 있다. 극 중 마케팅 피디(PD)로 나오는 한주(한지은 역)에게 감독은 피피엘(PPL)을 찍고 싶으면 배우, 감독, 매니저 등 모두 남자인 현장에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써보라며 오빠라고 불러보라고 한다. 명백히 부당한 요구다. 하지만 사회생활이란 게 어디 그런가. 현장은 멈춰 있고 촬영은 속행되어야 하는 상황. 한주는 마음을 다잡고 혼신의 연기를 시작한다. 오빠옵빠오퐈옵뽜오빠옵빠오퐈옵뽜~ 배우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리에서 울릴 정도의 명연기였다.
여성학자 전희경이 2008년에 낸 책 ‘오빠는 필요없다’에는 진보적이면서도 끝끝내 ‘오빠’를 하고 싶어 하는 남자 선배들에게 도전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로부터 10년 뒤 강준만은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여성 인권을 지지한다며 생색을 내고 싶어 하는 오빠들이 사실 가부장제가 얼마나 견고한지 알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고 있으며 오빠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길들이고 있다고 직격했다.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는 ‘현남 오빠에게’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통해 동등한 관계보다는 오빠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처럼 ‘오빠’가 상징하는 남성 중심의 지배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런 문화와 거리를 두는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데 아무런 위화감을 가지지 않는 여성도 있다. 검건희씨와 명태균씨가 카카오톡 메시지로 주고받은 내용에는 ‘오빠’가 등장한다. 대통령실에서는 이 오빠는 남편인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친오빠라는 해명을 내놓았지만, 둘 중 누구라고 해도 김건희씨가 ‘오빠’ 뒤에서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김건희씨가 만약 권력을 원했다면 직접 자신이 나서서 검증을 거쳤어야 했다. 하지만 김건희씨가 권력을 발휘한 방식은 선생님들을 모셔놓고 그 앞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며 사적 친밀성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정통’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 있는 남자의 어머니나 아내나 딸이 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이 정부가 늘 주장해왔던 것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건희씨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바로 구조적 성차별의 명백한 증거다. 아무리 ‘무식하고 철이 없어도’ 오직 남자를 통해서만 권력에 접근할 수 있고, 다른 어떤 능력보다도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사회를 우리는 성차별이 구조화된 가부장제 사회라고 부른다. 김건희씨가 지금의 정치권에서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가부장제가 여전히 굳건히 작동하고 있는 증거라는 말이다. 김건희식 오빠 정치도 오빠 중독자들의 정치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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