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갈림길…LG는 류지현-서용빈-김재현을 어떻게 잡았나

[이재국의 엘팬알백] ㉟1994년 '신인 삼총사' 류지현 서용빈 김재현 입단 스토리

『LG의 ‘무서운 아이들’ 서용빈, 김재현, 유지현이 94프로야구 시즌 초반 파란을 일으키며 각 팀의 특급 경계선수로 떠오르고 있다. 팀 득점과 타점의 50% 가까이를 엮어내는 이 삼총사의 눈부신 활약으로 LG는 시즌 전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중하위권 전력으로 평가했던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단독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1994년 5월3일자 한겨레>

1994년은 LG 트윈스의 해였다. ‘신바람 야구’로 대표되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즌을 장식하며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에 성공한다. 이 돌풍의 중심에는 바로 신인 삼총사로 불린 ‘꾀돌이’ 류지현(당시엔 유지현), ‘쾌남’ 서용빈, ‘캐넌히터’ 김재현이 있었다.

신인 삼총사가 나란히 타순 1~3번에 포진해 KBO 레이스를 쥐락펴락한 것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일. 말 그대로 KBO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새내기들의 대반란이었다.

기량도 기량이지만 3명 모두 깔끔한 마스크와 톡톡 튀는 개성으로 무장해 1990년대 초반 농구장에 있던 ‘오빠부대’를 야구장으로 몰고 오면서 새로운 흥행 지형도를 만들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는 35편과 36편에 걸쳐 1994년 신인 삼총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35편에서는 입단 과정에 관한 스토리다. LG는 어떻게 이들 신인 3명을 한꺼번에 잡았을까.

그해 ‘고졸 신인 최초 억대 몸값’을 기록한 투수 신윤호와 곧바로 10승 투수로 도약한 인현배의 입단 이야기도 곁들인다.

국가대표 시절의 한양대 내야수 류지현. 공수주에서 야무진 야구를 펼쳐온 유망주였다. ⓒ스포츠서울

◆국가대표 최대어 류지현 오른팔 부상…1차지명 돌발변수

1994년 신인 대상 선수를 놓고 보면 서울을 연고로 하는 LG와 OB 양 팀이 모두 달려들 만한 확실한 1차지명 후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0년 김동수, 1991년 송구홍, 1992년 임선동, 1993년 이상훈 사례와는 달랐다.

사실 아마추어 시절 명성만 따지면 당연히 류지현이 최대어. 충암고 1학년 때인 1987년 대통령배 감투상과 도루상을 받아 야구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2학년 때인 1998년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학년 때인 1989년 청소년대표는 물론 성인 국가대표에 전격적으로 발탁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선수였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한국야구가 국가대표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시점에서 건국대 1학년 이종범이 유격수, 충암고 3학년 류지현이 2루수로 활약하며 한국 대표팀 키스톤 콤비를 이루기 시작했다.

류지현은 체격(175㎝‧73㎏)이 작았지만 빠른 발과 감각적인 수비 실력을 뽐내면서 대학 4학년 때까지 무려 5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 중앙 내야(middle-infield)를 책임져 왔다.

하지만 대학 3학년 시절 오른쪽 팔꿈치를 다친 뒤 통증이 어깨까지 이어지면서 가장 중요한 대학 4학년 때 공수 양면에서 심각한 부진에 빠졌다. 송구에 어려움을 겪었고, 덩달아 4학년 때 17경기에서 타율 0.215(65타수 14안타)라는 최악의 기록을 찍었다. 도루도 6개뿐이었고, 홈런은 2개였다.

“류지현 어깨가 갔어~.”

당연히 스카우트들 사이에서 이같은 평가가 흘러나왔다.

“대학 3학년 때 7월에 한‧미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혀 미국 동부지역을 돌며 경기를 했어요. 추운 지방인 버펄로 야구장(파일러츠구장)에 도착해 햄버거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인필드 시간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캐치볼도 안 하고 몸이 굳은 상태에서 공을 던지는데 팔꿈치에서 ‘뚝’ 소리가 났어요.”

