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체 너머’를 보는 마음, 낯설게 보기[꼬다리]
습관처럼 하는 일과가 있다. 일명 ‘카메라 되어 보기’다. 눈앞에 보이는 컵, 가방과 같은 사물을 포함해 사람 얼굴 등을 하나씩 선택해 무늬 개수, 주름 하나하나까지 세어가며 글로 적곤 한다. 대상을 명확히 보고자 하는 나만의 버릇이기도 하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가치판단이 개입돼 혼란스러울 때 “카메라가 되어 보자”고 버릇처럼 주문을 건다. 그러면 상황을 좀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무엇보다 내 감정과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사안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혼자서 “카메라 되기에 명확히 실패했군” 하면서 취재내용들을 다시 돌아보곤 한다.
취재에서만 사용하는 건 아니다. 직장 혹은 일상생활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가 내 생각만큼 되지 않을 때면 역시 주문을 외운다. 일기장을 펼쳐놓고 한땀 한땀 복기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야말로 일방향일 수 없기에 ‘카메라 되어 보기’에도 내 감정이 무너질 때가 더 많다.
문득 카메라 되어 보기 말고 ‘카메라 너머 바라보기’를 해보자고 생각한 건 최근 다녀온 여행지에서다. 지난 8월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에 갔을 때였다. 한 철길에서 양팔을 앞옆으로 뻗고 세로 한 줄로 나란히 걷는 아이들과 이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담는 엄마가 눈에 띄었다. 4~5세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어린아이 그 특유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고(아이들의 웃음은 어느 나라를 가든 다 똑같지 않을까), 왼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엄지 척’을 올리는 아이 엄마의 얼굴이 밝았다. 바로 옆에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외할머니로 보이는 분이 양손에 짐을 든 채 휴대전화 카메라를 보며 함께 웃었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자세를 잡는 모습, 그걸 온 신경을 다해 사진으로 담는 모습, 그 딸의 짐을 대신 들고 있는 모습까지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한 장면이었다. 한발 물러서서 본 풍경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피사체에 집중하다 놓친 피사체 밖의 풍경을 제대로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인류학에서는 ‘낯설게 보기’라는 말이 있다.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다층적인 이해를 하려는 인류학적 탐구 방법이다. 인류학자 이용숙은 그 훈련을 “낯선 문화에 들어가 마치 ‘아이’와 같은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세상에 대해 배워 나가는 경험”이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본다면 피사체 너머의 시선은 ‘낯설게 보기’의 다른 말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낯선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은 이의 표정까지 본 건 그 자체로 내게 꽤나 새로웠으니 말이다. 아마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지는 타국이었기에 더 많은 걸 눈에 담았는지도 모른다.
‘낯설게’ 보려는 건 궁극적으로는 내 시선 너머를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채널을 만들 수 있는 환경에서 각자의 말은 일방향으로만 향할 때가 많다. 그런 환경은 우리를 자·타의적으로 내 편과 네 편을 선택하게끔 한다. 그리고는 참과 거짓 혹은 가짜와 진짜를 구별 짓는다. 이제는 ‘가짜’라고 따라붙는 수식어가 정말 ‘가짜’인지, 편의 때문에 가져온 용어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한발 물러서 보자. 카메라 너머 낯설게 봤을 때야 마주할 수 있는 풍경들이 있어서 그렇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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