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시간, 아물지 않는 기억 PTSD

변화하는 뇌가 상처와 공존하는 법

[글]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약대 석좌교수
[그림] 신인철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
[편집] 윤신영 기자
[기획] 사단법인 집현네트워크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제아무리 날카로웠던 슬픔도, 얼굴을 붉히게 했던 수치심도 세월이라는 강물에 씻겨 둥글고 무딘 조약돌처럼 변하기 마련이다. 보통의 기억은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퇴색한다. 생생했던 순간은 빛 바랜 사진처럼 변하고, 격정적이었던 감정은 잔잔한 회상으로 정착한다.

하지만 뇌과학의 시선에서 볼 때, 모든 기억이 이 자연스러운 망각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한다. '외상(trauma)'의 기억이 그렇다. 외상의 기억은 뇌 속에서 과거가 아닌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10년 전의 사고가, 20년 전의 폭력이 마치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감각을 덮친다. 그림자 하나에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스치는 냄새 하나에 그날의 공포가 전면으로 덮쳐온다.

뇌는 도대체 왜 고통스러운 기억을 놓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토록 아픈 기억을 중심축 삼아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일까. 현대 뇌과학은 이 잔인한 기억의 메커니즘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동시에 희망적이다.


| 이름 없는 고통에서 PTSD가 되기까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라는 병명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외상이 남기는 정신적 상처에 대한 기록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에도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악몽과 공포가 묘사되어 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도 전투 후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인물들이 등장한다[1, 2]. 다만, 그것을 과학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했을 뿐이다.

18세기 이후, 의학계는 이 기이한 증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 두근거림과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병사들을 보며 '과민성 심장(irritable heart)'이라 불렀다[3].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포탄 소리에 떨며 마비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에게는 '포탄 충격(shell shock)'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작전 피로(operational fatigue)'라고 불리기도 했다[4, 5]. 당시에는 이 증상들을 단순히 심리적인 나약함이나 전쟁의 공포 탓으로 돌리곤 했다. 하지만 1980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3(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3, DSM-3)를 통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비로소 이 고통은 의학적인 '질병'의 지위를 얻게 됐다[6].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PTSD가 개인의 의지 박약이 아니라, 뇌의 생물학적 변화를 동반한 치료가 필요한 상태임을 인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충격적인 사건 그 자체와 심리적 반응에만 주목했지만, 최근의 뇌과학은 왜 누군가는 회복하고 누군가는 병을 얻는지, 그 뇌 신경생물학적 기전을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아무나 겪지 않는 병
PTSD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외상 사건을 겪은 모든 사람이 PTSD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두 사람 중 한 명은 시간이 지나며 일상을 회복하지만, 다른 한 명은 수년간 악몽에 시달릴 수 있다. 이것은 발병에 '취약성'이라는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외상 경험 자체는 발병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나이, 성별, 과거의 외상 경험, 병력, 그리고 주변의 지지 체계 등 다양한 요인이 외상 사건에 노출된 이후 PTSD가 발병하는 데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소방관이나 경찰관처럼 반복적으로 참혹한 현장에 노출되는 직업군은 발병 위험이 훨씬 높을 수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현대 사회에서 외상의 정의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거대 담론이 외상의 주원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의식주)를 넘어, 정체성의 혼란, 치열한 경쟁, 대인관계의 단절 등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스트레스 속에 살고 있다.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의 비극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겪는 '간접 외상'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현대인의 뇌는 생존을 위협받지 않아도, 사회적 고립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 뇌 속의 비상벨이 꺼지지 않을 때
그렇다면 우리가 외상에 잠식됐을 때, 뇌는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 뇌에는 편도체(amygdala)라는 아몬드 크기의 작은 구조물이 있다. 편도체는 일종의 비상벨 역할을 한다.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면 즉시 경보를 울려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도망치거나 싸울 준비를 시킨다. 이것이 바로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이다.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맹수를 피하고, 현대인들은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할 수 있다 (그림 1).

[그림 1] 뇌의 편도체는 비상벨 역할을 한다.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면 즉시 경보를 울려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근육에 힘을 불어넣어 도망치거나 싸울 준비를 시킨다.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이다.

문제는 이 비상벨이 꺼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정상적인 경우, 위험이 지나가면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 "이제 괜찮아"라는 신호를 보내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그러나 심각한 외상을 경험한 뇌에서는 이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편도체는 과민해져 사소한 자극에도 경보를 울리고, 전전두엽의 제어력은 약해진다. 결과적으로 뇌는 언제나 전투 태세를 유지하게 된다. 마치 화재경보기가 토스트 굽는 연기에도 울리는 것처럼, PTSD 환자의 뇌는 실제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도 경보를 발령한다. 이것이 PTSD 환자들이 경험하는 과각성 상태의 정체다.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고, 항상 주변을 경계하며, 밤에 잠들기 어려운 것은 뇌가 여전히 위험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각성과 함께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적 증상은 회피다. PTSD 환자들은 외상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 사람, 상황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기피가 아니라, 뇌가 고통스러운 기억의 재활성화를 막으려는 자기 보호 기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회피는 삶의 반경을 점점 좁히고,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를 더 어렵게 만든다.


