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백미는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이다. 207년 삼고초려를 통해 성사된 이 역사적 조우는 촉한 건국의 초석이 된 것은 물론 위·오·촉 삼국정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만약 이들이 만나지 않았다면 삼국시대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제갈량의 역할과 영향력을 따라가며 그 해답을 찾아본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 나관중이 작품 속에서 가장 애정을 두고 묘사한 인물은 단연 제갈량이다. 원말 명초 시대 사대부였던 나관중은 자신의 로망이자 페르소나로서 제갈량을 완전무결한 인물로 묘사했다. 《삼국지》의 하이라이트는 208년 발발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제갈량은 이 전쟁에서 자신의 신출귀몰한 능력을 맘껏 펼치며 활약의 절정을 이룬다. 반면 234년 오장원(五丈原) 전투에서 제갈량이 숨을 거두면서 소설은 실질적으로 거의 파국에 이른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수어지교(水魚之交), 읍참마속(泣斬馬謖), 칠종칠금(七縱七擒) 등 《삼국지》에서 비롯된 많은 고사성어가 제갈량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소설 속 제갈량의 비중과 역량은 압도적이다. 그 영향력은 너무도 강렬했다.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인들이 연상하는 역사상 재상으로서 제갈량의 이미지는 견고하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약 제갈량이 유비와 만나지 않았다면 실제 삼국시대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삼고초려의 실체
이러한 의문에 추론 가능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는 중요한 모멘트를 따라가며 그의 중요한 역할과 위상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삼국지》 중반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단연 유비가 천하의 인재 제갈량을 자신의 휘하에 품게 되는 그 유명한 '삼고초려' 부분이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고 동탁의 반정을 토벌하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여전히 이렇다 할 만한 영지를 차지하지 못했다. 공손찬, 조조, 원소, 유표 등 각지의 지방 군벌들에게 의탁하며 전전했다. 그나마 유표에게 '신야'라는 작은 땅을 받아 자사가 되었을 때에는 잠시나마 너무도 안주한 나머지 도원결의(桃園結義)의 초심도 잊은 자신을 자책하며 비육지탄(髀肉之歎/髀肉之嘆)했다.
바로 그즈음 유비는 수경 선생 사마휘와 서서를 만난다. 이들 모두 유비의 고민에 공감하며 천하의 인재를 한 명 추천했다. 지금은 융중(隆中)에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있지만 언젠가 때를 만나면 하늘로 승천할 용, 즉 와룡 혹은 복룡이라 불리는 제갈량이 바로 그였다. 이에 유비는 오매불망 그를 모시기 위해 친히 융중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데, 이 유명한 '삼고초려' 고사는 소설의 허구일까, 아니면 정사에 기록된 역사적 실체일까.
정답은 정사에 전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고사는 정사 《삼국지》의 〈제갈량전〉에서 그 유명한 '출사표' 문장 가운데 제갈량이 이미 죽은 선군, 즉 유비를 회고하며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직접 몸을 굽히시어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신을 찾아주셨다”고 기록했다. 천하의 인재를 얻기 위해 유비가 보여준 이 겸허하며 진정성 있는 행동은 실로 제갈량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동아시아 역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7년경, 당시 관점에서 별 볼일 없었던 유비를 주군으로 받아들인 제갈량의 선택도 대단하지만, 삼고초려의 주역은 단연 유비라고 할 수 있다.
천하삼분지계의 대세관
세 번째 방문한 끝에 겨우 만난 유비는 제갈량의 어떤 점에 끌리고, 또 얼마나 흡족했으면 자신이 제갈량 선생을 만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수어지교]'이라며 좋아했을까. 정사에 따르면 유비는 천하대세와 향후 자신의 대응 전략에 대해 물었고, 제갈량은 차분히 답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에게 승리한 조조는 이미 천자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현재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다. 지형의 이점을 안고 있는 강동 지역은 손권이 삼대에 걸쳐 장악하며 젊은 인재가 모여 있으니 대립하기보다는 우리 편으로 포용해야 한다. 비옥하고 천혜의 요지인 형주(荊州)와 익주(益州) 지역은 마침 군주인 유표나 유장이 무능하고 민심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절호의 기회다. 이 지역을 차지한다면 후일 패업을 이룰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융중대(책)’ 혹은 ‘초려대(책)’라고 부르는 제갈량의 대책은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사 어디에도 ‘삼분’ 혹은 ‘삼국’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이후 전개되는 촉한 진영의 행보와 삼국시대라는 역사 과정을 감안해 천하삼분지계로 고착되었다. 이는 과연 정당한 해석과 평가일까.
