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못 한 게 나의 원동력" 잘 나가는 이 뮤지션이 내놓은 뜻밖의 답변 [스프]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4. 9. 29. 09:03
[커튼콜+] 피아니스트 윤홍천, 시작은 인디 뮤지션처럼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요즘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유명 콩쿠르의 우승자들입니다. 콩쿠르 우승이 연주자의 필수 경력으로 여겨지는 요즘이지만, 연주자로 성공하는 길이 반드시 콩쿠르만은 있는 건 아닙니다. 독일을 거점으로 유럽에서 활발하게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윤홍천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윤홍천은 1982년 서울 태생으로 10대 때 유학길에 올라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했습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 벨기에 국립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솔로 연주와 음반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2011년 독일 바이에른주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고, 현재 소니클래식인터내셔널의 유일한 한국인 전속 아티스트입니다. 뛰어난 테크닉과 섬세한 감성으로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2009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박성용영재특별상을 받는 등 콩쿠르에서 입상한 적은 있지만, 우승 경력은 없습니다.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서 한국 리사이틀을 앞둔 피아니스트 윤홍천을 만났는데요, 그는 콩쿠르 우승 경력이 없었던 게 오히려 자신을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콩쿠르 우승을 했다면 커리어를 쌓는 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는데, 콩쿠르가 안 된 게 또 어떻게 보면 저의 '원동력'이 됐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정말 재능이 많아서 피아노를 쉽게 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자기 최고 경력은 부조니 콩쿠르에서 4등 했다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죠.
어찌 보면 콩쿠르 없이 연주 경력 쌓을 수 있으면 그게 사실 가장 자연스러운 거죠. 저는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콩쿠르에 너무 의존하고, 그것만 되면 다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좀 아쉬워요."
유명 콩쿠르 우승은 공연장이나 에이전시, 음반사에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직업 연주자로서 커리어를 쌓는 디딤돌이 되죠. 특히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방인'이라 할 한국인 연주자에게는 콩쿠르가 더욱 중요한 경력으로 여겨집니다. 그럼 콩쿠르를 통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요? 윤홍천은 학업이 끝날 때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20대 중반이 되고 공부도 다 끝났고, 독립도 해야 되고, 연주하면서 이걸로 돈을 벌어서 살고 싶은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아무 고민 없이 피아노를 치다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니까, 결정을 해야 되겠더라고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어둑어둑한 숲을 걷다가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하고 저한테 물어봤거든요. 그날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연습했는데, 연습이 정말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콩쿠르나 연주 일정 잡힌 것 없이 연습하는 게 잘 안 되더라고요. 학교에서 숲을 지나 집에 가야 하는데, 가다가 벤치에 앉아서 고민했어요.
한국에 가야 하나? 미국으로 다시 갈까? 고민하다가 제 자신한테 정말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보니까, 제일 하고 싶은 건 연주였어요. 무대에 서는 게 제일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무대라도 내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윤홍천은 조용한 성격이지만, 뭔가 해야겠다 결심하면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과 프로필, 음반을 찍어 음악 산업 관계자들한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을 때도 자신의 명함과 음반을 돌렸는데, 한국인 대학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게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후일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도 있습니다.
"데모 CD를 한 100개 정도 컴퓨터로 구워가지고 편지 써서 매니지먼트 회사들에 보냈는데, 처음에는 답도 안 오죠. 그런데 그중 한 분이 연락을 주셨어요. 그분이 연결해 주셔서 처음 독일에서 음반을 낼 수 있었죠. 독일에서 작은 에이전시 하는 분인데, 처음에 음반사도 연결시켜 주시고, 평론가분들한테 제 첫 음반을 보내셔서, 제 음반이 뮌헨 바이에른 방송국 라디오에서 당 타이손, 블레하츠 같은 사람들하고 비교가 되면서 소개가 됐어요."
"데모 CD는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연주회 때 라이브로 한 거나 콩쿠르 때 연주한 것들이에요."
"컴필레이션이네요. 딱 인디 뮤지션이네요!"
"네, 근데 외국 친구들은 그렇게 많이 해요."
