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알록달록한 주택가, 페인티드 레이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시내까지는 바트(Bart)로 30분이면 도착한다. 나는 관광의 출발점인 유니온 스퀘어(Union Square)에서 겨우 두 블럭 떨어진 곳에 호텔을 잡았다. 걸어서 10분 거리 정도면 할 만하다 했는데, 이건 뭐 언덕이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다. 캐리어를 두 손으로 밀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를 때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것은,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내리막이라 편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는 내리막길은 캐리어가 엄청 빠른 속도로 굴러가서 잡아당기면서 걷느라 언덕길을 오르는 것만큼 힘드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지만.

숨을 헉헉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다 ‘이렇게 가파른데 눈이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기계적인 사고를 했다가, 그렇다, 이곳은 지중해성 기후가 충만한 샌프란시스코, 수십 년에 한 번 눈이 올까말까 한 동네다.

이 구불구불한 언덕길 덕분에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케이블카가 탄생했다. 어떤 곳은 경사가 무려 30도나 되어 버스도 전차도 바퀴가 헛돌고, 미끄러지기 일쑤다. 그러니 지하에 매몰된 케이블이 꽉 잡아주는 케이블카가 샌프란시스코 지형에 제격인 교통수단인 것이다. 케이블카는 앞부분의 실외 좌석과 뒷부분의 실내 좌석으로 나뉘는데, 실외 좌석은 줄을 한 시간을 서서 기다려 탈 정도로 인기다. 케이블카 앞머리에는 팔뚝 굵은 운전사 ‘그립맨(Gripman)’이 케이블카를 제어하고, 뒷부분에는 ‘컨덕터(Conductor)’가 승객이 안전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관리하며 그립맨의 시야를 확보해준다. 출발, 정지를 할 때에는 종을 쳐 그립맨과 소통하는데, 이 종소리가 또 샌프란시스코의 낭만을 북돋운다.

파월역에 도착하면 사람의 힘으로 케이블카의 방향을 돌린다.

피셔맨 와프(Fisherman’s wharf)까지 운행하는 파월-메이슨 라인이 가장 유명한데, 종착역인 파월역에서는 사람이 직접 케이블카를 밀어 방향을 바꾼다. 이 광경 또한 볼 만하다. 속도도 15km 정도 수준이니, 케이블카에 매달려 도시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로 파월역은 항상 북적인다. 굳이 대롱대롱 매달려 풍경을 담으려는 게 아니라면 실내에 앉아도 케이블카 타는 맛은 충분하니, 한 시간 씩 기다리지 말고 중간 역에서 가볍게 올라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도착 첫날, 빠른 시차 적응을 위한 루틴에 따라 침대의 유혹을 이기고 밖을 나섰다. 몽롱한 나의 의식을 단박에 깨운 것은 진한 커피도 아니요, 땡땡 소리를 내며 언덕길을 누비는 케이블카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샌프란시스코의 스카이라인과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 다채로운 아르데코, 모던 양식의 건물들, 단 하나의 건물도 똑같은 것이 없었다. 건축물의 매력은 주거지구로 깊이 들어갈수록 커졌다. 이렇게까지 예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리마다 각양각색 아름다운 빅토리안 양식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영국 유학 시절 대부분을 빅토리안 집에 살기도 했고, 또 그만큼 익숙하게 보기도 했지만, 이런 색감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노팅힐 정도나 가야 알록달록 페인트칠 된 집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동네는 마치 인형 애호가가 취미삼아 인형의 집 색칠하듯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부풀어 가는 매료와 상상이 제 멋대로 길을 트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 무료 워킹 투어.

오늘의 투어 가이드는 이 동네 터줏대감 엘리자베스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작아 투어의 참가자들이 할머니 곁으로 모여들다 종국에는 어깨를 맞대고 할머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지만, 할머니의 무릎만은 이십 대보다 튼튼했다. 알라모 스퀘어(Alamo Square)를 중심으로 꼬박 두 시간의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렸다.

1850년 캘리포니아 콜로마 지역의 강바닥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남미에서, 바다 건너 중국, 호주에서도 샌프란시스코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금광과 가장 가까운 항구가 있는 골드러시의 관문이어서, 금융, 해운, 철도 산업이 발전하여 단번에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다. 게다가 여러 인종과 문화가 섞여 미국 어느 도시보다도 활기찬 도시가 되었다.

“여러분은 하루아침에 억만 장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뭘 하겠어요?”