류지현 현 국가대표 감독은 부상이 발생했던 1992년 당시 상황을 돌아봤다. 야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당시는 재활도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무작정 쉬었죠. 가장 중요한 4학년 때였는데 팔꿈치에 신경을 써서 공을 던지다 보니 나중엔 어깨까지 아프더라고요. 송구는 송구대로 안 되고 타격까지 엉망이었죠. 그랬으니 스카우트들 사이에서 ‘류지현 팔 갔다’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했죠.”
동국대 시절의 류택현. 그는 1994년 OB 1차지명을 받은 뒤 훗날 LG로 트레이드돼 꽃을 피운다. ⓒ스포츠서울

◆동국대 왼손 파이어볼러 류택현, 1차지명 후보로 급부상

류택현은 휘문고 3학년 시절이던 1989년 봉황대기에서 타격상(0.538)을 받으면서 투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동국대 진학 후 2학년 때 야구를 포기하고 경영학과 일반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다 4학년에 올라가기 직전 다시 유니폼을 입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4학년 때 성적은 10경기에 등판해 승리없이 4패, 평균자책점 5.90. 숫자만 놓고 보면 눈길을 끌지 못한다. 야구를 한동안 쉬면서 밸런스가 잡히지 않아 제구가 다소 들쑥날쑥했던 탓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좋은 체격조건(184㎝‧80㎏)의 좌완으로서 무엇보다 시속 140㎞ 초·중반을 때리는 빠른 공이 매력적이었다. 당시 우완투수도 시속 140㎞만 넘겨도 강속구 투수로 불렸는데 류택현은 그해 드래프트 대상자 중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좌완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시속 150㎞대 왼손 파이어볼러 정도로 보면 된다.

그래서 스카우트들 사이에서는 류택현의 장래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종전까지는 건국대 우완 김민국(한서고 출신)이 투수 중에 1차지명 후보로 거론됐으나 류택현이 급부상했다. LG와 두산 모두 1차지명 후보로 보고 4학년 내내 류택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LG와 OB가 서울지역 1차지명에서 주사위 던지기로 우선권을 가리던 풍경. ⓒ스포츠서울

◆1994년 서울권 1차지명 방식 변경…주사위 대신 이름 써오기

“양 팀 모두 1차지명 선수 이름 써 오셨죠? 그럼 개봉하겠습니다.”

11월 3일 오전 10시.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서울팀 1차지명 회의가 열렸다.

LG 트윈스와 OB 베어스는 예년과 달리 각자 1차지명 선수 이름을 써서 KBO에 서면으로 제출하고, 두 구단끼리 봉투를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서울 두 팀은 1986년부터 동전 던지기와 주사위 던지기 등으로 1차지명 우선권을 가려왔지만, 2차례(1986년, 89년)를 제외하고는 LG(전신 MBC 포함)가 번번이 이기면서 최대어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추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수소관의 영역. 하지만 패하는 팀은 큰 내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1990년 이후 서울지역 1차지명 주사위 던지기에서 4년 연속 패배를 해온 OB 측에서 새로운 지명 방식을 주장했고, LG도 이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상 처음으로 ‘추첨’이 아닌 ‘선택지명’ 방식을 채택하게 됐다.

만약 LG와 OB가 봉투 안에 써 온 선수 이름이 같을 경우엔 해당 선수를 놓고 추첨을 하기로 했다.

LG는 유격수 류지현, OB는 좌완 류택현을 1차지명한 사실을 보도한 스포츠서울 신문.

◆OB 갈 뻔했던 류지현?…류지현과 류택현의 엇갈린 운명

“LG 트윈스 류지현! OB 베어스 류택현!”

봉투를 열어 보니 두 구단에서 써 온 1차지명 선수 이름이 달랐다. LG는 류지현, OB는 류택현를 선택했다.

굳이 주사위 던지기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두 구단이 서울권 1차지명을 가린 1986년 이후 가장 빨리, 가장 싱겁게 결론이 났다.

양측 모두 구단 사정에 따른 지명이었다.

OB는 왼손투수가 팀의 숙원이었다. 1차지명 우선권을 잡은 뒤 지명한 1986년 박노준, 1989년 이진이 좌완 실패작으로 돌아가면서 매년 좌투수 기근에 시달렸다.

1993년 좌투수가 거둔 승수는 단 2승. 구동우와 김익재가 1승씩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OB는 그래서 류택현을 ‘미완의 대기’로 평가하고 다시 한 번 1차지명권을 좌투수에게 행사했다.

게다가 1993년 입단한 대졸 김민호가 유격수로서 큰 가능성을 보인 점도 류지현이 아닌 류택현을 선택한 이유로 작용했다.

