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 숨기고 '저항의 서사'만 뽐내는 이 나라의 기만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9. 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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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35편
‘영광의 날들’과 ‘알제리 전쟁’
2차 대전 때 프랑스 도운 알제리
종전 후 알제리 탄압한 프랑스
드골, 알제리 독립시위 강경진압
佛, 나치에 저항한 역사 앞세우고
알제리 탄압한 역사는 애써 숨겨
국제사회서 프랑스만 기만적일까

프랑스는 나치에 맞선 자신들의 '서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을 도운 알제리를 탄압한 역사는 애써 숨긴다. 누군가는 프랑스의 기만을 꼬집지만, 어디 이게 프랑스뿐이랴. 알제리가 겪은 불행한 역사를 아프게 품고 있는 우리로선 되새겨야 할 점이 많다. 특히 광복절이 두쪽 나고, 사도광산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요즘엔 말이다.

드골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자란 병력을 프랑스 식민지 청년들로 충원했다. [사진=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단 6주 만에 독일에 패배했다.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1890~1970년) 장군은 나치에 굴복하지 않고 항전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드골 휘하에는 덩케르크에서 탈출한 프랑스 제1군의 잔존 병력과 세계 각지 식민지에 흩어진 군대가 전부였다.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은 오랜 세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 원주민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럽과 가까운 북아프리카 식민지 원주민들은 드골의 저항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프랑스의 핵심 식민지인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세네갈 등지에서 무려 23만명이 넘는 청년들이 참전했다.

라시드 부샤렙 감독의 '영광의 날들(2006년)'은 프랑스 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싸웠던 알제리 청년들을 다룬 영화다. 프랑스를 위한 전쟁에 수많은 알제리 청년들은 기꺼이 자원한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프랑스가 해방된 1944년 9월 이후에는 독일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다.

알제리 청년들은 자신들이 해방시켰으므로 프랑스를 자신의 조국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인 알제리 청년 메시우드는 프랑스에서 이레네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알제리에서는 프랑스 여자와 함께 다닐 수도 없었던 알제리 청년에게 이레네는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메시우드는 전쟁이 끝난 후 당당한 프랑스인으로 살아갈 미래를 그리면서 들뜬다. 하지만 메시우드가 전장戰場에서 쓴 편지들은 백인 장교의 검열에 걸려 조롱거리가 됐고 알제리 청년들에게는 음식조차 동등하게 배급되지 않았다.

단지 프랑스인이 되기를 바랐던 메시우드는 1945년 1월 알자스에서 전사한다. 그의 묘비에는 '자유를 위해 죽다'란 글귀가 새겨진다. 영화는 60여년이 지난 후 한 전우가 그의 무덤을 쓸쓸하게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는 프랑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했고, 메시우드 역을 맡은 로쉬디 젬(Roschdy Zem)은 2006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북아프리카 출신 퇴역군인들에게 프랑스군과 동등한 연금과 사회적 혜택을 약속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국기에 새긴 '선진국 프랑스'를 대변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역사가 남긴 기록은 너무나 뼈아프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프랑스는 돌변했다. 1945년 5월 종전 무렵 알제리 동부 세티프에서 독립 시위가 벌어지자 드골은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주권을 위협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전쟁이 끝난 후 미·소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국제무대에서 이등국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를 유지해 국가적 위상을 지키고자 했다. 알제리를 "프랑스의 완벽한 일부"로 규정한 드골은 알제리의 독립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알제리 현지와 프랑스 내부에서 인종차별도 계속됐다. 프랑스인과 알제리인이 같은 깃발 아래 하나가 되는 영화의 풍경은 환상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자유를 외치면서 저항군을 이끌었던 드골의 이미지는 세티프 강경 진압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알제리의 독립 요구는 점차 거세졌다. 전쟁에 참전했던 알제리 청년들은 환멸에 휩싸였고 그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주축이 됐다.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베트남이 독립하자 알제리에서도 조직화한 무장투쟁이 전개됐다. 알제리 무장조직은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연속적인 '카페 테러'를 감행했다.

디엔비엔푸 패배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프랑스군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저항은 줄어들지 않았다.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계속 증원을 요청했다. 알제리 파병으로 징집제가 다시 부활하자 프랑스 젊은 세대들의 반감이 고조됐다.

알제리 출신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전운동까지 벌어지고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지만, 프랑스는 1962년까지 전쟁을 지속했다. 알제리 전쟁 기간에 축적된 기성세대를 향한 프랑스 청년들의 분노는 훗날 '68혁명'으로 폭발했다.

프랑스로 망명한 이탈리아계 유대인 질로 폰테 코르보 감독은 영화 '알제리 전투(1966년)'에서 알제리 독립투쟁과 프랑스군의 폭력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알제리 정부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이 영화는 모두 실제 장소에서 촬영했고, 촬영에 자원한 알제리 국민은 독립항쟁 당시를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프랑스군 지휘관 '마티스 대령'은 나치에 짓밟힌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알제리에서는 해방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마티스 대령'의 실제 모델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정보부 책임자였던 폴 오사레스 장군이다.

폴 오사레스는 2001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자신이 FLN의 지도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했음을 인정했다.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나치의 폭력을 그토록 강조했던 프랑스의 이면을 폭로했다.

'알제리 전투'는 196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영화의 상영을 불허했다. 금지령은 2004년에야 해제됐다. 나치에 맞선 저항의 서사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자신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범죄는 애써 외면하는 프랑스의 기만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겪었던 불행한 역사와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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