| 시간이 멈춘 기억
일반적인 기억은 해마(hippocampus)라는 뇌 구조물을 거쳐 파일처럼 정리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맥락과 함께 저장돼, 과거의 일로 분류된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때 일이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해마의 기능이 억제된다. 외상 기억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파편적으로 저장된다. 시각적 이미지, 소리, 냄새, 신체 감각이 뒤엉켜 저장돼 있다가, 비슷한 자극을 만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지금-여기’로 재생된다. 이것이 플래시백이다. PTSD 환자가 특정 냄새를 맡거나 큰 소리를 들었을 때 갑자기 외상 현장으로 돌아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뇌에게 그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림 2).

[그림 2]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해마의 기능이 억제된다. 외상 기억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파편적으로 저장된다. 시각적 이미지, 소리, 냄새, 신체 감각이 뒤엉켜 저장돼 있다가, 비슷한 자극을 만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지금-여기’로 재생된다.

| 뇌의 브레이크를 찾아서
최근 뇌과학 분야에서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PTSD 환자의 전전두엽에서 감마아미노부티르산(Gamma-Aminobutyric Acid, GABA)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 GABA는 뇌의 주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로, 쉽게 말해 뇌의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흥분한 신경세포를 진정시켜 뇌가 과열되지 않도록 막는다 (그림 3). 그렇다면 왜 PTSD 환자에게서 이 브레이크 물질이 오히려 증가했을까. 연구진은 뇌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대응해 일종의 보상 작용을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편도체가 계속 경보를 울리니, 뇌가 이를 진정시키려고 GABA 생산을 늘린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상 작용은, 마치 고장난 브레이크처럼 증상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다. 더욱 흥미로운 발견은 증상이 호전되면 GABA 농도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이는 PTSD가 단순한 마음의 병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뇌의 생화학적 변화를 동반한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회복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림 3] PTSD 환자의 전전두엽에서 감마아미노부티르산(GABA)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뇌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대응해 일종의 보상 작용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뇌 구조의 변화도 관찰된다. 스트레스 조절에 관여하는 배외측 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이라는 부위의 두께가 PTSD 초기에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8]. 마치 근육이 운동에 반응해 커지듯, 뇌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조절하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증상이 호전되면 이 부위의 두께도 정상 수준으로 돌아온다. 뇌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변화하고, 또 회복한다.


| 뇌과학, 치료의 새로운 길을 열다
다행히 PTSD는 치료 가능한 질환이다. 현재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인정받는 것은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다. 약물 치료에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SSRI)가 1차 선택지로 사용된다. 우울증 치료제로 잘 알려진 이 약물들은 뇌의 화학적 균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심리치료 중에서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와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EMDR)이 대표적이다. 인지행동치료는 외상과 관련된 부정적인 생각 패턴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EMDR은 치료사의 안내에 따라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외상 기억을 떠올리는 독특한 기법인데, 이를 통해 기억의 정서적 강도를 낮추고 뇌가 외상 기억을 재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앞서 언급한 GABA 연구를 바탕으로, 뇌의 특정 세포에서 생성되는 과도한 GABA를 조절하는 신약 후보물질이 개발돼 현재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이처럼 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더 정밀한 치료가 가능해지고 있다.


| 기억과 함께 살아가기
PTSD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질병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뇌의 놀라운 적응력과 그 한계,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 뇌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기억한다. 하지만 때로 그 보호 기능이 과도해져 우리를 과거에 가둬버린다. PTSD는 뇌가 위험에 대처하는 방식이 극단적으로 변화한 상태다. 그러나 뇌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잊히지 않는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발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적절한 치료와 지지, 그리고 시간이 주어진다면 뇌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갈 수 있다. 비상벨은 결국 꺼질 수 있고, 과거는 과거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는다"는 소설 속 문장은 슬픈 현실을 담고 있지만, 뇌과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는 치유될 수 있다"는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다. 어쩌면 완전히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치유일지도 모른다.


| 참고문헌

  1. Homer. The Iliad of Homer. Lattimore R, translato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2. Shakespeare W. Henry IV, Part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3. Da Costa JM. On irritable heart: a clinical study of a form of functional cardiac disorder and its consequences. Am J Med Sci. 1871; 61:17-52
  4. Peters DC. Remarks on the evils of youthful enlistments and nostalgia. Am Med Times. 1863; 6:75-76
  5. Glass AJ. Psychotherapy in the combat zone. Am J Psychiatry 1954; 110:725-731
  6.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3rd ed. Washington, DC: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1980
  7. Yoon S, Won W, Lee S, Han K, et al. Astrocytic gamma-aminobutyric acid dysregulation as a therapeutic target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Signal Transduct Target Ther. 2025; 10:240
  8. Lyoo IK, Kim JE, Yoon SJ, Hwang J, et al. The neurobiological role of the 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in recovery from trauma: longitudinal brain imaging study among survivors of the South Korean subway disaster. Arch Gen Psychiatry. 2011; 68:70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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