천하삼분지계는 그 이전 역사에도 몇 차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당시 기준 약 400년 전인 진한 교체기, 즉 항우와 유방이 천하 쟁패를 다투는 초한 전쟁 시기에 항우의 부관 무섭이나, 한신의 책사 괴철 등이 천하삼분지계를 제기했었다. 중국 역사는 그 이전 상나라와 주나라, 그리고 춘추전국시대까지 1500여 년 동안 통일 왕조 없이 각 제후국이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분할통치’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역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통일 제국의 역사가 미처 정착되지 못한 채 15년 만에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했다. 천하는 다시 진한 교체기의 대혼돈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제기된 천하삼분지계는 분할을 통한 현상 유지라는 자연스러운 대책일 수 있었다.
그러나 유방이 건국한 한 제국은 천하를 다시 통일하고 제국을 수립해 400년간 지속되며 통일 제국을 새로운 체제로 역사에 정착시켰다. 바로 그런 시기에 제기된 삼분지계는 그 이전과는 다른, 일종의 역발상이며 파격적인 대안이었다. 제갈량의 대책을 면밀히 분석하면 당장 주적인 조조와 대적해 한나라 황실의 재건을 도모하거나, 어린 주군이 영도하는 강동 지역을 차지해 중원을 모색하는 성급한 전략은 지양했다. 그보다는 우선 제3의 근거지를 확보해 천하삼분의 현상 유지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삼분지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냉철한 대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진행된 유비 진영의 행보는 결국은 제갈량의 국정 방향과 일치한다. 계속된 역사 과정의 결과를 봐도 제갈량의 대세관이 주효했다고 평할 수 있다.
다만 삼분지계의 결정적 계기는, 역설적이지만 바로 강동 정벌과 천하 통일을 위해 조조가 단행한 적벽대전이었다. 이때 유비 진영과 손권 진영은 조조의 대군에게 ‘투항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그리고 ‘각자도생해 싸울 것인가’, 혹은 ‘연합전선을 구축할 것인가’라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놓였다. 그들의 선택과 대응은 결과적으로 삼국정립의 역사를 촉진했다.
연합전선 구축과 적벽대전
《삼국지》의 최대 분기점이자 하이라이트인 적벽대전은 삼국시대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자 세계 전쟁사에서도 손꼽히는 대사건이었다. 소설에서는 이 전쟁의 기획, 연합전선 구축, 화공작전 구상, 화살 10만 개 확보, 고육지계 전략, 동남풍의 전환 등 전쟁의 시작과 끝이 모두 제갈량의 손안에서 운영된다. 그야말로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역량이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만큼 소설적 과장과 역사적 왜곡이 심한 부분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연합전선 구축 외에 제갈량의 역할은 없거나 허구로 조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거의 유일한 역할인 연합전선 구축은 제갈량이 주도했을까. 정사의 다양한 기록을 종합하면 양 진영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유비가 제갈량을 손권 진영에 파견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신야의 전투부터 박망파 전투, 장판파 전투 등 유비는 조조와 지난한 교전을 벌여왔다. 특히 형주 백성들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장강의 흐름을 따라 강동 지역으로 쫓겨 가며 유비는 손권과의 연대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강동 지역의 전반적인 여론은 불필요한 희생과 피해를 감수하지 말고, 천자를 옆에 끼고 조정의 명분을 갖고 있는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노숙, 주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존심 강한 손권은 조조와 일전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바로 이때 유비가 파견해 제갈량이 강동을 찾아왔던 것이다.
현란한 논리와 언변, 그리고 고도의 심리를 자극해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했다. 손권과 유비는 연합전선을 구축해 조조를 상대로 중과부적의 이 전쟁에서 끝내 대승리를 거두었다. 제갈량의 공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이미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며 손권의 강동 진영과는 대립하기보다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큰 틀에서는 제갈량의 대책과 맥을 함께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서로 연대한 것은 제갈량 개인의 입장이 관철되었다기보다는 두 진영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았기 때문이다. 혹 제갈량이 아니었더라도 강동의 노숙이나 유비 본인이라도 나서서 적극 제안했을 것이다. 조금은 더 논란과 진통이 있었을 수 있지만 연대의 합의는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정작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보다 강동 진영을 감싸고 있는 장강이라는 지정학적 요인, 도독 주유의 통솔력, 황개 장군의 전략과 활약, 그리고 조조 진영에 닥친 풍토병이 주요했다. 유비 진영은 후방의 지원과 도주하는 조조 진영에 대한 퇴로 차단과 추격 등 보조 역할이었다.