1993년 12월 16일자 스포츠서울 보도. LG 1차지명 류지현(오른쪽)과 어윤태 단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LG가 류지현을 1차지명했지만, 사실 류지현에게 먼저 관심을 보였던 구단은 OB였다.

충암고 3학년 시절, OB 강남규 스카우트 부장이 류지현 집까지 드나들며 공을 들였다. “고졸이지만 대졸 야수 최고 선수급으로 계약금을 주겠다”며 설득했다.

당시 류지현의 부모 마음은 OB 입단 쪽으로 기울었다.

“부모님 뜻대로 결정했다면 제가 OB에 입단했겠죠. 하지만 대학에 가서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것이 당시 꿈이었기 때문에 제가 부모님을 설득했어요. 결국 한양대로 가니까 OB 쪽에서 서운했는지 대학 시절엔 학교에도 한 번 오시지 않더라고요. 당시 1차지명 대상 선수면 구단에서 배팅장갑도 주고 관심을 기울이곤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OB는 저를 뽑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죠.”

류지현의 말이다.

LG는 달랐다. 대학 시절 줄곧 이길환 스카우트가 학교까지 찾아와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고교 시절까지는 MBC 청룡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유격수 김재박 선수가 제 우상이라 항상 눈여겨보긴 했죠. 1990년 MBC가 LG로 바뀌고 우승할 때부터 저도 LG 트윈스를 좋아했어요. 좋아하던 구단에서 1차지명을 해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죠.”
이광환 전 감독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제주도 서귀포 바닷가에서 기자와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때 류지현 1차지명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려줬다. ⓒ스포팅제국

물론 LG 내부적으로도 한양대 4학년 시절 어깨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는 류지현에 대해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광환 감독이 “류지현을 뽑자”고 주장해 힘을 실었다.

기자가 살아생전의 이광환 전 감독을 제주도 서귀포로 찾아가 만났을 때 1994년 1차지명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난 류지현이 고등학교 다닐 때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정도로 재치 있고 야구 잘한다는 소릴 들었어. 고등학생이 국가대표 뽑힌 것만 해도 보통 애는 아니다 생각했지. 내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연수 갔을 때 아지 스미스가 메이저리그에서 어깨 제일 나쁜 선수라는 소리를 들었어. 근데 공을 잡아서 던지는 게 제일 빨라. 그러면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유격수가 됐지. 류지현도 송구 동작이 빨랐어. 대시도 잘하고. 이종범은 어깨가 강하지만 노려서 공을 때리는 스타일이었고, 류지현은 공을 글러브에서 빼서 던지는 게 빨랐지. 재치가 있으면 하다못해 2루수라도 쓸 수 있잖아. 그래서 내가 지현이 잡자고 했어. 그러니까 지현이한테 애정이 더 강한지 몰라.”
초등학교 스쿨존 교통안전 지킴이로 봉사한 뒤 설렁탕으로 기자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이광환 전 감독. ⓒ스포팅제국

LG 구단 사정을 봐도 유격수 자원이 필요했다. 1992년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인 송구홍을 1993년 유격수로 이동시켰지만, 송구홍이 군입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송구홍은 1993년 타율 0.307로 KBO리그 3위에 올랐는데, 팀 내 유일한 3할타자였다. 류지현이 송구홍의 공백을 곧바로 메워준다면 금상첨화였다.

LG는 당시 메이저리그 선진 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여 트레이닝과 재활 파트에서 8개 구단 중 가장 앞서가는 구단이었다. 이런 자신감을 통해 류지현의 오른팔을 살려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OB에서도 류지현을 1차지명 선수로 찍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경우 주사위 던지기로 우선권을 가려야 한다.

LG로선 여기서 OB에 패할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구단 내부 회의 끝에 먼저 류지현을 1차지명 후보로 두고, 만약 류지현 획득에 실패할 경우 류택현을 1차지명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LG에 1차지명된 류지현은 계약금을 놓고 처음엔 구단과 의견 차이가 컸으나 12월 15일 계약금 7500만 원, 연봉 1200만 원 등 총 8700만 원에 사인하면서 마침내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대학 4학년 때의 부상만 아니었다면 억대 계약금도 노려볼 수 있었던 천재 유격수는 1년 전 해태에 입단한 이종범 계약금(7000만 원)보다 500만 원 높은 선에서 도장을 찍었다.