윤홍천은 2014년에는 거장 로린 마젤에게 발탁되어 뮌헨 필하모닉과 협연하게 됩니다. 그가 독일 하노버 음대를 졸업하고 뮌헨에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기회도 그가 직접 부딪혀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2013년에 로린 마젤이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오셨어요. 근데 공연을 보러 가면 제 나이 또래 음악 하는 친구들, 지휘자들이 다 무대 뒤로 가더라고요. 만나고 싶으니까요. 로린 마젤과 카라얀이 젊은 음악가들을 많이 발탁했잖아요. 제가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 어릴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처음 봤던 로린 마젤의 베토벤 교향곡 3번이 딱 생각이 나면서, '나는 왜 그렇게 못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분한테 손편지를 써서 음반하고 같이 오케스트라 주소로 보냈어요. 그리고 몇 개월 지나서 찾아간 거죠."
"오라고 해서 가신 거예요?"
"아니죠. 사실 답이 없었어요. 그때는 저한테 매니저가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했더니 '지휘자는 그냥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로린 마젤 공연에 갔는데, 언제 찾아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1부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에) 찾아가면 사람들이 제일 없을 것 같더라고요. 2부까지 다 끝나고 가면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1부 협연자가 앙코르 할 때 몰래 나와서 무대 뒤로 갔어요. 노크하고 방에 들어갔더니 '너 누구니?'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저는 피아니스트인데 얼마 전에 음반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했더니, '그게 너구나!' 하면서 기억하시더라고요. 음반 들었다고요."
그렇게 해서 윤홍천은 이틀 후 로린 마젤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디션 본 당일, 다음 시즌에 뮌헨 필하모닉 협연 일정이 잡혔습니다. 정말 비현실적으로 빨리 진행되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로린 마젤이 그 공연을 5개월 앞둔 2014년 7월 84세로 타계했습니다.
2014년 12월, 윤홍천은 마젤과 약속했던 대로 뮌헨 필하모닉과의 협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협연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로린 마젤을 대신해 핀란드 태생의 젊은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2021년부터 KBS 교향악단 음악감독을 맡아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하죠)이 지휘봉을 들었고, 협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윤홍천은 '저는 뭐든 쉽게 되는 건 없었던 것 같다'면서 웃었습니다. 로린 마젤이 타계하지 않고 함께 연주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오기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갔고,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만들어낸 기회였기에 더욱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윤홍천은 협연은 물론이고 독주와 실내악 등 꾸준하고 다양한 음반 녹음으로 주목받아 온 연주자입니다. 2011년 독일 바이에른주 문화부의 '젊은 예술가상'은 슈베르트 소나타 음반으로 받았고, 2016년 자비네 마이어 등과 함께 녹음한 실내악 음반 '모차르트 위드 프렌드'는 에코클래식 상을 받았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전곡을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은 영국 그라모폰의 '에디터스 초이스'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또 소니뮤직에서 2020년부터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시작해, 3년 만에 완간했습니다. 가장 최근인 올해 나온 음반은 가브리엘 포레와 나디아 불랑제, 레이날도 안의 작품을 담았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요즘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유명 콩쿠르의 우승자들입니다. 콩쿠르 우승이 연주자의 필수 경력으로 여겨지는 요즘이지만, 연주자로 성공하는 길이 반드시 콩쿠르만은 있는 건 아닙니다. 독일을 거점으로 유럽에서 활발하게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윤홍천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윤홍천은 1982년 서울 태생으로 10대 때 유학길에 올라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했습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 벨기에 국립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솔로 연주와 음반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2011년 독일 바이에른주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고, 현재 소니클래식인터내셔널의 유일한 한국인 전속 아티스트입니다. 뛰어난 테크닉과 섬세한 감성으로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콩쿠르가 아니라면 어떤 길이 있을까
"제가 콩쿠르 우승을 했다면 커리어를 쌓는 데 도움이 됐을 수도 있는데, 콩쿠르가 안 된 게 또 어떻게 보면 저의 '원동력'이 됐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정말 재능이 많아서 피아노를 쉽게 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자기 최고 경력은 부조니 콩쿠르에서 4등 했다는 거라고 얘기하곤 했죠.
어찌 보면 콩쿠르 없이 연주 경력 쌓을 수 있으면 그게 사실 가장 자연스러운 거죠. 저는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이 콩쿠르에 너무 의존하고, 그것만 되면 다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좀 아쉬워요."