당장 일을 그만둘 테다. 멋진 집을 사서 북유럽 가구로 깔끔한 인테리어를 하고, 계절 따라 여행을 다닐 거다. 생각이 다들 엇비슷한 모양인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난 부를 과시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사는 집을 고급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골든게이트 파크(Golden gate park) 조성이고 - 항상 뉴욕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보다도 크다고 강조한다 – 또 하나가 빅토리안 풍의 고급 저택을 짓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엽서에 으레 등장하는 집들, 페인티드 레이디스(Painted ladies)는 이 투어의 하이라이트였다. 일곱 자매들(Seven sisters)라고도 불리는 이 일곱 채의 쌍둥이 집은 아일랜드 출신의 목수가 지은 집이다. 그런데 페인티드 레이디는 이 건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페인티드 레이디(Painted lady)라는 표현은 화장을 짙게 한 여성을 마치 얼굴에 페인트칠을 한 듯하다고 놀리는 말에서 유래됐어요. 주택에 장난스럽게 붙이긴 했지만 다분히 성차별적인 뉘앙스가 풍기기는 하지요? 페인티드 레이디로 불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돼요. 첫째, 프리 모던(Pre-modern) 스타일일 것, 둘째, 레드 우드(Red wood)로 지을 것, 셋째, 세 가지 이상의 컬러를 사용할 것, 그중에 반드시 황금색이 포함되어야 했어요. 샌프란시스코를 걸으며 수백 채의 빅토리안 집들을 지나칠 텐데 이제 여러분은 그 중에 어떤 집이 페인티드 레이디인지 판별할 수 있겠죠?”

1906년에 화재와 대지진을 겪으며 살아남은 빅토리안 집들은 가치를 한층 더 인정받게 되었다. 1960년에 히피, 반문화 운동과 맞물려 컬러리스트 운동(Colorist Movement)이 일어났다. 컬러 컨설턴트는 새롭게 떠오르는 직업이 되었고, 예술가, 도장가들이 원색과 파스텔 색상을 조합해 집의 장식선, 몰딩을 마치 조각한 듯이 살리는 방식으로 컬러를 사용해 집을 색칠했다. 집주인들은 경쟁적으로 알록달록 집을 칠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샌프란시스코의 바이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에서는 알라모 스퀘어 주변을 역사 보존 지구로 지정해서 이 집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외관을 변경할 수 없다. 특히 외벽의 색을 칠한다거나 대규보 보수를 하려면 반드시 시의 허가가 있어야 한단다. 집의 색도 집주인 마음대로 고를 수 없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컬러리스트들에게 의뢰를 해야 한다. 이 지역에 유명한 컬러리스트가 세 명이 있는데, 그 세 명이 샌프란시스코, 특히 알라모 스퀘어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페인티드 레이디스 일곱 채 중 왼쪽에서 세 번째 집은 『컬러퍼플(The Color Purple)』 저자, 퓰리처상 수상이 빛나는 앨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살았던 집이에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방음이 잘 안되는데, 그녀는 파티광이라 이웃들의 원성이 자자했다네요.”

빠질 수 없는 질문, “이런 집들은 얼마나 하나요?” 평범한(!) 집이 보통 3백만 달러 정도 한다니, 서울의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 정도다. 돈이 많다면 강남 집 한 채 보다는 페인티드 레이디 한 채를 사겠노라, 허황된 꿈도 꿔본다.

“이 집은 사업가 형제가 지은 집이에요. 똑같은 집을 짓기를 원했고, 여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고 살았어요.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사이가 틀어지고, 아내들끼리 갈등의 골이 깊어졌어요. 결국 동생은 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갔어요. 여기서 떠오르는 교훈이 있지요? 가족과는 사업을 같이 하지 마라.”

아담스 패밀리 하우스

“이 집의 색감은 좀 다르죠? 독일계 양조업자가 지은 집이에요. 주인이 알록달록한 집이 싫어서 일부러 톤다운 된 색으로 집을 지었는데 보시다시피 으슥한 분위기를 풍겨서, ‘아담스 패밀리 하우스(Adams Family House)’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저는 한때 이 집의 열쇠를 가진 적이 있었답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제 직업은 애완동물 돌보미(Pet carer)였어요. 그래서 매일 이 집에 드나들면서 강아지를 산책시켜 주었답니다.”

아, 정말 이 무료 워킹 투어는 너무나 소중하다. 엘리자베스는 오늘 배운 빅토리안 양식의 집을 구별하는 방법을 담은 A4 종이 한 장씩을 건넸다. “이제 여러분도 빅토리안 양식의 주택을 구별하는 방식을 알게 됐어요. 친구들에게도 이 집은 퀸앤 양식이야, 이집은 이탈리아네이트 양식이야 등등 자랑 한 번 해보세요.”

오후 5시 반에 시작된 투어는 알라모 스퀘어 언덕에서 세븐 시스터즈 페인티드 레이디스를 내려다보며 두 시간을 꽉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공원의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분홍색 노을이 내려앉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노을은 매일 근사한 저녁을 선사해주었다.

빅토리아 하우스 페인티드 레이디스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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