신일고 시절의 김재현. 야구도 잘했지만 잘 생긴 외모까지 갖춰 스타성을 겸비한 유망주로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스포츠서울

◆신일고 천재타자 김재현을 잡아라!

“잠시만요. 아버님 어머님, 저희 좀 기다렸다가 나중에 내리시죠.”

1993년 11월 12일 금요일. 비행기가 일본 오키나와에 착륙한 시점이었다. 승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비행기에서 내릴 채비를 하는 순간, LG 트윈스 유지홍 스카우트는 김재현의 부모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리에 앉아서 마지막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앞 자리에 대한야구협회 최인철 회장이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와 아마야구가 스카우트 싸움으로 갈등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KBO와 대한야구협회가 체결한 프로-아마 협정서 2조4항에는 “고교 졸업 예정 선수가 프로구단에 입단을 원할 경우 그해 11월 15일까지 계약을 체결해야 하며 그 후에 프로 구단과 계약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었다.

김재현은 이미 연세대에 입학하기로 하고 가등록을 해둔 상태였지만, 11월 15일 이전까지 LG 입단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가계약이나 공증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지는 상황. 김재현은 당시 오키나와에서 열린 한‧일고교친선전에 참가해 연일 안타와 홈런을 뽑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대한야구협회에서 오랫동안 회장직을 맡아 온 최인철 전 회장이 시구하는 모습. ⓒ스포츠서울
“회장님이 저나 김재현 부모님의 얼굴까지 알아보지는 못하셨겠죠. 하지만 회장님이 일본 오키나와 공항에 도착했으니 협회 직원들이 마중을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에 김재현 부모님에게 잠시 기다리자고 했던 것이죠. 비행기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서 나가니 회장님도, 협회 직원도 다 공항을 떠났는지 아무도 안 보이더라고요.”

현재 이태원에서 요식업을 하고 있는 유지홍 전 스카우트는 22년 전 오키나와 공항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던 돌발상황을 회상했다.

유지홍 스카우트는 MBC 청룡과 LG 트윈스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1991년부터 스카우트로 변신했다. ⓒ스포츠서울

◆대통령배 타격 4관왕…‘제2의 장효조’라 불린 초고교급 선수

김재현은 신일중과 신일고 시절 ‘천재 타자’로 불리며 최고의 선수로 각광받았다. 신일고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하며 2년 선배 조성민 설종진, 1년 선배 강혁 백재호 등과 함께 신일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끌었다. 주전 정도가 아니라 봉황대기에서는 1학년으로서 수훈상을 받았을 정도였다.

특히 3학년 때인 1993년 대통령배 대회 때는 타격상(0.588), 최다안타상(10개), 홈런상(4개), 타점상(14점) 등 4관왕에 오르며 ‘초고교급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2의 장효조’라는 얘기가 나오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장효조보다 파워 면에서 월등한 선수”라는 호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여기에 빠른 발도 갖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호타준족’이었다.

“당시 LG와 OB가 서울 지역 고교 팀을 반으로 나눠 스카우트하기로 신사협정을 맺고 있었어요. 김재현의 신일고는 LG가 관리하는 고교였고, 김동주의 배명고는 OB 쪽이었죠. 그러니까 LG는 김동주를 영입할 수 없었고, OB도 김재현을 넘볼 수 없었던 겁니다. 김재현이 예정대로 연세대로 가느냐, 방향을 틀어 LG에 입단하느냐만 남았던 거죠.”

유지홍 당시 스카우트의 설명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서울 지역 고졸 선수 스카우트에 관한 신사협정이다. 김재현과 김동주가 대학을 진학하면 졸업할 때는 LG와 OB가 나눈 고교 기준은 무의미해진다. 양 측 모두 우선권에 따라 새롭게 1차지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재현 3학년 때 제가 이틀이 멀다 하고 우이동에 있는 김재현 집을 드나들었어요. 1대1로 만나 얘기를 나눠 보면 어른스럽고, 영리한 느낌이었어요. 고3이었지만 카리스마도 있었고요. 타고난 재능에다 성적도 월등했지만 가장 매력적인 건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하는 성실한 태도였어요. 제가 갈 때마다 밤늦도록 스윙을 하고 있더라니까요. 무조건 잡아야겠다고 판단했죠.”

그런데 김재현과 그의 부모는 일찌감치 연세대 진학으로 마음을 굳혔고, 연세대는 김재현에 대해 입학 가등록을 해둔 상태였다. 고려대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김재현의 집안은 연세대를 선택했다.

