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유머란 무엇인가] 고통을 넘어서는 사랑과 유머의 힘

이기호 소설가·2018 동인문학상 수상자 2026. 4. 27.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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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머와 사랑
치매 앓는 아버지가 “네 엄마가 나 없으면 어떻게 사냐”고 말할 때
기저귀 갈아주던 어머니가 “내가 환장한다, 환장해” 하며 짓는 미소
일러스트=이철원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괴로웠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만한 부분이, 그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외모가 출중하길 하나, 학벌이 뛰어나길 하나, 그렇다고 집에 돈이 많길 하나? 그런 거 저런 거 다 없으면 손재주라도 좋아야 할 텐데 형광등 하나 제대로 갈아 끼우지 못하는 저주받은 ‘똥손’으로 태어났으니 그 절망은 더더욱 커졌다. 포기하면 되잖아? 하지만 사랑이 찾아오는 일이 불가항력적이듯 떠나보내는 마음 또한 사람의 능력으론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나날이었다. 나를 더 힘들게 한 일은 그 사람을 매일매일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같은 학교 후배였다). 매일 아침 상승했다가 하락하고, 나의 ‘없음’만을 계속 확인하는, 내 영혼의 어두운 깊은 곳까지 굴을 파고 내려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웃은 적이 있었다. 내가 지각한 주제에 발을 헛디뎌 책상과 함께 넘어진 날이었는데, 그때 그 강의실에 있던 모두가 함께 웃었다. 하지만 나에겐 오직 그 사람의 웃음만 눈에 들어왔다. 그 웃음,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 나의 ‘없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으로 치환되는 순간. 그러니까 유머는 바로 그 순간 발명된 것이다.

버스터 키튼이라는 분이 있다. 우리 역사로 따지자면 순종 황제 시절 미국에서 영화감독 겸 배우로 활동한 분인데, 찰리 채플린이 동료이자 라이벌 배우이기도 했다(그러니까 둘 다 코미디가 본업이었다). 이분의 강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스턴트와 그에 따른 슬랩스틱 연기였다(후에 홍콩의 영화배우였던 성룡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이분이다). 특수 효과나 이렇다 할 안전장치가 없는 상황에서도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고, 달리는 자동차나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폭삭 무너진 건물에서도 유유히 걸어 나오는 연기를 말끔하게 해낸 분. 하지만 이분의 핵심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무표정. 이분의 트레이드마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하자면 강물에 빠지고, 기차 바퀴에 옷이 낀 채 끌려갈 때조차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무표정이었다(그 점에선 찰리 채플린과 결이 달랐다). 사람들은 그 부조화 때문에 더 웃었고, 유머란 얼굴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 맥락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먼저 웃으면 안 되는 것. 그렇게 나의 고통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너에게 보여주는 것(원래 슬랩스틱이란 용어의 어원은 ‘큰 소리가 나는 채찍’에서 왔다). 나의 ‘없음(무표정)’을 드러내면서도 최대한 너를 웃게 만들 것. 그렇게 유머는 사랑과 연결된다. 우리가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면서 까르르 표정 연기를 해보이는 것, 연인과 노래방에 가서 벽을 붙잡고 댄스를 선보이는 것, 심지어 말도 안 통하는 강아지마저 웃기겠다는 일념으로 같이 왈왈 짖는 흉내를 내는 것 역시 다 같은 맥락이리라. 당신의 배우자가 예전처럼 웃기지 않는다고, 나이 들어서 유머 감각이 사라진 것 같다고 푸념하는 사람은, 실은 그 사랑의 실효를 의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유머와 사랑은 언제나 느닷없이 다시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내 아버지는 현재 알츠하이머로 인해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날들이 많은데(어머니를 보며 정중하게 누구냐고 묻기도 하신다), 가끔 자식들 앞에서 예전 그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네 엄마가 나 없으면 어떻게 사냐?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해줘야 해”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다(말하자면 그게 아버지의 유머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주다 말고 “내가 환장한다, 환장해” 맞장구를 치시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미소를 보곤 했는데, 그게 그 두 분의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아내와 함께 어머니 아버지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아무래도 오래 운전을 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아내는 내게 “조심해”라고 말하면서 손을 잡아주었다. 그 옛날, 강의실에서 넘어진 나를 보며 웃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내는 풋, 하고 혼자 웃었는데, 그 순간 내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엿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의 모습이 개별적이듯 유머 또한 하나의 명제로 규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을 떼어놓으면 하나는 욕망이 되고, 다른 하나는 조롱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그게 유머가 사랑을 떠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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