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과 인천 개항장

인천에도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에 설치했던 경신역, 금륜역, 구슬역, 원현, 설원 등의 흔적이 지명에 남아 있다. 여각(旅閣)이 주로 숙박과 접대 및 예의와 외교공간이었다면, 30리마다 두었던 역참(驛站)은 교통 및 공문 전달과 행정실무의 기반시설이었다. 이들의 기능은 조선 후기 상업이 확대되면서 주로 객주(客主)나 주막 등 민간운영체제로 옮겨갔고 여각의 숙박 기능은 이후 호텔로 이어졌다.
순례자나 여행자를 위한 숙소, 중세에는 치료와 숙식을 겸한 시설을 의미하는 라틴어(hospitale)에서 유래된 호텔의 현대적 원형은 1829년 미국 보스턴 트레몬트하우스(Tremont House)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객실 170개, 200석 규모 식당과 잠금장치가 달린 개인 객실 욕탕, 무료 비누 등 각종 편의용품이 제공됐고 벨보이(bellboy) 등 서비스가 제공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은 2011년 기네스북에서 공식 인증한 서기 705년 건립된 일본 니시야마온센 케이운칸(西山溫泉 慶雲館)인데 초창기에 무사, 귀족, 순례객들이 이용했던 온천 숙박시설로 현재까지 1320여 년 동안 동일 가문에서 52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개항장을 찾은 다양한 목적의 외국인들에게 숙박시설은 개항장의 풍토를 느낄 수 있는 첫 인상이었기에 종종 그 현황을 여행기에 남기고 있다. 그러나 개항 후 여러 형태의 숙박시설이 많이 있었음에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 현재까지 최초의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 외에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짐작할 뿐이다.
당시 제물포 개항장에는 1884년 9월 선교사 알렌이 투숙했던 중국인이 운영했던 해리호텔(Harry's Hotel), 미군함 군의관 조지 우즈의 1884년 4월 방문 기록에 나타난 일본인 호리(堀) 집안의 대불(大佛)호텔, 1893년 제중원 의사 에비슨 가족이 묵었던 중국인 경영의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怡泰棧), 1895년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의 기록에 보이는 오스트리아인 스타인벡의 꼬레호텔(Hotel de Coree), 1898년 결혼식 피로연 광고에 나타난 오리엔탈호텔(Oriental Hotel), 1905년 폐업 기록만 알 수 있는 프랑스인 보에르가 운영했던 터미나스호텔(Terminas Hotel) 등이 있었다. 또, 일본인 경영의 서양식 목조 3층 규모의 인천호텔(1907),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주 찾았던 4층 목조 건물의 아사오카(淺岡)여관, 1905년 개관한 3층 규모의 아사히야(旭屋)여관, 축대 위에 세워진 2층 건물의 스이쯔(水津)여관 등도 부분적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호텔은 광복 이전에는 모두 외국인들에 의해 세워졌고 주 영업 대상은 일본인과 외국인이었다. 1920년대부터는 공연 등을 통해 단순한 숙박장소가 아닌 문화공간으로 바뀌었고 외교 및 정치적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광복 후 1950년대는 호텔정치의 정점이 되어 호텔이 작은 정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들어 관광사업진흥법(1961),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 설립(1962) 등으로 관광호텔의 발전이 시작됐고, 1970년대는 민간호텔 운영이 활발해졌다. 1980년~1990년대 호텔업계는 서울아시안게임(1986), 서울올림픽(1988). 한일월드컵 및 부산아시안게임(2002) 등으로 격변기를 맞게 되면서 세계화 속 복합문화 공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래 바캉스라는 용어에 빗댄 '호캉스'라는 표현을 종종 접한다. 호텔이 휴식을 겸한 복합적 문화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는 문화의 일부가 된 호텔의 연원을 통해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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