고려대는 그 대신 김동주를 잡았다. OB와 스카우트 전쟁을 벌이면서 일찌감치 가등록을 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대학 입시 때 연세대 상대에 원서를 넣으셨는데 떨어지는 아픔을 겪으셨거든요. 연세대에 한이 좀 맺혀 계셨죠. 제가 7대 독자잖아요. 연세대에 가서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고요.”

하지만 유지홍 스카우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고졸 타자 역사상 최초로 억대 선수로 만들어주겠다”며 당근을 제시하며 설득하기도 했다.

사실 김재현의 아버지 김웅용 씨는 동대문에서 오랫동안 포목도매업을 해 와 재력이 있었다. 돈 때문에 흔들릴 집안은 아니었다. 계약금은 그저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었다.

김재현은 LG 트윈스 입단 후 '캐넌히터'라는 별명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 ⓒ스포츠서울
“재현이가 한일 고교 친선전을 하는데 오키나와에 경기라도 보러 한번 가시죠. 저도 다른 선수들도 체크할 겸 오키나와에 가려고 합니다.”

유지홍 스카우트는 평소 친분을 쌓아 온 김재현의 부모에게 “오키나와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아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한일전에 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결국 동행하기로 했다.

한‧일 고교야구 친선대회는 11월 6일부터 14일까지 6경기를 진행하기로 돼 있었다. 대표팀 선수단은 15일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고교 선수 계약 마감일도 15일. LG로선 16일 이후 김재현을 접촉해 계약서 서명을 받아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대표팀 일정 때문에 연세대 김충남 감독은 김재현을 잡아둔 것으로 판단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15일에는 대표팀 선수들이 귀국하는 김포공항에 연세대 선수들을 풀어 LG의 접근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LG는 그 허점을 파고들면서 마지막 카운트펀치를 날리게 된다.

신일고 김재현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전격적으로 LG에 입단 계약을 하게 된 스토리를 보도한 1993년 11월 14일자 스포츠서울 신문. ⓒ스포츠서울

◆엔테베 작전…오키나와 잠입 김재현 계약 성공

유지홍 스카우트는 한국 대표팀 선수단이 묵는 호텔 인근에 숙소를 잡았다. 그곳에서 먼저 김재현 부모를 상대로 마지막 설득을 했다.

그러자 부모는 "재현이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종전까지 연세대 진학만을 고집하던 태도에서 완연히 바뀌었다. LG 입단에 대한 반 허락을 얻어낸 셈이었다.

문제는 계약서에 반드시 보호자와 선수 본인의 서명이나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김재현이 사인을 해야만 계약서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유지홍 스카우트나 부모가 김재현의 서명을 받기 위해 선수단이 묵는 호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협회에서 만남을 허락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을 썼다. 관광 가이드로 고용한 사람에게 부탁을 한 것. 가이드가 김재현 숙소로 가서 “엄마 아빠가 오셨는데 옆 호텔에서 잠시 보자고 하신다”며 약속 장소로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때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어요. 그날 일부러 방망이를 들고 호텔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협회 직원이 ‘어디 가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호텔 밖에서 스윙 연습 좀 하다 들어오려고 한다’고 대답했어요. 아무렇지 않게 내보내 주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오키나와 도착한 다음에 매일 밤마다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훈련을 했거든요. 한일전에서 매 경기 안타와 홈런을 때리기도 했고요.”

실제로 초반 3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김재현은 홈런 4방을 몰아치며 한국의 전승을 이끌고 있었다. 지독한 ‘훈련벌레’였기에 협회에서도 방망이까지 들고 호텔 밖으로 나가는 김재현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근 호텔에서 김재현과 부모, 유지홍 스카우트 4명이 마주앉았다. 여기서 김재현의 마음이 흔들렸다.

“유지홍 선배님이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솔직히 어린 마음에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계약금도 계약금이지만 김재박이라는 슈퍼스타가 LG를 떠난 뒤 영구결번처럼 공번으로 남아 있던 7번을 저한테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7대 독자이기 때문에 7번의 의미가 더 있다고 연결해 주시니 감동이 더 커졌어요. 또한 제가 워낙 대학을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프로 입단 이후에라도 원하면 구단 차원에서 대학을 보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시니 거절할 명분도 없더라고요.”

김재현 현 SSG 단장의 기억이다.