유명 콩쿠르 우승은 공연장이나 에이전시, 음반사에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직업 연주자로서 커리어를 쌓는 디딤돌이 되죠. 특히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방인'이라 할 한국인 연주자에게는 콩쿠르가 더욱 중요한 경력으로 여겨집니다. 그럼 콩쿠르를 통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이 있을까요? 윤홍천은 학업이 끝날 때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데모 CD 100장... 인디 뮤지션처럼 나를 알렸다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어둑어둑한 숲을 걷다가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하고 저한테 물어봤거든요. 그날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연습했는데, 연습이 정말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콩쿠르나 연주 일정 잡힌 것 없이 연습하는 게 잘 안 되더라고요. 학교에서 숲을 지나 집에 가야 하는데, 가다가 벤치에 앉아서 고민했어요.
한국에 가야 하나? 미국으로 다시 갈까? 고민하다가 제 자신한테 정말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보니까, 제일 하고 싶은 건 연주였어요. 무대에 서는 게 제일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무대라도 내가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윤홍천은 조용한 성격이지만, 뭔가 해야겠다 결심하면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과 프로필, 음반을 찍어 음악 산업 관계자들한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을 때도 자신의 명함과 음반을 돌렸는데, 한국인 대학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게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를 후일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도 있습니다.
"데모 CD를 한 100개 정도 컴퓨터로 구워가지고 편지 써서 매니지먼트 회사들에 보냈는데, 처음에는 답도 안 오죠. 그런데 그중 한 분이 연락을 주셨어요. 그분이 연결해 주셔서 처음 독일에서 음반을 낼 수 있었죠. 독일에서 작은 에이전시 하는 분인데, 처음에 음반사도 연결시켜 주시고, 평론가분들한테 제 첫 음반을 보내셔서, 제 음반이 뮌헨 바이에른 방송국 라디오에서 당 타이손, 블레하츠 같은 사람들하고 비교가 되면서 소개가 됐어요."
"데모 CD는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연주회 때 라이브로 한 거나 콩쿠르 때 연주한 것들이에요."
"컴필레이션이네요. 딱 인디 뮤지션이네요!"
"네, 근데 외국 친구들은 그렇게 많이 해요."
거장 로린 마젤도 직접 찾아갔다... 뮌헨 필하모닉과 협연
"2013년에 로린 마젤이 뮌헨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오셨어요. 근데 공연을 보러 가면 제 나이 또래 음악 하는 친구들, 지휘자들이 다 무대 뒤로 가더라고요. 만나고 싶으니까요. 로린 마젤과 카라얀이 젊은 음악가들을 많이 발탁했잖아요. 제가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 어릴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처음 봤던 로린 마젤의 베토벤 교향곡 3번이 딱 생각이 나면서, '나는 왜 그렇게 못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분한테 손편지를 써서 음반하고 같이 오케스트라 주소로 보냈어요. 그리고 몇 개월 지나서 찾아간 거죠."
"오라고 해서 가신 거예요?"
"아니죠. 사실 답이 없었어요. 그때는 저한테 매니저가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했더니 '지휘자는 그냥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로린 마젤 공연에 갔는데, 언제 찾아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1부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에) 찾아가면 사람들이 제일 없을 것 같더라고요. 2부까지 다 끝나고 가면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1부 협연자가 앙코르 할 때 몰래 나와서 무대 뒤로 갔어요. 노크하고 방에 들어갔더니 '너 누구니?'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저는 피아니스트인데 얼마 전에 음반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했더니, '그게 너구나!' 하면서 기억하시더라고요. 음반 들었다고요."
그렇게 해서 윤홍천은 이틀 후 로린 마젤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디션 본 당일, 다음 시즌에 뮌헨 필하모닉 협연 일정이 잡혔습니다. 정말 비현실적으로 빨리 진행되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로린 마젤이 그 공연을 5개월 앞둔 2014년 7월 84세로 타계했습니다.
2014년 12월, 윤홍천은 마젤과 약속했던 대로 뮌헨 필하모닉과의 협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협연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로린 마젤을 대신해 핀란드 태생의 젊은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2021년부터 KBS 교향악단 음악감독을 맡아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하죠)이 지휘봉을 들었고, 협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윤홍천은 '저는 뭐든 쉽게 되는 건 없었던 것 같다'면서 웃었습니다. 로린 마젤이 타계하지 않고 함께 연주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오기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갔고,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만들어낸 기회였기에 더욱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슈베르트 소나타를 배우지 않은 이유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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