유비 사후 촉한의 운영
소설 《삼국지》에서 병가적으로 묘사된 제갈량의 신산귀모(神算鬼謀)의 능력은 대부분 과장이거나 허구였다. 그런 거품을 다 걷어내면 정작 제갈량의 법가적이며 유가적인 냉철하고 견실한 행정가의 면모가 보인다. 소설적 과장을 차치하고라도 촉한의 재상 제갈량은 역사상 인재이며 충의의 화신이다. 제갈량은 전장에서 수십만 대군을 진두지휘하는 군사의 모습보다는 조정에서 국정 방향을 제시하고, 수많은 자료와 통계, 그리고 율령에 근거해 문무백관을 통솔하며 행정을 담당하는 재상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가장 열악했던 촉한의 진영은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를 입으며 노른자위 땅 형주의 주요 지역을 확보한 후 제갈량의 지휘 아래 지금의 사천 지역인 익주와 한나라 출발의 근간이었던 한중 땅을 확보하며 내실을 다졌다. 그리고 221년 유비가 촉한의 황제에 즉위하며 당당히 삼국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제갈량이 구상했던 천하삼분지계가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과 조자룡의 만류에도 221년부터 1년간 유비가 무리하게 전개한 이릉전투에서 손권에게 대패한 후, 223년 유비가 숨을 거두면서 촉한은 최대 위기를 맞는다. 더구나 유비의 후계자는 무능한 아들 유선이었다. 정사에서는 유비가 임종하며 유언을 남기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유언이다. 유비는 촉한을 제갈량에게 위임해도 그가 집권하기보다는 아무리 군주가 어리석어도 끝내 주군을 보필하며 충의를 다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소설과는 사뭇 다르게 정사에서는 유비의 사후 최대 위기에 놓인 촉한의 정국에서 제갈량의 진가와 역량은 더욱 빛을 발한다.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비록 무능한 주군이지만 충의로 보필하며 촉한의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칠종칠금’ 고사로도 유명한 오늘날 운남 지역인 남만 원정을 감행하며 인내와 포용으로 맹획을 얻고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선군인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위나라에 대한 북벌은 처절하고 비장한 원정이었다. 출정하며 그가 주군에게 올린 그 유명한 〈출사표〉는 동아시아 역사상 명문이요, 충의의 사표로 현양(顯揚)있다. '죽는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소신대로 제갈량은 5차 북벌 중 오장원의 야전에서 병사했다. 때는 234년, 그의 나이 53세였다. 제갈량이 숨을 거두고도 강유, 장완, 비의 등이 승상이 되어 그나마 촉한이 약 3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제갈량이 구축한 국가 체제와 방향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조조와 손권이 제갈량을 품었다면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지 못했다면 과연 삼국시대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아마도 유비는 천하삼분지계의 큰 대세관을 견지하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후한 말 지방의 작은 군벌 세력으로 전전했을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연대해 승리했다 해도 잠시 형주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이내 손권과 조조의 공략에 속수무책으로 상실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형주 지역에 대한 각 진영의 집착과 야망은 지대했다. 요행히 유비가 촉한을 수립했더라도 제갈량이 없었다면 유비 사후 촉한의 국운도 오래가지 못했을 것은 더욱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당당히 삼국시대의 한 축을 이루는 촉한의 위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220년부터 60년간 지속된 삼국시대의 역사는 훨씬 단축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천하의 인재 제갈량이 결국 강호에 나간다고 가정할 때, 제갈량이 유비가 아닌 조조나 손권 진영에 합류했다면 또 어땠을까. 만약 조조가 제갈량을 품었다면 삼국시대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고, 조조가 조기에 천하를 통일하며 전혀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손권 진영에 합류했다면 어땠을까. 적벽대전에서 손권이 승리한 후 화북은 조조가, 강남은 손권이 통치하는 남북조시대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다만 장강 중하류에 근거를 둔 손권으로서는 촉한처럼 적극적으로 익주 지역과 남만 지역을 경략(經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말이다.
ㅣ 덴 매거진 2025년 8월호
글 이성원(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에디터 정지환 (stop@mcircle.biz)
일러스트 장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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