고졸 선수가 곧바로 프로 무대에 도전장을 던지려면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LG에는 이미 가능성을 보인 고졸선수들이 있었다.

“이종열 선배나 박종호 선배도 고졸 선수로 LG에 먼저 들어가 어느 정도 활약을 하고 계셨잖아요. 솔직히 고교 시절엔 제가 선배들보다 더 잘했기 때문에 프로 들어가면 선배들 이상으로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날 부모님께서는 저한테 최종 결정을 맡기셨는데 제가 그 자리에서 'LG에 입단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교 선수 계약 마감시한을 불과 3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을 통해 뒤늦게 알려지자 야구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마음을 놓고 있다 허를 찔린 대한야구협회와 연세대 측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협정서에 따라 11월 15일 이전에 계약을 했기에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 KBO도 이 계약을 승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언론을 통해 ‘엔테베 작전’으로 불린 LG의 김재현 스카우트 작전은 이처럼 극적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실제 일어난 하이재킹(운항 중인 항공기 납치) 사건과 구출 작전을 일컫는다.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김재현은 계약금 91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으로 총 1억300만 원에 LG와 계약했다. 고졸 야수 최초로 억대 몸값을 돌파하는 새 역사를 썼다.

1994년 신인 2차지명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로 지명받은 서용빈. 하지만 서용빈은 첫해부터 대반란을 일으킨다. ⓒ스포츠서울

◆2차지명 42명 중 41번째 지명…막차 탄 서용빈

신인드래프트 서울지역 1차지명이 1993년 11월 3일 LG 류지현, OB 류택현 지명으로 시작해 11월 5일 지방 구단의 1차지명까지 마무리됐다.

그리고 11월 15일까지 고졸 선수 계약들도 끝났다.

신인 2차지명은 11월 22일 서울 역삼동 반도아카데미에서 열렸다.

전년도 최하위 태평양이 2차 1라운드 우선 지명권 2장을 갖고 이숭용(중앙고-경희대 1루수)과 곽병찬(현대공고-경남대 투수)을 선택하면서 2차지명의 돛이 올랐다.

전년도 최종 순위 4위 LG는 1라운드 5번째 순서에서 선린상고-단국대 출신의 투수 인현배를 찍었다. 인현배는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무장한 우완투수. 계약금 40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의 조건에 입단계약을 맺게 된다.

LG가 1994년 신인 2차 1라운드에 지명한 투수 인현배. 그는 입단 첫해 10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한다. ⓒ스포츠서울

전년도 준우승팀 삼성은 1라운드 7번 순서에서 김한수(광영고-중앙대 내야수), 우승팀 해태는 마지막으로 허문회(부산공고-경성대)를 지명했다.

LG는 2라운드에서 박은우(광주상고-원광대 내야수), 3라운드에서 박철홍(신일고-고려대-포철 잠수함투수), 4라운드에서 최동수(광영고-중앙대 포수), 5라운드에서 박창현(동산고-경남대 투수)을 차례로 선택했다.

8개 구단이 4라운드까지는 모두 호명했지만, 5라운드부터는 몇몇 구단에서 “패스”를 외치기 시작했다.

요즘은 2차지명에서 각 팀이 11라운드까지 거의 의무적으로 지명하지만, 당시만 해도 4~5라운드 정도에서 지명이 끝날 때가 많았다.

LG 앞 순번의 빙그레는 5라운드부터 “패스”를 외치고 있었다. 6라운드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다시 LG 순서가 왔다.

“LG 트윈스 지명하겠습니다. 선린상고-단국대 내야수 서용빈!”
1994년 2월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당시 재일교포 장훈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 서용빈. 서용빈에겐 운명의 만남이 된다. ⓒ스포츠서울

사실 누구도 LG의 6라운드 지명 선수 이름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실제로 6라운드에 호명된 선수는 서용빈이 마지막이었다. 뒤쪽 순번의 팀들은 모두 “패스”를 외치며 판을 접었다.

마지막 7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선수가 부족한 쌍방울에서 유일하게 김성(덕수상고-영남대 외야수)을 호명했을 뿐 나머지 구단은 모두 “패스”였다. LG도 마찬가지로 "패스"를 외쳤다.

다시 말해 서용빈은 그해 2차지명 전체 42명 중 41번째로 호명된 선수였다. 쌍방울이 7라운드에서 김성을 찍지 않았다면 막차로 이름이 불리는 선수가 될 뻔했다.

서용빈은 1994년 입단하자마자 최고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쓰게 된다. ⓒ스포츠서울

◆“스카우트들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서용빈의 다짐

서용빈의 지명 순번에서 알 수 있듯이 LG도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선린상고와 단국대 시절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격이 부드럽고 1루수로서 수비는 괜찮게 한다”는 평가였지만, 사실 1루수는 수비력보다는 공격력이 중요시되는 포지션. 그 시절엔 더욱 그랬다.

동기생 중 1루수로는 부산공고와 경성대를 다닌 허문회가 국가대표 1루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포스트 김성한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해태가 2차 1라운드에서 허문회를 지명했다.

그렇다면 LG는 어떻게 서용빈을 지명할 수 있었을까.

“당시 스카우트라고 해봤자 LG에서는 저하고 이길환 선배 두 명이었어요. 둘이서 동대문구장에 가서 매일 같이 경기를 보긴 하지만 모든 선수를 면밀히 살펴보는 건 쉽지 않잖아요. 당시엔 2군이 요즘처럼 퓨처스리그를 하는 게 아니라 대학팀이나 실업팀과 연습경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2군 코칭스태프한테 연습경기 때 상대하는 대학 선수들을 좀 유심히 봐 달라고 부탁을 해놨죠.”
1993년 LG 2군의 최정우 작전코치. 1994년 1군 수석코치로 승격한다. ⓒ스포츠서울

서용빈은 2군의 최정우 작전코치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케이스였다. LG와 단국대가 연습경기를 할 때 서용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물론 LG가 먼저 나서서 상위 라운드에 지명할 만한 선수라고는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인 지명을 마칠 즈음까지 어떤 팀에서도 서용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른 팀들은 이미 “패스” 모드에 들어간 상황. LG는 결국 2차 6라운드에서 마지막으로 “서용빈”을 불렀다. 사실 마지막 라운드 지명이었으니 ‘실패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찍은 선수였다.

현재 LG 전력강화 총괄을 맡고 있는 서용빈 코디네이터의 당시 심정은 어땠을까.

“지명 당일 LG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전화하신 분이 이길환 선배(2007년 작고)였던 걸로 기억해요. 제가 마지막 순번에 지명됐다고 하시더라고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지명이라도 됐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때 다짐했어요. '나를 뽑지 않은 스카우트들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말이죠.”

간신히 LG에 지명된 서용빈은 계약금 1800만 원, 연봉 1200만 원 등 총 3000만 원에 사인하며 프로행 막차를 탔다.

KBO 사상 최초 고졸 선수 억대 계약을 한 충암고 신윤호가 입단식에서 어윤태 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스포츠서울

◆충암고 투수 신윤호, 사상 최초 억대 몸값 입단

사실 1993년 말 계약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LG 신인은 또 있었다. 바로 충암고 우완 강속구 투수 신윤호였다.

11월 9일 LG와 계약금 8800만원, 연봉 1200만 원에 계약해 KBO 역사상 고졸 신인 최초로 총액 1억 원을 돌파하는 이정표를 만들었다.

신윤호는 충암고 1학년 때 외야수에서 투수로 전향해 투수경력이 짧지만, 유연한 투구폼과 타고난 힘으로 3학년 시절 최고 구속 146㎞를 찍어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평가였다. 좌완 이상훈과 함께 좌우 파이어볼러로 LG 마운드의 미래를 책임져 줄 후보로 꼽혔다.

그 뒤를 이어 김재현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11월 12일 계약하며 총액 1억300만 원(계약금 9100만 원+연봉 1200만 원)에 사인해 신윤호의 최고금액을 뛰어넘었고, 11월 15일 부산고 좌완 주형광이 김재현보다 100만 원 많은 1억400만 원(계약금 9200만 원+연봉 1200만 원)에 롯데와 계약하면서 그해 고졸 신인 최고 몸값 선수로 등극했다.

1994년 대졸 신인 최고 계약금이 류지현의 7500만 원. 이런 점에서 보면 1993년 말부터 고졸 선수들의 몸값이 본격적으로 폭등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LG는 이 신인들을 앞세워 1994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신바람 야구'로 시즌 초반부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엘팬알백] ㊱에서 계속

1994년 '신바람 야구'에 신이 난 LG 트윈스 팬들이 구단 깃발을 흔들며 열정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다. ⓒ스포츠서울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